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대학에 갓 입학한 4월의 봄날. 매년 이맘때면 캠퍼스 정문이 복작복작합니다. 신입생을 데려가려고 동아리 선배들이 죄다 나와있거든요. 손글씨로 적은 피켓을 들고 전단지를 나눠주며 홍보하는 식입니다. 야구, 축구, 유도, 배구, 치어리더, 킥복싱, 영화... 종류도 다양하죠.
일본의 대학 동아리는 부 활동(部活)과 서클(サークル)로 나뉩니다. 부 활동은 주로 스포츠 계열이 많은 비중을 차지합니다. 각종 대회 입상이나 우승을 목표로 두기 때문에 서클보다 본격적이지요. 주로 어렸을 때부터 생활체육을 꾸준히 해왔던 친구들이 부 활동을 선택합니다. 저는 난생처음 라켓을 잡았어요. 배드민턴 부에 가입했죠.
그렇게 한 학기를 보내고 다가온 여름방학. 7박 8일 동안 배드민턴 합숙훈련을 다녀오게 됐습니다. 버스를 장장 네 시간 타고 들어간 산골마을에서 말 그대로 주야장천 배드민턴만 치다가 오는 일정이었습니다. 월요일은 하이클리어, 화요일은 드라이브, 수요일은 스매시, 목요일은 헤어핀, 마지막 날은 리그전. 하루에 하나만 정해서 죽어라 치는 거죠. 밤에 술파티 정도는 있을 줄 알았는데, 석식 마치고 10시에 칼같이 취침했습니다.
사건이 발생한 건 넷째 날이었어요. 생각해보면 그 합숙은 일종의 통과의례였던 것 같습니다. 명분은 훈련이지만, 새벽에 기상해서 삼시 세끼 챙겨 먹고 잠자리에 들기까지 꼬박 24시간을 함께 보내는 거잖아요. 누가 늦잠을 자는지, 누가 코를 고는지, 누가 이불 안 개고 도망갔는지, 평소에 볼 수 없었던 습관들이 하나, 둘 드러납니다. 집단생활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겐 고욕일 시간이죠.
캠퍼스에선 치마 입고 화장하던 친구들도 머리 질끈 동여매고 맨얼굴로 다녔습니다. 그런데 딱 한 명. 매일 컬러 렌즈를 끼고 분칠부터 아이쉐도우까지 공을 들이는 친구 B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화장하느라 이불 개는 걸 까먹고, 하루는 화장하느라 집합시간을 어겼습니다. 그다음 날은 전날보다 더 늦게 나왔는데, 하필 그게 몇몇 선배들 눈에 띄었던 모양입니다.
연습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왔는데 갑자기 집합하래요. 스물 다섯 명 정도 되는 인원이 일본식 다다미방에 모였습니다. 저랑 친구 B를 비롯한 1학년이 열 명, 나머지는 2학년과 소수의 3학년이었는데요. 차례로 들어간 1학년이 무릎을 꿇고 쪼르륵 앉으니 맞은편으로 2학년이 들어와 하나씩 무릎 꿇고 또 쪼르륵 앉습니다. 무릎 꿇고 일렬로 마주 앉은 광경이 참으로 기이했죠. 잠깐의 정적이 흘렀고 한 선배가 말문을 열었습니다.
"지금부터 각자 한 명씩 돌아가면서 B의 잘못된 점에 대해 말해봅시다."
순간 귀를 의심했습니다. 살면서 들어본 적도, 들어볼 거라 생각해본 적도 없는 말이었어요. 잘못을 하면 보통 그 자리에서 바로 혼이 나는데, 이걸 몇 시간 동안 꾹꾹 참고 있다가 공론화시킨다는 게 낯설게만 느껴졌습니다. 이 자리가 끝나고 얼굴 볼 때 민망할 거 아닙니까. 그러니 아무도 말을 안 할 줄 알았는데요. 그리 길지 않은 정적을 깨뜨린 건 1학년 주장이었습니다.
"B 씨는 아침에 화장하느라 지각을 했습니다."
방금 전까지 B짱(일본식 여자 이름 부르는 호칭)이라고 부르던 친구였는데 말입니다. 주장의 말이 터진 물꼬가 되어, 각자 한 마디씩 덧붙이기 시작했습니다.
