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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민 Nov 05. 2020

오만 원어치 미니멀리즘

합정역 9번 출구 앞. 한 여성이 밴치 옆을 서성거린다. 연신 휴대폰을 확인하면서도 곁눈질로 오가는 행인들의 모습을 가늠하응 여성. 가방 안에 귀중품이라도 있는 걸까. 한쪽 손을 손가방에 푹 찔러 넣고 무언가 만지작거리는 모양새다.


5분쯤 지났을까. 그녀 앞으로 하얀색 승용차가 멈춰 섰다. 비상등이 켜지고 운전석에서 모자를 푹 눌러쓴 남성이 내린다. 남성의 행색을 재빨리 훑은 여성은 차가 서 있는 대로변으로 몇 걸음 다가섰다. 남성이 전화를 걸자 휴대폰에 뜬 낯선 번호를 확인한 여성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올라온다.


"하루님, 맞나요?"

"네네, 저예요."


여성이 가방에서 꺼낸 물건을 꼼꼼히 확인한 남성, 주머니 속에서 현찰을 꺼낸다. 팔을 쭉 뻗어 여성에게 보여주듯 지폐를 손가락으로 튕겨낸다. 고개를 끄덕인 여성은 현찰을 받아 들고, 남성은 물건을 손에 꼭 쥔 채 승용차로 돌아간다.


수년 전, 중고나라에서 아이폰 공기계를 판매했던 나의 이야기다. 중고나라란 중고물품 판매 사이트로 각종 생활용품은 물론 가전, 가구에 요즘은 부동산과 중고차도 매물로 오가는 모양이다. 꽤 큰 온라인 거래장이지만, 그만큼 007 작전을 방불케 하는 긴장감이 맴도는 곳이다.


중고나라에 단점이 있다면 신원확인이 안 된다는 점이다. 기본적인 인증절차가 있긴 해도 사기꾼들은 늘 머리 위에 있다. 며칠 전 중고나라에서 명품 사기행각을 벌여온 20대 여성이 일본에서 붙잡혔다. 128명으로부터 6억이 넘는 돈을 꿀꺽했으니 보통내기가 아니다. 일본 인터폴과 공조한 끝에 한국으로 송환할 수 있었지만, 글쎄. 128명에게 송환 소식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다. 그간 쏟아낸 분노 에너지와 시간, 마음고생을 생각하면 그 어떤 걸로도 보상받을 수 없을 것이다.


중고나라가 대형 괴물이 되어가는 사이 잔망스러운 이름을 가진 사이트가 탄생했다. 당근 마켓. 당근 마켓의 로고는 당근 모양이지만, 가운데가 뻥 뚫려있다. 위치기반 서비스를 의미하는 아이콘이다. GPS. 당신이 있는 위치. 당신이 생활하는 동네 반경 내에서 거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지난해 거래액이 7000억 원을 돌파했고, 현재 가입자 수는 800만 명을 넘어섰다. (2020년 9월 기준)


동네에서만 살 수 있는 게 뭐 그리 대수인가, 싶지만 그게 또 대수가 된다. 마을마다 특성이 있어서 파는 물건이 다르단다. 한 온라인 뉴스매체에서 공동대표 김 씨가 말한다.


“마을마다 특성이 있어서 파는 물건이 다 달라요. 캠핑카나 배도 팔고 수산물이나 흙, 벽돌, 심지어는 전원주택도 파시더라고요. 반려동물을 잃어버리면 분실물 카테고리에 올려서 동네 사람들에게 알림이 가게 해 놨는데, 그 기능을 통해서 잃어버린 동물을 찾은 사례가 많아서 흐뭇해요. 코로나 19로 인해 마스크 대란이 일었을 때는 당근 마켓 내에서 마스크 가격을 너무 비싸게 올린 게시물은 노출을 제한했어요. 자연스럽게 마스크 거래가가 형성돼서 한창 품귀현상이 일었을 때 유일하게 마스크를 거래할 수 있는 마켓이기도 했죠.”


지역공동체를 활성화시킨다는 장점이 있지만, 형언할 수 없는 유대감 또한 큰 역할을 해주는 모양이다.


며칠 전 아는 동생이 당근 마켓에 가입했다며 빨리 첫 번째 물건이 팔리길 바란다고 하길래 그게 그렇게 이득이 되는 일인가 싶었는데, 남편이 토스트기를 팔고 왔단다. 알고 보니 맞은편 아파트 주민인데, 빵을 구워 먹고 싶어 눈이 빠져라 기다렸던 모양이다. 토스트기를 물품으로 올리자마자 바로 연락해온 그녀는 이거, 바로 구워 먹을 수 있는 거죠? 들떠하며 룰루랄라 집으로 돌아갔단다. 깔깔거리며 현관을 들어오는 남편이 왠지 모르게 부럽다며 얼른 거래에 성공하고 싶다고.


반신반의 호기심으로 안 쓴 채 먼지만 쌓인 배드민턴 라켓 세 자루를 올려보았다. 워낙 헐값에 내놔서일까 올린 지 1분도 안 되어 채팅 칸에 알림이 떴다. 다짜고짜 세 자루 일괄 구매할 테니 만원 깎아달라는데, 주소를 보아하니 (OO동 까지만 뜬다)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이다. 흔쾌히 알겠다 했다.


사진도 설명도 나름 꼼꼼하게 첨부했는데 치다 갑자기 라켓이 부러질 일은 없겠죠? 물어보는 걸 보니 헐값에 이런 라켓이? 안 믿는 눈치다. 나도 동호인이라 소개를 하니 직장이 바로 옆이라며 출근 전에 들러 구매하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직장도 엎어지면 코 닿을 곳. 심지어 같은 배드민턴 동호인이다. 만나면 얼마나 반가울까. 알 수 없는 끈끈함이 저 밑에서 올라온다. 괜히 반갑다. 도착하시면 연락 주세요, 연락처를 남길까 하다가 초짜인 게 들통날까 봐 참았는데 생각해보니 모두가 다 아는 동네, 아는 길, 아는 지점에서 만나니 딱히 연락처가 필요 없겠단 생각도 든다.


거래를 일단락시키고 약속시간 설정 알림을 해놓으니 당근 마켓에서 메시지가 도착한다.



비움. 미니멀리즘이 화두로 떠오르면서 당근 마켓은 1등 공신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비단 물건만 비워내는 게 아니다. 동네 주민이니 무턱대고 깎아달라 요구하거나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을 책정하기도 꺼려진다. 적정한 선에서 이익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사라지고 기분 좋게 거래하고 싶다는 여유로움이 생긴다.


내일 첫 거래가 성사될까. 출근이 8시라며 7시 50분에 만나기로 했는데 지각하면 안 되니까 40분부터 기다리겠다는 거래자. 애틋하다. 예전부터 팔려고 내놓았던 라켓이지만, 막무가내로 가격을 깎으려는 사람들이 많아 정중히 거절했었다. 가치를 알아주는 꼭 필요한 사람에게 닿았으면 하는 바람이 컸다. 헐값이지만, 훨씬 기분 좋게 떠나보낸다. 무엇보다 수년간 먼지 쌓인 채 제주인을 기다렸던 라켓이 찾아간다니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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