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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눈치 DNA 2 02화

일본에서 말하는 '여자력(女子力)'

by 알로

<두 일본 여성의 대화>

일본 넷플릭스 '테라스 하우스'는 남녀 6명이 한 지붕 아래 살면서 때론 연애를, 때론 진로를, 때론 인간관계를 고민하며 같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프로그램입니다. 대본 없이, 집 한 채와 차량 두어 대만 제공하고 알아서 '살아보라'는 거죠. 초면인 상황, 친해지는 과정, 남녀 사이의 커뮤니케이션, 일본식 대인관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다 보니 언어를 소재로 삼은 저에겐 상당히 좋은 본보기가 되어줍니다.


#1

짝사랑하는 남성과 진전이 없자 답답해하며 같이 사는 여동생에게 넋두리하는 여성. 남성과 여성은 바다 보러 오토바이 타고 다녀온 상황. 두 번째 데이트를 하고 싶은데 남성 쪽에서 제안이 없으니 애가 타는 모양입니다.

짝사랑 여성 : "아마 나한테 여자력이 부족한 거라고 생각해."

같은 방 동생 : "그런가..."

짝사랑 여성 : "내 잠옷이 너무 남자 같지? 스웨터 같은 거 입어서 그런가. 잠옷 같이 사러가 줄래? 여성스러움을 보여줘야겠어."

같은 방 동생 : "그래. 정색하고 '여자'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은근슬쩍, 살짝살짝 보여주는 정도가 좋을 것 같아. 그걸 노려봐."

짝사랑 여성 : "(웃음) 알겠어. 이렇게 또 한 수 배우는구나."


상호 감정이 맞닿지 않는 데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여성은 '여자력 부족'을 원인으로 꼽습니다. 여자력 부족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바로 다음 문장으로 설명해줍니다. '남자처럼 스웨터를 잠옷으로 입기 때문에 여성스러움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데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상대방은 한 숟가락 더 얹습니다. 과하게 단도직입적으로 정면 돌파하면 상대방이 부담스러울 수 있으니 '은근슬쩍, 살짝 보여주는 정도'가 좋다고 말이지요.


'여자력'이라는 단어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아래 대화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2

방 안에서 갑자기 화장을 시작하는 여성.


같은 방 동생 : "뭐해?"

짝사랑 여성 : "언제 데이트 갈지 날짜 정하려고."

같은 방 동생 : "오- 여자력 높아졌는데?"

짝사랑 여성 : "열심히 해볼게."


한 지붕 아래 살다 보면 잠옷바람이나 맨얼굴을 보는 건 당연한 일일 텐데요. 여자들이 묵는 방에서 남자들이 묵는 방으로 가기 위해 여성은 화장을 고칩니다. 파운데이션이 뭉개졌는지, 눈썹이 지워졌는지, 입술색은 어떤지 체크하는 거죠. 비록 우리가 한집에 살지만, 네 앞에서는 여자다, 라는 걸 보여주고 싶은 심리입니다. 그렇다면 '여자력'에 담겨있는 여자란, 화장을 예쁘게 한 꾸민 모습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여자력이 높아졌다'는 말은 마치 능력을 수치화한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는데요. 잘 가꿔진 모습과 잘 보이고 싶어 하는 마음이 풍만하다면 여자력 Lv.90, 맨얼굴에 편한 옷차림은 여자력 Lv.60 정도인 건가 하는 착각마저 들게 하지요.

<'여자력' 테스트 빙고게임>

'여자력'이라는 단어가 생긴 건 만화가 안노 모요코의 '미인 화보(VOCE)'라는 연재 에세이입니다. 2000년도였죠. 야마토 나데시코(전통적 일본의 여성상) 현대판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자력'이라는 단어는 일본 여성들의 '이상적인 여성의 모습'을 표현하는 단어로 자리 잡으면서 2009년 신조어, 유행어 대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지요. 요즘도 끊임없이 검색되는 단어임을 구글 트렌드로 알 수 있습니다.

일본 트위터에 돌아다니는 빙고를 가져와 보았어요. 나에게 얼마큼 '여자력'이 있는지 알아보는 테스트인데요. 10개 이상 해당한다면 비로소 '여자의 길'을 걷는 첫 발걸음인 거고, 10개 이하는 쿠소(クソ)라고 하는데요. 쿠소(クソ)는 똥, 찌꺼기, 제기랄, 뭐 이런 뜻을 지닌 일본에서는 상당히 심한 욕설에 속합니다.