"B 씨는... 모두가 이불을 개고 있을 때 화장실에 있었습니다."
"B 씨는 지켜야 할 약속을 소홀히 했습니다."
"B 씨의 행동은 모두에게 민폐였습니다."
여섯 명 정도 차례가 돌아갔을 때 옆에 앉은 B를 슬쩍 보니,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집니다. 아무도 B의 눈물에 반응하지는 않았어요. 짧은 정적이 몇 번 찾아올 뿐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걸까요? '집단'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에게 주어진 룰이 있다면, 모두가 똑같이 참고 노력해서 지켜나가야 하는 건데, 책임을 다 하지 못했으니 질타를 받는 건 당연한 거죠. 적나라하든 공개적이든 방법의 차이는 있지만요. 그 과정에서 개인의 감정만큼은 철저하게 배제됩니다. 일본의 '집단 문화'를 축소판으로 지켜보는 기분이었어요. 집단, 질서, 유대감, 민폐, 라는 개념에 상당히 큰 비중을 둔다는 걸 절감했지요.
결국 B는 새벽에 떠났습니다. 아무도 그의 부재에 입을 열지 않았어요. '돌아갔나 보다'라고 추측할 뿐이었죠. 2학년 선배 한 명이 나중에 저와 동기들에게 슬쩍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친구가 와서 데려갔다고요. 다음날, 마치 어제 일은 없었다는 것처럼 환하게 웃는 동기와 선배들을 보면서 두려움과 안도감이 공존했습니다. 웃기죠. 안도감이 왜 들었을까요.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순간 가차 없이 아웃되는 만큼, 살아남으려면 철저하게 룰을 지켜야 하는 것. 그 룰은 암묵적으로 공유되다가 폭발하는 순간 공론화되는 것. 어제까지 어울리던 친구도 하루아침에 투명인간이 되는 것. 안도감은 어쩌면 인간관계 속 생존에 대한 발버둥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에겐 성인이 되고 가장 처음 겪은 문화 충격이자 사회생활의 신호탄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딘가에 지켜야 하는 선이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것'과 '집단 안에서 개인의 감정은 철저하게 배제된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네가 화장하느라고 늦는 바람에 내가 할 일이 늘어나서 짜증이 났을지언정 짜증을 내지는 않는 거죠. 어디까지 '약속'과 '민폐'라는 프레임으로 전달됩니다.
사실 이 사례를 떠올렸던 건 드라마 'D.P'를 보면서였어요. 갓 전역한 군인이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는 장면이었는데요. 눈치를 보는 대상이 개인보다 집단에 초점이 맞춰지는 일본과 달리 눈앞의 상대방, 즉 개인에 초점이 맞춰진 한국 사례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2 <전역한 병장 황장수와 편의점 사장의 대화>
진열대 물건을 정리하는 황장수를 사장이 부릅니다.
"야. 너 이거 치울 때 나한테 물어보고 치우라니까?"
사장의 손에 들린 건 우유입니다.
황장수는 당당한 기색입니다. 나름 뿌듯한 표정으로 설명하죠.
"아니, 유통 기한이 지나서..."
사장은 기가 차다는 듯 다그칩니다.
"아이, 돌았나. 어디서 말대꾸를... 야, 유통 기한이 지났다고 바로바로 치우면 적자 나는 건? 네가 메꿀 거야? 어?"
손에 쥔 우유로 황장수의 가슴팍을 툭 한 대 칩니다.
고개 숙인 황장수는 곧바로 사과하죠.
"죄송합니다, 잘하겠습니다."
사장은 우유를 건네며 말합니다.
"아, 다시 채워놔." 그리곤 돌아서며 들으란 듯 혼잣말로 중얼거립니다.
"아이, 군필이라 뽑아놨더니만 진짜, 씨, 쯧."
군필이니까 '일을 눈치껏 잘하겠지'라는 기대치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아르바이트 모집 공고에 '군필자'를 적어두던 시절이 있었죠.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 어렴풋이 의미를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군대를 다녀오면 눈치껏 빠릿빠릿하게 일을 잘한다는 인식이 저변에 깔려있는 것이죠.
