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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민 Oct 08. 2021

초록방의 보이지 않는 약속


여기 초록색 방이 있습니다. 입장하는 순간 규칙이 하나 생깁니다. 누가 나를 부를 때마다 보직과 이름 석 자로 대답해야 한다는 건데요. 나를 부르는 건 이 방에 먼저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어깨를 툭 치거나 옷깃이 스친다거나 머리를 때리기도 하지요. 흥분해서 "아야! 왜 때리세요?" 하면 안 되고요. 무조건 보직과 이름을 큰소리로 또박또박 외쳐야 합니다.


전화받을 때도 정해진 멘트가 있어요. 습관처럼 "여보세요?" 했다간 긴 정적이 흐른 끝에 어마 무시한 욕설이 쏟아질지도 모릅니다. 만약 상대방의 말을 못 알아들었다면 "잘 못 알아들었습니다?"라고 해주어야 합니다. "네?" "다시 한번만요?" "뭐라고요?" 이런 말들은 용납되지 않아요. 초록방에 처음 들어온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적용되는 규칙입니다. 이 방이 어디인지, 짐작하셨겠지요. 바로 '군대'입니다.


초록방의 삶을 산 적 없는 사람에겐 굉장히 낯선 언어문화죠. "여보세요?"를 하면 안 된다니요. 길거리에서 누가 내 머리를 때리면 경찰을 불러야죠. 세상에 어느 누가 "대리 2년 차! 홍, 길, 동!" 본명을 외치겠습니까. 이 모든 건 군대라는 특수한 상황이기에 가능합니다. 정해진 약속들이 있다는 뜻이죠. 일상에서 우리가 가늠할 수 있는, 그 이상을 뛰어넘는 화법이 군대에선 비일비재하다는 겁니다. (물론 그 여파, 군대언어의 잔상은 사회 곳곳에서 볼 수 있지만, 그건 다시 언급하겠습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D.P'를 다섯 번째 정주행하고 있는데요. 탈영병 쫓는 체포전담 헌병 이야기입니다. 드라마는 수많은 부대 가운데에서도 헌병이라는 특정 문화를 조명하고, 시대적 배경 또한 2013~4년으로 설정되어있습니다. 보는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감각이 다른 이유겠지요. 다만, 군대문화의 단면을 들여다보기엔 좋은 사례가 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여기서 '눈치'라는 관점에 주목해 볼 생각입니다. 군대의 언어문화를 사례로 몇 개, 가져와 볼 건데요. 일단, 장면 하나를 간단하게 소개해보겠습니다.



#1 <이등병 안준호와 상병 박성우가 대화하는 장면>


박성우 상병이 창밖을 바라보면서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며 장난 섞인 한탄을 쏟아냅니다.

"아유, 나가고 싶은 날씨다. 야, 탈영할 거면 하루라도 빨리해. 요즘 탈영병이 없어서 밖을 못 나간다. 자지가 근질거려 뒈지겠어, 아이씨." (비속어 및 욕설은 현실감을 위해 그대로 살려둡니다)

하고 안준호를 올려다봅니다.


"오케이?"


안준호는 대답하죠.

"예, 알겠습니다."


대답을 듣자마자 박성우가 정색합니다. 안준호에게 한 발자국 다가가요.


"알겠다고? 이 개새끼가... 탈영을 하겠다는 거야?"


당황한 안준호가 고쳐 말합니다.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이내 장난이라는 듯 낄낄거리는 박성우.

"아이씨, 장난이야, 미안해."


담배 한 개비를 물려주곤 사라집니다. 안준호의 표정에 변화는 없고요.


이등병인 안준호에게 정답이란 게 있었을까요? 여기서 잠깐 안준호 역할을 연기했던 배우 정해인의 인터뷰를 가져와 보겠습니다.


