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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민 Oct 09. 2020

매운탕집에서 사라진 신발

3년 전쯤인 것 같다. 지인들과 장호항에 놀러 간 적이 있다. 회 먹고 술 먹고 바다 보고. 전형적인 동해 여행의 루틴대로 흘러간 1박 2일이었지만, 유독 그 여행이 기억에 남는 데엔 이유가 있다. 


서울로 출발하는 날. 전 날의 숙취를 풀기 위해 다음날 점심때쯤 느지막하게 매운탕집을 찾아갔다. 오랜 기간 베인듯한 비린내가 스멀스멀 올라오던 작은 항구. 한겨울이라 인적은 드물었던 동네였다. 지도를 켜고 굽이진 골목을 걸어 들어가니 다소 허름하지만 정갈하게 생긴 단층 건물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몰랐다. 이 건물을 들락날락거리며 시간을 소비하게 될 줄은. 


입구에 신발을 벗고 들어갔다. 우린 여섯 명이었고, 오래 있을 요량이었기에 가장 구석진 곳으로 자리를 잡았다. 식사 시간을 조금 지난 때라 손님은 많지 않았다. 뜨끈뜨끈한 온돌바닥에 얼었던 몸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보글보글 끓는 매운탕에 홀려 술도 몇 순배 돌았다. 방안의 온기와 소주의 취기로 발갛게 달아오른 볼을 하고 두어 시간이 지나서야 식당을 나왔던 것 같다. 가까운 데 가서 커피나 한 잔씩 하자며.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히 아까까지 멀쩡하게 신었던 롱부츠 지퍼가 안 잠기는 것이다. 


식당 바깥 나무 의자에 걸터앉아 부츠와 씨름을 하고 있으니 동생들이 하나 둘 다가온다. 언니, 왜 그래? 왜 지퍼를 못 잠가. 너무 많이 먹어서 다리 부은 거 아니야? 얼마나 먹은 거야. 아휴, 그러게. 갑자기 살이 쪘나? 이상하네. 낑낑대니 보다 못한 동생은 무릎까지 꿇고 앉아 내 다리를 잡아준다. 


"이상하다, 내가 다리가 잘 붓는 편이긴 하거든. 근데 이렇게까지 붓진 않는데."

"아니야, 될 것 같아. 해봐. 내가 잡고 있어. 올려봐, 그렇지, 그렇지!"


꿈쩍도 안 한다.  


멀리서 또 다른 지인이 다가온다. 맵고 짠 거 먹으면 일시적으로 부을 수도 있대 (두 시간 만에?). 너 그냥 그러고 차까지 이동해.  


낑낑거리다 웃음 터지고 다시 낑낑거리고를 반복하다 정강이까지 겨우 올리고 근처 커피숍을 찾았다. 2층에 올라 소파에 앉아 처음부터 다시 신겠노라 부츠를 다 벗었다. 그때 눈이 휘둥그레진 지인. 


"언니, 이거 언니 꺼 아닌 것 같은데?"


맙소사... 자세히 보니 그렇다. 정말 자세히 들여다봤더니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가죽이 자글자글하게 벗겨질 조짐이 보이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내 부츠가 아니다. 내 건 사놓고 딱 한 번 신은 부츠인 데다 딱 맞는 핏이 아니라 신을 때 고생한 적이 없다. 브랜드도 다르다. 굽도 높이가 다르다. 그게 왜 이제야 보이는 건지. 


지인 한 명이 서둘러 카페를 내려가 매운탕집으로 달려갔고 뒤따라 나온 나는 절뚝거리며 지인들의 부축을 받아 커피숍에 향했다. 다시 봐도 내 롱부츠는 없다. 식당 주인과 주변 손님을 대상으로 CSI에 버금가는 취조를 마치고 알아낸 건 내 부츠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는 것이었다. 


자초지종은 그랬다. 우리가 밥을 먹는 사이 방문했던 누군가가 식사를 마치고 내 신발을 신은채 집에 가버린 것이다(우리가 밥을 오래 먹긴 했다). 들어왔을 때 검은색 롱부츠는 내 것 하나였고 난 으레 나갈 때 신발장에 있던 검은색 롱부츠가 내 것이겠거니 신었던 거다. 언뜻 보기에 (술에 취하진 않았다) 비슷해 보였고 많이 걸어 다녔던 터라 발이 부었겠거니 생각했지 설마 타인의 부츠와 바꿔치기가 됐을 거라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사정을 알게 된 지인들은 분노했다. 언니 부츠가 훨씬 비싼 거잖아. 너무했다, 진짜. 어떻게 그걸 가져갈 생각을 해? 딱 봐도 언니 부츠가 새 거라서 그랬나 봐. 


그런가 보지, 했지만 딱히 부정도 긍정도 하고 싶지 않았다. 발을 밀어 넣고도 내 건지 남의 것인지도 몰랐던 내가 누구를 탓하랴. 설사 그때 알아차렸다고 해도 딱히 범인(한 번만 불러보자)을 잡을 방법은 없었겠지만 말이다. 둔감함의 극치를 넘어선 나 자신한테 놀라기도 했다. 한정된 조건(부츠 한 켤레)에선 사고 범위가 이렇게까지(당연히 내 부츠겠지) 좁아질 수도 있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했고. 


그때 그 항구와 느낌이 비슷한 정동진 심곡항에 왔다. 문득 잃어버린 부츠가 생각난다. 잘 있나. 이왕 떠난 거 좋은 주인 만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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