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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민 Nov 05. 2020

도대체 뭘 먹은 거야?

살이 좀 찌고 나서 깨달은 게 있다.

살쪘다는 소리가 마냥 기분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


그것은 같은 글자로 이루어졌지만 전혀 다른 문장, 전혀 다른 억양, 전혀 다른 마음이 담겨있어서일 거다.


사복을 입었을 땐 그나마 (겨울이다 보니) 티가 덜 나지만, 배드민턴복을 입으면 확 드러난다. 오랜만에 체육관에 찾아갔을 때 언니, 오빠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승민아, 뭘 먹고 지낸 거야?

승민아... (말을 잇지 못함)

승민아, 못 알아봤어

승민아, 너도 나만큼 쪘구나!

승민아, 네가 참 예뻤었지. (과거형)

승민아, 너는 과자 먹지 마. (주변 사람에게 과자를 권유하던 중)


예전 같았으면 기분 나빠했을 텐데 이상하게 싫지 않다. 되려 옆에서 같이 있던 동생이 눈을 흘기며 언니, 듣지 마. 아휴, 왜 저래. 내 편을 들어주었지만 정작 나는 티가 많이 나는구나 했을 뿐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종아리가 부어 한의원을 찾았을 때도 평소엔 별다른 말 없이 시크하게 침만 몇 방 놔주는 의사가 그날따라 나와 아이컨텍을 시도했다. 다리가 왜 부었게요?라는 질문과 함께. 5년째 다니는 한의원이지만 꽤나 드문 모습이라 살쪄서요? 받아쳤다. 의사는 그때부터 펙폭을 날려오기 시작했다.


그렇죠. 잘 알고 계시네요. 다이어트는 뭐다? 뇌가 하는 것이다. 살 빼야지, 가 아니고 무조건 뺀다, 예요. 그 차이를 아시겠죠? 기억하세요. 다이어트는 뇌로 하는 것이다. 체중계는 매일 올라간다, 알겠죠? 다리는 매일 밤 거꾸로 들어 5분 쉬고 다시 5분, 반복해준다. 오케이?


5년 동안 주고받은 대화보다도 많은 양이다. 고마웠다. 말수 적은 의사를 봇물 터지듯 말하게 만든 나의 체지방들에게 고마웠다.


딱 달라붙는 옷을 입고 출근하던 날, 엄마가 말했다. 승민아, 자신감을 가져. 딱 예뻐. 아주 보기 좋아. (이 말을 듣고 쪘다는 걸 실감했다)


친한 친구가 살찐 것 같냐는 질문에 잘 모르겠지만, 좀 그래 보이 기도 하지만, 빼면 되지, 뭐가 문제야?라고 되물었을 때. 군더더기 없는 쿨함이 좋았다.


반면 별 거 아닌 워딩에도 기분이 나빠질 때가 있다. 잘 생각은 안 나지만, 으이그 처녀가 그렇게 살이 찌면 어떡해! 다 너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한참 쳐다보다가)와, 근데 너 정말 찌긴 쪘다.라는 식이랄까.


놀리려는 마음이 담겨있으면 고스란히 드러난다. 목소리에도 표정에도 눈빛에도. 같은 말이라도 누가 하는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사실 진짜 가까운 사람들은 굳이 당신 살쪘어, 라는 걸 알려오지 않는다 (내 경우엔 그렇다). 그래서 괜히 물어보게 되고, 솔직하게 말해주길 원하면서도 직설적이면 상처 받는 게 가까운 관계들.


그러니까 어떤 말을 고르는지, 도 중요하지만 어떤 마음으로 이 말을 건네는지, 가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거다. 몰랐던 건 아니지만 막상 듣는 입장이 되어보니 마음은 전달된다는 걸 뼈저리게 느낀다. 그렇다면? 반성할 차례다. 은연중에 남자애들이라면 덜 기분 나빠하겠지, 싶어 편하게 말을 건넸던 나의 과오에 대해. 친하니까 말해주는 게 낫겠지, 싶어 직설적으로 표현했던 나의 과거 언행을. 나는 한 마디를 건네는 거지만 그 사람은 가는 곳마다 열 마디씩 듣는다는 것도 새삼 알았다.


겨울맞이로 며칠 째 옷장을 깡그리 정리 중이다. 코로나로 뒤덮인 한 해였던 터라 잊고 지냈던 옷들이 꽤 많다. 하나하나 꺼내 개고 정리하면서 또 깨닫는다. 지금 입을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자, 이제 뺄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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