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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민 Oct 13. 2020

보더콜리와 남자의 비밀

서프샵에 특별한 손님이 찾아왔다.


케이지 안에 웅크리고 앉은 보더콜리와 스케이트보드를 잘 타게 생긴 곱슬머리 남자, 온종일 노트북을 열고 테라스 나무 의자에 앉아있는 후드티 남자. 셋은 아니, 엄밀히 말해  그 둘은 서핑만을 즐기러 온 것 같지는 않다. 나와 비슷한 과인 것 같았다. 하고 싶은 게 많아 보였다. 바다에 들어가 있는 시간만큼이나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있는 시간이 길고 노트북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길다. 날씨가 좋아 바깥에 숙박객 모두가 나와있는 와중에도 둘은 방 안에 들어가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다. 목소리도 크지 않다. 귀를 기울여야 들릴 듯하다. 혼자 왔다면 이래저래 사람들과 말도 섞어가며 존재를 금세 드러내지만, 둘이 오면 둘이 대화하는 시간이 많은 만큼 베일이 벗겨지기까지 좀 걸린다.


문제는 같이 온 보더콜리였다. 이미 서프 샵에서 기르고 있는 대형견 골든 레트리버가 있다 보니 풀어둘 수는 없었고, 마땅히 묶을 곳도 없는 데다 묶어둘 만한 끈도 없어 보였다. 보더콜리 목에 묶인 반려견 줄은 딱 산책할 때 제압하기 좋은 사이즈여서 묶어둔다고 하더라도 같은 자리만 빙빙 돌 게 뻔해 보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보더콜리를 주인은 케이지에 가둬두기로 결정한 듯했다. 아직 11개월인 데다 워낙 활동량이 많고 낯을 가리지 않아 방치해두기엔 주인도 내심 불안했던 것 같다.


보더콜리는 호기심이 많았다. 지나가는 행인과 눈만 마주치면 낑낑거리기 일쑤였고 끊임없이 바깥에 나가고 싶은 마음을 표출하기 바빴다. 한적하다못해 고요하기까지 해 파도소리와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lo-fi 음악(low-fidelity의 줄임말로 hi-fi와 반대의 뜻을 가진 저음질이란 뜻. 날것의 감미로운 음악, 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잔잔하게 깔리는 이곳을 어느샌가 11개월짜리 낑낑거림이 가득 메워가고 있었다. 처음엔 뭐야, 갇혀있는 거야? 잠깐 둔 건가? 하면서 호기심을 표하던 사람들의 목소리에도 어느 순간 짜증이 섞이기 시작했다. 너무 불쌍한 거 아닌가? 저 좁은 공간에 하루 종일 가둬놓고 있어. 저건 학대지 거의.


낑낑거림이 커질 때마다 방 안에 있던 주인은 소리를 듣고 달려 나왔다. 슬리퍼를 끌고 테라스 앞까지 뛰어나와 그 자신과 보더콜리만이 알아듣는 암호로 주의를 줬다. 보더콜리는 금세 조용해졌다. 시야에 무언가가 지나가거나 사람들 웃음소리가 커져 발을 동동 구르거나 할 때면 보더콜리는 흥분했다. 컹컹 짖어댔다. 급기야 주인은 케이지 위에 놓여있던 노란 담요를 케이지 앞으로 내려버렸다. 보더콜리가 아무것도 보지 못하도록 놔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경악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어? 하지만 아무도 주인에게 대놓고 말하진 않았다. 아니, 못했다. 남의 자식 교육방법에 감 내놔라 배 내놔라 하고 싶지 않으니까. 다들 조용히 눈으로 말했다. 보더콜리야, 힘내.