제가 다니는 배드민턴 동호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월, 수, 금마다 레슨을 받는데요. 한 번 레슨이 시작되면 몇 년씩 이어지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코치 선발에 신중을 기합니다. 운영진을 맡으면서 알게 된 건 우리 클럽의 4,50대 어른들이 군필자를 선호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언제 입영 통지서가 날아와 레슨을 그만둘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한몫하겠지만, 눈치껏 잘할 거라는 기대치가 있는 거죠.
여기서 눈치껏 잘할 거라는 기대치란, 자발적으로 클럽 행사에 참여하고, 스스럼없이 어른들에게 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네고, 소소한 청소나 잡무를 솔선수범하는 걸 뜻합니다. 또한 레슨자들의 (이런 단어를 쓰기 싫습니다만) 비위도 적절하게 맞출 수 있는 역량까지 포함되어 있지요. 레슨 시간은 10분인데, 수차례 레슨을 빠진 동호인에겐 눈치껏 12분, 13분씩 보너스를 해주기를 기대한다던가 정기적으로 술자리를 열어 레슨자들과 친목을 도모한다던가. 직접적으로 해달라, 고 하진 않지만 은근슬쩍 기대하는 눈치입니다.
"아이, 참 코치님도 칼같이 10분에 딱 자르네."
"아니 뭐 가끔은 우리 맥주 한 잔 해도 괜찮을 텐데."
라며 말끝을 흐리는 식이죠. 눈치를 주는 겁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게 코치의 의무냐, 그건 아닙니다. 의무가 아니니까 직설적인 화법을 사용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죠. 코치는 정해진 시간에 체육관에 도착해서 레슨만 잘하면 되는 사람입니다. 코치의 자질과 역량은 레슨을 얼마나 잘 가르치냐, 에 달려있는 거거든요. 하지만 그건 기본이고, 그 이상을 원하는 겁니다. 여기서 그 이상, 이란 클럽마다 다릅니다. '회원인 우리가 코치인 당신한테 원하는 역할'인 셈이죠. 그걸 못하면 "잘 가르치긴 하는데, 눈치가 영... 아쉽네."라는 반응이 나오기도 하는 거죠.
장면 #2에서 황장수가 보여준 모습도 같은 맥락입니다.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를 창고에 넣어두는 건 직원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죠. 유통 기한 지난 우유를 멋모르고 손님이 사갔다가 탈이라도 나면 더 큰일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칭찬해주진 못할 망정 되레 욕설과 폭력을 가하죠. 적자가 나는 건 직원이 책임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저런 경우예요. 지극히 상식적이고 도의적인 일을 했음에도 황장수는 '군대까지 다녀온 놈이 일은 못하네.'라는 평을 듣고 있는 겁니다.
만약 황장수가 다음날 출근해서 또다시 똑같은 상황에 직면한다면 어떤 행동을 취할까요?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를 발견합니다.
1. 유통기한이 지났으니까 창고에 빼둔다.
2. 우유를 가지고 사장한테 가져가서 물어본다.
3.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를 어떻게 판매할 수 있냐며 사장한테 따진다.
또다시 1번과 같은 상황이 발생하면 사장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앞뒤 다 자르고 욕설부터 나올 수도 있습니다. 지시하는 내용이 맞고 틀리고를 떠나 사장이 직접적으로 "나한테 물어봐."라고 한 이상, 고용된 입장에선 그 말을 어기기가 쉽지 않습니다.
2번을 선택할 경우 사장은 맥락상 "그냥 진열대에 놔둬."라고 할 가능성이 크죠. 결과적으로 황장수는 도의적으로 옳지 못한 행동을 했을지언정 눈치 없다는 소리는 안 들을 겁니다.
3번은 상식적으로 가장 이상적인 선택지입니다만, 결과는 처참하죠. 정의의 사도에게 돌아오는 건 해고일 수 있습니다.
황장수는 만기 제대한 병장입니다. 군생활로 소위 말하는 '짬밥'을 먹으며 눈치코치 산전수전 다 겪어온 경우죠. 황장수가 눈치 있는 캐릭터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편의점에서 계속 일할 의지가 있다면 사장 눈밖에 나는 건 원치 않을 테고, 확률적으로 같은 행동은 반복하지 않을 거란 추측을 해봅니다. 그렇다면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새로운 눈치를 보게 되겠죠. 편의점 직원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한 눈치가 아닌 '편의점 사장'을 대상으로 보는 눈치요. 어떤가요? 황장수와 같은 경험이 여러분들에게도 있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