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눈치 DNA 2 04화

공기(空氣)에 담긴 다채로운 말문화

by 알로

친구와 카톡을 주고받는데 '공기가 무섭다'는 표현을 해옵니다. 무서운 공기라... 듣자마자 어떤 장면이 생각날까요? 한겨울의 차디찬 칼바람이나 미세먼지가 많아 뿌연 하늘을 떠올릴 수도 있겠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화내고 정색하는데, 그날따라 웃으면서 넘어가는 거야. 무서웠어 그 공기. 차라리 내 실수를 말해주는 게 나은데."


자초지종 들어보니 배드민턴 칠 때마다 실수하면 크게 화를 내던 지인이 그날따라 너그럽게 웃었다는 겁니다. "괜찮아, 그럴 수 있지."라면서 말이죠. 그럴 사람이 아닌데, 평소와 너무 다른 모습에 친구는 당황한 모양입니다. '무서운 공기'는 진짜 속마음을 알 수 없게 만드는 지인의 '낯선 태도'를 의미하는 것이었지요.


'할머니가 나가자 집안 공기가 한결 가벼워진 것 같으면서 남은 사람 모두가 편안해 보였다.'


박완서 작가 <도시의 흉년>의 한 구절입니다. 공기가 무겁다던가 어색한 공기가 흐른다던가, 사람들이 모인 공간의 그 어떤 분위기를 표현할 때 우리는 '공기'라는 단어를 꺼내 듭니다.


공기(空氣)의 첫 번째 정의는 '지구를 둘러싼 대기의 하층부를 구성하는 투명한 기체'입니다. 비어있는(空) 기운(氣)이니 텅 빈 공간에 가득한 어떤 기운을 뜻하는 걸까요. 맑고 투명해서 눈에 보이지 않지만 공간을 채우는 매우 중요한 존재를 의미하는 것엔 틀림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두 번째 정의인 '그 자리에 감도는 기분이나 분위기'와도 일맥상통하지요(표준대국어사전).

"여기 공기가 너무 탁해." 한다면 산소의 질이 떨어졌다는 걸 의미합니다. "공기가 무겁다."는 말은 어떨까요. 공기의 질량이 무거워서 숨 쉬기 힘들다는 뜻은 아닙니다. 형언할 수 없는 묵직한 기운이 감돈다는 뜻이지요. '처음 만난 사이에 어색한 공기가 흐른다'는 문장의 끝에서 우리는 침묵, 낯선 광경, 눈치 보는 얼굴을 자연스레 떠올립니다. 저는 '공기'라는 단어를 '공간을 맴도는, 공간을 채우는 분위기' 정도로만 사용해왔는데요. 개인의 감정이나 태도를 두고 '공기'라 표현하는 요즘의 화법이 제겐 다소 신선하게 다가오는 까닭입니다.


한 지인도 며칠 전에 비슷한 이야기를 해왔어요. 매번 말도 안 되는 걸로 트집을 잡는 상사가 있답니다. 처음엔 화가 나서 동료들끼리 험담을 했는데, 이젠 매번 화내기 지친다더군요.


"이젠 포기했어. 무뎌진 느낌이야. 약간 공기가 벌써 달라. 그냥 놓게 되더라."


그 와중에 '그런데 혹시 여기서 공기라는 건 뭘 의미하는 거야?'라고 묻진 못했습니다. 그럴 공기가 아니었거든요. 내 마음이나 감정, 태도를 말할 때도 '공기'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 놀라웠습니다. '공기'의 쓰임새는 이렇듯 점점 다채로워지는 모양입니다. 여러 번 접하다 보면 어느새 저도 "아까 과장님이랑 마주쳤는데 평소랑 공기가 달랐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고 있겠지요.


눈치를 일본어로 번역할 때 아마도 가장 많이 언급되는 단어 역시 '공기(空気)'가 아닐까 싶습니다. 일본엔 감정을 공기, 바람, 향에 비유하는 말문화가 있는데요. 우리도 마찬가지죠. 의심이 가거나 미심쩍은 상황에서 '수상한 냄새가 난다'라고 하잖아요. 정말 무슨 냄새가 나서 그런 말을 하는 건 아니니 말입니다.


몇 가지 표현을 소개해볼게요.


#1 갑자기 행동이 바뀐 사람에게

한국어 : 무슨 심경 변화야, 어쩐 일이야, 갑자기 왜?

일본어 : どういう風の吹き回し?

(직역 : 어떤 바람이 분 거야?)


