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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민 Nov 13. 2020

꼰대와 꼰대가 되기 싫은 우리, 그 사이에서

요즘 직장 동료랑 자주 주고받는 말이 있다.


이런 말 하면 꼰대인가요...?


상대방에게 동조를 구하는 건 아마도 내가 가진 의견이 많이 엇나가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거겠지만, 어렴풋하게 우린 짐작하고 있다. 우리도 꼰대구나.


퇴근시간을 한 시간 남짓 남겨두고 서서히 책상 위를 정리하는 인턴이 있었다. 서류를 모아 툭툭 가지런히 모아 두고, 꽂혀있던 USB를 뽑아 제자리에 놓아둔다. 컴퓨터 바탕화면에 띄워진 창을 하나씩 클릭해서 닫는다. 절대 컴퓨터를 끄진 않는다. 가방에서 주섬주섬 파우치를 꺼내 들어 그 안에 쿠션을 쏙 빼낸다. 책상에 상반신을 바짝 숙이고, 데스크톱 모니터를 방패 삼아 쿠션 파우더를 얼굴에 두들긴다. 톡톡톡 작고 미세하지만 정교한 그 손놀림이 끝나면 시계를 힐끔 보고 화장실에 다녀온다. 다시 조용히 자리에 앉는다. 고개를 쭉 내밀어 앞자리에 앉은 동료에게 묻는다.


시키실 거 없으면 저 먼저 퇴근해도 될까요?


그러라 한다. 대부분은 그러라 한다. 집에 가고 싶은 열망의 눈초리를 보내오는 이에게 일하자고 말할 용기를 가진 사람이 세상에 많지는 않다. 아직 여섯 시가 되려면 분침이 한참 돌아야 할 것 같은데, 시계를 말없이 바라보던 동료와 눈이 마주친다. 이내 웃음이 터진다. 눈빛으로 말한다. 지금 웃고 있는 나, 꼰대 맞지?


아마도 내 기억 속의 나는 상당히 미화되어있는 모양이다. 나 때는 안 저랬는데, 한없이 곱씹고 앉아있다. 나도 집에 빨리 가고 싶었을 때가 있었을 거다. 시간이 언제 가나 시계만 노려보기도 했고, 여섯 시가 지나면 왜 아무 말이 없을까 선배를 노려본 적 또한 있을 거다. 사무실에서 화장품을 꺼내 얼굴에 분칠을 했던 기억은 없지만, 다른 방면의 당돌함은 분명 존재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속이 얹힌 것 같은 이 답답함은 뭔지. 같은 실수를 끊임없이 반복하면서도 딱히 노력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 정말 간단한 몇 가지를 주문해도 먹은 밥 체한 것 같은 보고를 받아야 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속이 있다며 퇴근해버리는 인턴의 뒷모습을 볼 때면 지금 저들의 감정에 공감할 수 없음이 불행인지 다행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정해진 룰을 무시하고 저 혼자 마이웨이를 걸어가는 사람을 볼 때, 속 시원하게 그건 아니지 않냐, 고 용기 내어 말해본 기억이 없다. 분명한 건 그 상대의 연차나 나이가 나보다 어리면 꼰대가 될까 주저했고, 많거나 비슷하면 건방져보일까봐 참았다. 어쨌거나 괜한 분란을 일으키기 싫어 참았다는 점에선 같다. 그러니 결국 꼰대라는 건 나이가 주는 하나의 장벽일뿐 일에 대한 책임감이나 능력의 유무와는 별개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퇴근시간이 조금 지나도 해야 하는 일은 하는 게 맞잖아?라는 말은 더 이상 정당한 주장이 아닌 게 돼버린 모양이다. 정도껏, 이라는 말은 더 이상 의미가 무색해져 버렸다. 그 어떤 말도 절대 강요가 되어선 안 되며 자칫 선을 넘어버리면 직장 내 괴롭힘으로 고소당할 확률 또한 생긴다. 그래서 그저 웃는다. 그저 뜻이 맞는 사람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제가 벌써 꼰대가 되어버렸나 봐요, 헤헤. 웃는 게 전부다.


생각해본다. 꼰대라는 말을 듣더라도 할 말은 해야 할 때가 있지 않을까. 분란을 일으킨다 해도 본질에서 역행하는 행위가 잦다면 그건 한 번 부딪혀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물론 그 이후에 듣게 될 욕, 평판은 감내할 각오도 따라온다.


정답은 없다. 물 흘러가듯 내버려 두는 곳도, 쥐 잡듯 지적질이 난무하는 곳도, 둘 다 일하기 좋은 환경은 아니니까. 좋은 어른이 된다는 건 이토록 어려운 일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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