"연기하는 데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이등병이라는 점이었어요. 할 수 있는 게 없고, 할 수 있는 대답도 정해져 있잖아요. 주변 자극이나 새로운 환경을 받아들이며 인물이 어떻게 적응하는지, 선임들이 하는 말과 표정을 기민하게 캐치하고 리액션을 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액션보다 리액션에 중점을 뒀습니다." (서울경제 2021.09.02)


배우 정해인이 표현한 '이등병의 역할'입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정확하게 눈치의 정의를 내려주었어요. 눈치가 빠르다는 건 액션이 아닌 리액션, 즉 상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주변 자극이나 새로운 환경은 '군대'라는 조직을 뜻하지만, 말과 표정을 기민하게 캐치하고 리액션해야 하는 대상은 '선임'입니다. 둘 다 눈치를 봐야 하는 대상인 거지요. 그게 어떻게 다를 수 있냐, 할 수 있지만, 장면 #1은 군대라는 광범위한 공간보다 눈앞의 선임에게 눈치의 초점이 향해있다는 걸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선임이 '탈영하라'고 지시한다면 그건 '군대'의 지침과 역행하는 명령이지요. 그것도 탈영병을 쫓는 헌병 부대에서 말입니다. 그런데 안준호는 "지금 저보고 탈영하란 말씀이십니까?" 할 수가 없어요. "그건 잘못된 명령이지 말입니다." 할 수도 없죠. 이등병이니까요. 말 자체는 모순일지언정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인물이 더 중요한 겁니다. 적어도 그 순간에는요. 그래서 고른 답이 "예, 알겠습니다." 였던 겁니다. 탈영을 긍정해버린 셈이죠.


그런데 상병 박성우는 정색을 해요. "알겠다고? 이 개새끼가... 탈영을 하겠다는 거야?" 하래서 한다는 것뿐인데, 덤으로 욕 한 바가지 듣습니다. 순간적으로 안준호는 눈치채는 거죠. 아, 답을 바꿔야겠구나. 그리곤 다시 말합니다.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그러니 이 상황에서 이등병 안준호에게 정답인 눈치란 '그때그때 선임의 비위를 잘 맞추는 것'이 되겠습니다.


언뜻 우리에게도 익숙한 장면이기도 합니다. 저 말을 아버지로부터, 회사 상사로부터, 친구한테서 종종 들었습니다. 제가 한 적은 감히 없다고 적어두겠습니다. 보통 그들이 말하는 대상은 그들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보직자였어요.


상급자가 터무니없는 일을 시켜도 하급자 입장에선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수직관계가 명확한 직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지요. 상황이 여의치 않거나 도의적으로 어긋난 일이라 할지라도 어쩔 수 없이 명령을 따라야 하는 겁니다. 그 순간만큼은 나의 주관이 철저하게 배제됩니다. 악습이지요. 악습이지만, 여기서만큼은 수직적 계급사회, 고질적인 문제, 문화의 명과 암, 옮고 그름을 논하지 않겠습니다. '까라면 까'라는 문화는 사라지고 있지만, 그 상흔은 우리 사회 곳곳에, 언어의 이면에 숨어있습니다. 문장에 숨겨진 앞뒤 맥락을 추측해볼까요?


"OO(이)가 까라면 까야지. (별수 있겠어.)"


동그라미 안에 들어갈 법한 대상이 여럿 떠오릅니다. 소속된 조직이나 단체가 될 수도 있을 거고요. 국가가 될 수도 있을 거고요. '사장이 까라면 까야지, 위에서 까라면 까야지'라는 식으로 쓰이지요. 동그라미 안에 들어가는 건 상급자인 위치에 있는 인물임을 의미합니다. 만약 '아내'가 된다면 아내는 권력을 쥔 대상이 될 거고요. '딸자식'이 된다면 딸바보인 아버지를 떠올려 볼 수도 있겠습니다. '집주인'이 된다면 월세나 전세 거주자를 의미할 수 있지요. 지나가는 지렁이가 까라면 까야지, 라고 한다면 뜻이 잘 전달되지 않겠죠? 전적으로 내 기준에서 권력을 쥐고 있는 대상을 뜻합니다.


사장이 말단사원을 지칭하며 다른 사원들 앞에서 "인턴이 까라면 까야죠."라고 말하는 모습을 상상해볼까요. 웃음기 가득한 농담이거나 인턴을 존중해준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순 있겠지만, 공식적인 자리에서 정색하고 말하는 모습은 좀처럼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결국 눈치를 보는 대상은 나보다 권력을 가진 사람, 다른 사람에겐 몰라도 나한테 만큼은 힘을 가진 자, 가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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