첫 번째 줄

1. 세탁기를 자주 사용한다

2. 소식 주의자 (밥을 적게 먹는다)

3. 구멍 난 양말을 신지 않는다

4. 요리를 잘한다

5. 멋 부리는 걸 좋아한다


두 번째 줄

1. 베이킹이 취미다

2. 분홍색을 좋아한다

3. 핸드폰에 보정 어플이 깔려있다 (ex. Snow)

4. 인바디 BMI 21 이하

5. 매일 손수 도시락을 싸들고 다닌다


세 번째 줄

1. 화장품은 고가의 좋은 것을 사용한다

2. 가슴 사이즈 C컵 이상

3. 전신 영구 제모를 한 상태

4. 인스타그램은 ‘멋진 나’를 만드는 도구

5. 손톱 정리가 잘 되어있다


네 번째 줄

1. 살 빼고 싶다는 트위터를 남긴다

2. 팬케이크를 좋아한다

3. 미용실은 한 달에 1번 간다

4. 치마를 10벌 이상 가지고 있다

5. 웃는 얼굴이 예쁘다는 말을 들어본 적 있다


다섯 번째 줄

1. 디저트 배는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2. 1000엔 이상의 좋은 샴푸를 사용한다

3. #스타벅스나우 (지금 스타벅스에 있다는 뜻의 유행 해시태그) 쓴 적 있다

4. (타인 특히 연인에게) 애교를 잘 부리고 싶고, (연인도 내게) 응석을 부렸으면 좋겠다 (둘 다 가능해야 ‘여자’로 인정)

5. 맛있다고 소문난 팬케이크를 먹기 위해서는 2시간도 기다릴 수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재미로 하는 빙고게임입니다. 반발하는 사람들도 많았던 만큼 모든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받아낸 건 아니었지요. 그럼에도 일본 사회에서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여성상이 어느 정도 담겨있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습니다.


'잘 가꿔진 외모'에 높은 가치를 두는 항목들이 있죠. 멋 부리는 걸 좋아한다던가, 얼굴 보정 어플을 사용한다던가, BMI 기준, 예쁜 미소, 깨끗한 손톱, 날씬해지고자 하는 욕구, 주기적인 미용실 방문, 살 빼고 싶다는 트위터를 남긴다던가, 인스타그램은 ‘멋진 나’를 만드는 도구라는 부분입니다. 타인에게 어떤 식으로 보이는지가 중요하다는 걸 반영하고 있는 셈이지요.


눈길을 끌었던 건 두 항목이었습니다. 가슴 사이즈 C컵 이상, 남자 친구에게 애교를 부리고 싶고 나 역시 그의 응석받이가 되고 싶다는 부분이었지요. 여자로서 예쁜 외모나 고상한 취미, 가사노동에 능한 모습은 어디까지나 여성상에 포함되는 건데, 저 두 항목은 상대가 남성이라는 전제가 깔려있기 때문이었지요.


한국어로 직역할 경우 ‘여자력’이라는 말은 없기 때문에 단번에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어휘의 의미를 고려하자면 ‘여성스러움’인가 싶지만요. 보다시피 그보단 좀 더 남성들의 욕망 충족이 전제로 깔려있는 보다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여성스럽다, 하면 그 자체로 여성스러운 이미지가 떠오르는데요. 여자력이 포함하는 의미는 ‘상대가 남성’ 임을 정확하게 전제로 두고 있는 셈이지요.


다음은 ‘여자력’이 얼마나 없는지 알아보는 빙고입니다. 제가 살면서 이런 단어를 번역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만, 3개 이상 빙고일 경우 ‘불알이 없는 남성’ 혹은 ‘그냥 남성’에 가깝다, 는 부연설명이 적혀있습니다. 성문화가 상당히 개방적인 나라인만큼 표현이 적나라합니다.



