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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민 Oct 23. 2021

'우리'라는 말에 숨겨진 '눈치'

드라마 '미생'에 나오는 장그래를 기억하실까요? 자랑할만한 스펙이나 경력 없이 들어온 인턴사원. 동기들과 비교당하며 미운 오리 새끼 역할을 도맡았던 주인공입니다. 극 초반, 딱풀 사건으로 장그래가 오해를 받아 전무로부터 지적을 받는데요. 딱풀을 빌려 쓰러 온 옆팀 인턴의 실수를 뒤집어쓴 겁니다. 그날 밤, 회식 끝나고 나온 거리에서 옆팀 팀장과 마주친 오 과장. 술기운을 빌어 장그래의 오해를 풀어주는데요.    


"너네 애가 문서에 풀 묻혀가지고 흘리는 바람에 우리 애만 혼났잖아!"  



집으로 돌아온 장그래는 자꾸만 오 과장의 말이 맴돕니다. 오해를 풀어줘서였을까요? 아니었답니다. 장그래가 반복해서 떠올리고, 또 곱씹던 말은 바로 '우리 애' 였어요. 늘 혼내기만 하던 무서운 오 과장이 나를 '우리 애'라고 불러준 거죠.


'우리'라는 말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어떤 걸까요. 들을 때면 이전보다 한 발 가까워진 느낌을 받고, 말할 때면 내가 당신을 가깝게 생각한다는 마음까지 담아내는 말. 좋아하는 상대가 처음 '우리'라고 했던 순간을 기억하시나요? 드라마 '도깨비'에서 극 중 지은탁(김고은)이 김신(공유)을 두고 "우리 아저씨 어디 데려가시게요?"라고 하는데요. 이 '우리'라는 한 마디에 김신은 두근거립니다. 한 번 들으면 여러 번 곱씹는 되는 말인가 봅니다. 이제 막 가까워지려는 사이일수록 설레는 단어이기도 하지요.


일면식 없는 사람에게도 사용하는데요. 우리 지은이(아이유)라며 좋아하는 연예인에게, 우리 흥민이(손흥민)라며 존경하는 인물에게도 쓰죠. '우리'라는 말이 붙으면 내가 애정과 호감을 가진다는 의미가 포함됩니다. 사람에게만 한정된 표현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지요. 집, 동물, 동네, 고향, 회사, 단체, 자치구, 나라까지. 전부 '우리'라는 표현으로 대체하기도 합니다.


"한국은 쇠젓가락으로 먹어?"

"응, 우리는 옛날부터 쇠젓가락으로 먹는 문화가 있었는데, 요즘은 나무젓가락도 사용해."


"우리는 재택근무하는데, 너네는 안 해?"

"우리도 다음 주부터 시작해."


나라 이름이나 회사명을 언급하지 않고도 '우리'라는 두 음절 안에 담아내고 있지요.

 


앞에서 잠깐 언급했던 홉스테드의 문화차원이론입니다. 개인주의(individualism)만 따로 가져왔어요. 세계 평균지수가 50이라면 한국은 18, 일본은 46입니다. 이 숫자가 높을수록 개인의 자유, 독립성, 정체성에 높은 가치를 둔다는 뜻이에요.


반대로 숫자가 낮다면 집단주의(collectivism) 성향이 강한 문화라는 건데요. 내가 속해있는 그룹이 매우 중요해진다는 뜻입니다. 개인주의나 집단주의를 두고 그밖에도 다양한 해석과 특징이 존재하지만요. 저는 여기서 '우리'라는 단어에 초점을 맞춰보려 합니다.


일본 사람들이 일본을 표현할 때 우리나라(我が国)라는 단어를 사용해요. 문자대로 해석하면 '나의 나라'이지만, 저 단어를 쓸 때의 뉘앙스는 '우리'에 가깝습니다. 신문 칼럼 마지막 줄에 흔히 '우리는 이 사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라는 문구가 등장하죠. 그럴 때도 '우리(我々)'라는 말을 쓰고요. '우리 동네(我が町)' 할 때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가만 보면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한자가 있죠? 바로 '나'를 뜻하는 '아(我)'입니다.


국어사전에 나오는 '아(我)'라는 한자는 '나'라는 뜻이 첫 번째, '우리'라는 뜻이 두 번째예요. 같은 한자인데, 일본어 사전에선 '아(我)'의 뜻이 첫 번째도 두 번째도 '나, 1인칭, 스스로'라고 나옵니다. '우리(我々)'라는 단어에 '々'는 반복 부호예요. '我'가 두 번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일본에서 '우리'란 '나와 나'라는 의미에 가깝겠지요. 각각의 개체가 분리되어 있습니다. 순 한글인 '우리'는 일인칭 대명사예요. '우리'에 포함된 사람이 한 명이든 백 명이든 일인칭으로 간주하는 겁니다. 한 덩어리인 거죠. 일본의 '우리(我々)'와 한국의 '우리', 조금은 다른 느낌이 있습니다.


전 세계를 놓고 봤을 땐 한국도 일본도 집단주의적 성향이 강해요. 하지만, 한걸음 더 들어가 보면 한국은 훨씬 밀집되어있고, 응축되어 똘똘 뭉친 느낌입니다. '우리'랑 '남'의 관계도 사실상 불분명합니다. 경계선이 굉장히 흐릿해요.  