안 하던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내일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라던가 '안 하던 짓 하면 죽는다'며 멀쩡한 사람을 저세상으로 보내버리기도 하지요. 행동의 변화를 두고 바람이 들었다, 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바람이란 '기압의 변화, 사람이나 기계에 의해 일어나는 공기의 움직임'을 뜻하는데요. 의존명사로 '무슨 일에 더불어 일어나는 기세'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춤바람, 신바람이 대표적인 예가 되겠지요. 쓰임은 조금 다르지만, 일본어로도 바람은 같은 뉘앙스를 지닙니다. #1 에서는 "어떤 바람이 (네 안에서) 불었길래 행동이 달라진 거야?"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2 달달하게 꽁냥 거리는 커플을 가리키며

한국어 : 이야, 저쪽은 분위기가 좋네

일본어 : あそこの香りいいよ

(직역 : 저곳의 향기가 좋아)


#3 지나간 추억을 그리워하며

한국어 : 90년 후반 느낌(감성)이지

일본어 : 90年代後半の香りだね

(직역 : 90년대 후반의 향기야)


달달함, 그리움을 담은 마음을 곧잘 '향기'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추억의 향기라던가 아날로그 향기라는 말도 종종 눈에 띄지요. 주로 긍정적인 감정이 담겨있습니다. 수상한 낌새가 느껴질 때 '어디서 수상한 향기가 나.'라고 하진 않는 것처럼요. #2처럼 알콩달콩하는 커플을 보며 '향기가 좋다'라고 표현하는 경우는 없지만요. 냄새나 바람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물질을 분위기나 낌새에 비유하는 문화는 한국과 일본에 둘 다 존재합니다.


#4 나의 언행에 사람들이 놀란 상황

한국어 : 다들 너무 놀라는 눈치길래

일본어 : みんな驚くような空気が支配してて

(직역 : 다들 놀라워하는 공기가 지배해서)


'다들 너무 놀라는 눈치'인 상황을 떠올려 볼까요. 공간에 모인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얼굴로 놀라움을 나타내는 장면이겠죠. 눈치는 한 명 한 명의 눈초리가 떠오르는 단어입니다. '다들 놀라는 눈치였다'는 문장은 개개인의 반응, 각각의 감정이 모인 듯한 느낌을 주는데요. '다들 놀라워하는 공기가 지배했다'고 한다면 조금 느낌이 다르죠. '놀라워하는 공기'가 한 덩어리가 됩니다. 모두가 공유하는 하나의 공기가 나를 지배하는 거죠. '눈치'가 개인을 표현해준다면 '공기가 지배한다'는 건 훨씬 위압감이 느껴지는 분위기의 무게를 뜻합니다.


#5 마음에 드는 남성을 칭찬하면서

한국어 : 키무라는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

일본어 : 木村くんって空気感が良い気がする

(직역 : 키무라는 공기감이 좋은 것 같아)


일본의 한 예능 프로그램에 등장했던 말인데요. 해당 영상에서 키무라는 '정서적으로 차분하고, 훈훈한 인상으로 누구에게나 매너가 있는 행동을 보여 여성들이 입을 모아 칭찬하던 대상입니다. 어디 하나 모난 데 없이 전체적으로 잘 융화되는 사람. 사람과 관계를 잘 맺는 성격. '공기감이 좋다'는 말은 대체로 긍정적인 캐릭터를 아우르는 표현이 되곤 합니다.


#6 어떠한 내색을 하는 상황

한국어 : 조금씩 어필을 할 겁니다

일본어 : 空気感を出していきます

(직역 : 공기감을 내보일 겁니다)


티를 낸다, 내색을 하다, 눈치를 준다, 라는 표현과 비슷하지요. 공기감을 내보인다는 건 어떤 감정이나 분위기를 계속해서 어필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인데요. 말 대신 분위기로 티를 내겠다는 거죠.


일본인은 언어 커뮤니케이션이 능숙하지 못하고, 타인을 설득하거나 설명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그 대신 살핌(察し)으로써 상대방의 의사를 이해하고 커뮤니케이션을 만들어나간다. 살핌의 능력이 높은 사람을 좋게 평가하는 까닭이다(椎名, 平高 2006).


공기를 잘 '살피는' 일은 대인관계나 직장 생활에서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습니다. 자주 사용하는 단어임에도 어디까지나 암묵적인 요소이다 보니 일본 사람들도 정작 '도대체 공기가 뭐길래?'라는 질문 앞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공기에 관련된 연구가 무수히 많은데요. 개중에 다양한 정의를 가져와보았습니다.


공기란 실로 큰 절대권을 가진 요괴 (yamamoto 1983)


공기를 읽는다는 건 자신 이외의 존재에 마음을 쓰는 것 (sakurai 2007)


어떤 장(場)의 공기를 의식하는 건 암묵지(暗默知 : 학습과 경험을 통하여 개인에게 체화되어 있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지식). 심리학에서는 이런 능력을 사회적 지능(소셜 인텔리젼스)라고 부르고 있다. 공기를 읽는다는 건 크게 네 가지 요소로 나뉜다. 1) 우선 상황을 파악하고 2) 행동의 대상을 확인하고 3) 적절한 언어를 고르고 4) 적절한 타이밍을 고른다 (naito 2004)


공기란 집단이나 개개인의 심정, 기분 혹은 집단에 놓인 상황을 의미 (hukuda 2006)


공기란 암묵적인 룰을 의미하며 자기중심적이지 않고 되도록 주장을 강하게 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hitaka, kosugi 2012)


분명한 건 공기라는 단어가 광범위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만큼 그 의미는 우리가 같이 만들어간다는 점입니다. '그날따라 공기가 무서웠던 사람', '그 사람의 공기가 달라졌어.'라는 표현을 점차 쓰게 되면서 공기의 정의는 조금씩 더해지고 사라지는 과정을 반복하겠지요. 여러분이 내린 '공기'의 정의는 무엇일지 궁금해집니다.




keyword
이전 03화일본과 여자력, 눈치의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