첫 번째 줄

1. 방이 더럽다

2. 입술이 건조하다

3. 가끔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고 외출한다

4. 팬케이크에 별 흥미가 없다

5. 성격이 나쁘다


두 번째 줄

1. 상하의 다른 속옷을 입어도 신경 쓰지 않는다

2. 쓰레기통 비닐이 돈키호테(할인 잡화점) 노란색 비닐봉지

3. 혼자 라면 먹으러 간다

4. 지갑 안에 영수증이 쌓여있다

5. 맨얼굴로 외출해도 상관없다


세 번째 줄

1.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여자력이 없다

2. 무뚝뚝하다

3. 망가진 얼굴로 사진 찍을 때 전력을 다한다

4. 집에서 입는 옷은 대부분 스웨터나 트레이닝복이나 속옷 차림

5. 겨울엔 털을 밀지 않는다


네 번째 줄

1. 화장품은 다이소에서 산다

2. 여자회(여자들의 모임)를 갖지 않는다

3. 청소가 귀찮다

4. 선크림 바르지 않는다

5. 방에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


다섯 번째 줄

1. 요리는 거의 못한다

2. 소녀만화는 도저히 못 읽겠다

3. 옷을 구매할 땐 브랜드보다 가격 중심

4. #스타벅스나우 라는 해시태그 써본 적 없다

5. 웃음소리가 경박하다


네, 이로써 저는 일본 사회에선 ‘남성’이나 마찬가지라는 점이 확실하게 드러났네요. 이런…


사실 빙고 내용에 쓰여있는 내용의 옳고 그름을 가려낼 생각은 없습니다. ‘여자력’이라는 단어가 어느 정도로 다양한 의미를 담아내는지 추측해보려는 건데요. 두 가지 빙고가 보여주는 ‘여자력’이란 아래와 같이 정의는


요리를 잘하고, 용모가 단정하며 유행을 따를 줄 알고, 행동과 말투는 상냥하되 표정과 웃음소리는 조신해야 하며 모발부터 손톱, 털끝 하나까지 늘 완벽을 기해야 하고, 애교를 잘 부리면서도 남자가 편하게 기댈 수 있는 만드는 힘, 정도가 되겠습니다. 아, 가슴 사이즈는 C컵이어야 하고요.


이러한 여자력은 일본 사회에서 공기와도 깊은 연결고리를 만들어냅니다. 아사히신문 출판사에서 나온 <리쿠르트의 여성력, 회사 '공기'는 여자가 결정한다!>라는 책이 있는데요. 저자는 일본 대형 취업정보회사인 리쿠르트에 입사해 총무, 인사, 비서직을 거쳤던 후쿠니시 나나에입니다. 언뜻 제목만 들었을 땐 여성 직원들의 어떤 능력을 의미하는 건지 살짝 의문이 생기기도 했습니다만,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건 홉스테드가 말하는 '남성성, 여성성'과 일치합니다. '여자력'이 아닌 '여성력'이라는 어휘를 선택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일본은 95, 한국은 39. 홉스테드는 성 고정적 역할을 얼마나 수긍하느냐를 숫자로 나타냈었죠. 일본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남성성 지수가 높은 나라입니다.

그만큼 여성에게 요구되는 기준점이 무수히 많다는 겁니다. 앞장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일본 사회에서 여성은 써선 안 되는 언어가 있고, 암묵적으로 해선 안 되는 행동, 지양해야 하는 말투나 모습이 존재해왔습니다. 그만큼 여성들이 사회 분위기, 주변의 시선을 대상으로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고요. 암묵적인 약속에 어긋나지 않아야 '공기를 잘 읽는' 여자가 되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였습니다.

저자인 후쿠니시 나나에는 출간 인터뷰에서 '여성적인 회사가 살아남는 시대라고 썼던데.'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합니다.


"남성들은 발상은 늘 척척 진행된다. 굳이 한쪽을 가려내자면 여성들은 좀 주뼛주뼛 거리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반대로 뒤집어 생각해보면 여성들이 끈질기다는 뜻이다. 여성적인 사회란 위기가 닥쳤을 때 끈질기게 달라붙는 인내력이 강하다는 뜻이다. 그만큼 여성적인 회사는 가늘고 길게 살아남기 쉬운 반면 남성적인 회사는 막대기가 부러지듯 그 올곧음이 단번에 뚝 끊길 수 있다는 뜻이다."


남성성이 극명하게 부각되는 일본 사회인만큼 결과적으로 그녀가 말하고 싶었던 건 사회적인 남성성과 여성성이 적당히 어우러져야 적절한 균형을 맞춰나갈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었을까요. 그래서인지 요즘 일본에선 '여자력'이란 단어의 의미도 점차 바뀌어가는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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