일본 지인들이 매번 궁금해하던 게 있었어요. 왜 남자 친구도 '오빠', 아는 오빠도 '오빠', 친오빠도 '오빠'녜요. '아는 오빠'라는 말을 설명하는 데 꽤나 애를 먹었고요. 왜 대학 선배를 '언니'라고 부르는지도 모르겠대요. 우리는 통성명하고 조금 친해지면 나이를 공개하고 누가 언니인지, 누가 빠른 년생인지, 언제부터 말을 놓으면 되는지, 를 이야기하죠. 결국은 모두가 언니오빠동생 사이로 묶입니다. 한국말을 공부하는 친구들은 더 당황스러워해요. 저건 분명히 가족을 소개할 때 쓰는 말이라고 배웠는데, 이상하다...?



한국이 '우리'와 '남'을 경계 짓는다면 일본에서 '안(우치)'이랑 '바깥(소또)'으로 나눕니다. 단계가 있어요. 선이 확실합니다.


한가운데 있는 동그라미가 '나'입니다. 나를 둘러싼 첫 번째 동그라미가 A인데요. 가족이나 친구, 친한 관계인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두 번째로 둘러싼 동그라미 B는 직장, 동호회, 모교 동창들과 같은 존재죠. 딱 여기까지가 일본이 말하는 '안'에 해당하는 사람들이에요. 동그라미 선이 뚜렷하게 그어져 있다는 건 그 안에 속한 사람들에게도 확실한 기준점이 있다는 거예요. A그룹 사람들한테 쓰는 말이랑 C그룹 사람들한테 쓰는 말은 다르다는 거죠. A한테 들으면 기분 나쁘지 않은 말도 C가 하면 '뭣이라?' 반응합니다. 일본 사람들이 겉과 속이 다르다, 는 말이 나오는 데엔 이 경계선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뜻일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는 저 동그라미가 일본처럼 두껍고 뚜렷하지 않아요. 계기가 있으면 C그룹에서 '우리'그룹으로 순식간에 이동합니다. 경계가 부드러운 만큼 '우리'와 '남'의 관계가 유동적입니다. 피해를 주기도 하고, 민폐를 끼치기도 하고, 정을 쏟아붓기도 하면서 선이 지워지고 칠해지기를 반복하는 거죠.  


그렇다면 C는 무엇이냐. 아예 동그라미 안에 포함되어있지도 않습니다. 외부인, 낯선 사람이죠. 나와는 접점이 없는 타인입니다. 거친 말을 하기도 하고, 예의를 차리지 않는 대상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내가 일하는 가게에 들어온다. 그러면 그때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정해진 룰을 따라야 하거든요. 일본식 가게의 친절함이 한결같이 유지될 수 있는 건 손님이라는 존재가 C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직원이 손님을 대하는 방법>이라는 룰에 따라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철저하게 모든 행위가 이루어지는 거죠. 동그라미는 친분의 단계를 나타내는 게 아니라 그 안에 속한 사람들을 대할 때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선을 의미합니다.


식당에 가서 '이모, 된장찌개 하나 주세요.' 하면 일본 친구는 왜 저 사람이 네 이모냐고 묻습니다. 처음 가본 식당이라 할지라도 중년 여성이라면 이모라는 말이 그리 낯설지 않죠. 듣는 이모도 '내가 왜 네 이모냐?' 하지 않아요. 그러려니 하죠. 오히려 정말 당신의 조카라도 되는 듯 대뜸 말을 놓고 "밥 더 줘? 물 줘?" 하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요.


제가 일하던 고깃집에서는 주문을 받을 때 테이블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습니다. 직원이 손님을 내려다보면 손님이 거북해한다는 이유였죠. 손님이 큰 소리로 주문하지 않아도 될 만큼 적당히 가까운 거리를 유지한 채 고개를 들고 올려다봅니다. 가게에서 직원이 해야 하는 역할이자 행위일 뿐 큰 의미는 없어요. 하지만 종종 찾아오던 한국분들은 의아해했습니다. "아니, 뭘 잘못했다고 무릎을 꿇어?"


우리가 "이모, 된장찌개 하나 주세요." 했는데 이모가 무릎 꿇고 "네, 주문 확인하겠습니다. 된장찌개 하나 맞으시죠?" 하는 모습, 상상조차 할 수 없죠. 백화점 명품관에서 이루어지는 서비스와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백화점 가서 직원한테 이모, 사장님, 하는 경우는 없으니까요. '우리'라는 범주에 들어가는 호칭을 부를 때 그에 따른 친근한 행위가 따라오는 거지요.


남이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우리' 되는 한국 사회에서는 그만큼 눈치를  때도,  때도, 챙겨야  때도 초점이 개인에게 맞춰질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관계의 경계선이 뚜렷하다면 ' 사람들한테는  여기까지만 허용해야지.'라는 사회적 룰이 존재한다는  텐데요.  식당에 가서는 이모라고 부르고  식당에 가서는 저기요,라고 한다면 대상이 누군지에 따라 나의 행동도 바뀐다는 뜻입니다. '식당  호칭' 아니라 '나와의 관계'에서 나오는 호칭인 거지요.


보다 인간관계의 경계선이 뚜렷한 일본 사회에선 그 어느 식당에 들어가도 직원을 '이모'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이 없습니다. 경계선을 넘나들 확률이 그만큼 낮은 것이죠. 자연스럽게 일본에서의 눈치는 '대상이 누구냐'가 아닌 '어떤 상황, 어떤 테두리'안에 있는지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말이 정말 맞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여기선 거리감을 조성하기 위해 쓰는 말이 아닙니다. 그만큼 다양하고, 다르고, 다채로운 각자의 문화를 존중하자는 취지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면서 저는 '우리'라는 말이 참 예쁘다는 걸 느낍니다. '우리'라는 단어에 우리가 담고 있는 세상은 얼마나 큰 걸까요. 문득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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