보더콜리가 온종일 갇혀있던  아니다. 이따금씩 주인은 보더콜리가 갇혀있는 케이지를 열고 세상으로 나오게  줬다.   산책을 나가면  시간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교육을 꽤나  받은 듯했다. 기다리라면 기다리고, 먹으라면 먹었다. 보더콜리의 특기는 원반 잡기였다. 서커스에 준하는 점프력이었다. 빨간 고무로 생긴 원반은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고 보더콜리는 잽싸게 튀어올라 그것을 덥석 물곤 했다. 칭찬해주세요, 라는 눈빛을 하고 주인에게 얌전히 돌려주는 걸로 마무리된다.


한 번은 다 같이 점심을 먹겠다고 긴 나무 테이블에 앉아 일렬로 밥상을 차렸다. 식사를 마치고 수다를 떠는데 주인이 원반 돌리기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고개를 돌렸고 보더콜리가 원반을 물 때마다 함성과 박수가 이어졌다. 보더콜리는 기특하게도 물어온 원반을 테이블에 앉은 한 명, 한 명에게 갖다 주었다. 다시 던져달라는 눈빛도 함께. 한동안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화두는 보더콜리가 됐다.


저 개가 하도 똑똑해서 대회 중에 보더콜리는 못 나가는 대회도 있대

보더콜리가 개 중에서 가장 똑똑한 종류래

보더콜리가 원래 활동력이 좋은 편이래  


정작 보더콜리는 케이지 안에서 우리의 대화를 들었을 뿐이지만.


또 다른 아주 맑았던 날. 그날은 여기 온 이후로 가장 낮 기온이 따뜻했던 날이었다. 또다시 서프샵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웃고 떠드는 소리에서 조금 멀어진 채 나는 신나게 놀고 있는 남자와 보더콜리를 응시했다. 그와 보더콜리의 시간엔 뚜렷한 목적이 있어 보였다. 처음엔 놀고 있는 줄 알았는데 놀이엔 정해진 패턴이 있었다. 보더콜리가 스케이트보드 위에 두 앞발을 얹으면 주인은 예쓰, 라고 나지막한 목소리를 건네며 간식을 하나 입에 물려준다.


그런데 신기한 게 있다. 남자는 처음에 딱 한 번 보더콜리의 두 발을 스케이트보드에 얹었을 뿐이고, 그 후론 간식의 맛을 알아버린 보더콜리가 자연스럽게 두 발을 올리는 것이었다. 물론 개중엔 실패작도 있었다. 한 발만 올린다던지 다급한 마음에 주인의 두 다리에 발을 갖다 댄다던지. 그럴 때마다 주인은 아니야, 다시 해, 라는 단어 대신 말없이 간식을 높이 올려 보였다. 보더콜리는 머리를 써야 했다. 간식을 먹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어쩌다 두 발이 올라갔을 때 간식이 온다. 이건가. 한 발이 내려간다. 못 먹는다. 아 왜 안 주지.


그 일련의 과정을 한 덩어리로 본다면 남자와 보더콜리는 백 개쯤 되어 보이는 덩어리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단 한 번도 화를 내거나 가르치거나 주의를 주지 않는 남자에게 눈이 갔다. 훈련은 저렇게 시키는 거구나. 비단 반려견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주인과의 유대관계, 신뢰는 저렇게 쌓는 거구나. 성공했다고 해서 격하게 환호하거나 실패했다고 해서 과한 주의를 주지 않고 감정의 동요 없이 반복하는 남자가 대단해 보이기 시작했다. 원반 돌리기도 저렇게 끊임없이 반복한 결과물이겠구나. 생각하니 비로소 남자도 보더콜리도 달리 보였다. 어쩌면 케이지 안에 있던 시간도 내가 모르는 그 어떤 이유들이 감춰져 있던 걸지도 모르겠다.


남자 둘과 보더콜리는 그 후로 몇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떠났다. 알고 보니 그들은 기차를 타고 왔던 것이었다. 기차를 탑승하는 보더콜리라니. 케이지에 갇혀있던 긴 시간들보다 훨씬 고난도일 수도 있겠다. 고작 3일 본 게 전부인 내가 섣불리 판단할 수 있는 건 애초에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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