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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눈치 DNA 2 05화

천만명이 체험한 일본 '눈치게임'

by 알로

'천만 관객 다녀간 블루스퀘어, 넷플릭스 국내 이용자 천만명 육박, 천만 배우의 진지한 모습'. 천만은 '대중'의 또 다른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천만이 이용했다, 하면 어느 정도 대중성을 보증해주는 것과 다름없죠.



일본에서 천만명이 즐겨했다는 게임이 있습니다. 아, 물론 일본의 인구는 우리의 두 배이니 조금 다른 느낌이지만 말입니다. 게임 이름은 '쿠키요미(空気読み)'. 우리 말로는 '눈치게임' 정도로 바꿔볼 수 있겠네요.


술자리에서 종종 눈치게임을 합니다. 게임을 주도하는 사람이 '일!' 하고 외치면 나머지 사람들이 '이, 삼, 사!' 차례로 숫자를 외쳐나가는 식인데요. 이때 중요한 건 다른 사람과 숫자가 맞물리면 안 된다는 점입니다. 동시에 같은 숫자를 외치면 둘 다 술을 마시게 되는 거죠. 모인 사람들이 서로의 눈치를 살살 봐가며 해야 한다는 뜻에서 눈치게임이란 이름이 붙은 모양입니다. 외칠 타이밍을 놓쳐 끝끝내 숫자를 말하지 못한 사람도 어김없이 술잔을 비워내야 합니다. 눈치게임처럼 우리나라의 눈치문화를 1차원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없을 겁니다. 다른 곳을 보고 있으면 절대 할 수 없는 게임이거든요. 오로지 상대방의 눈, 표정, 입모양에 집중하여 형언할 수 없는 낌새까지 재빠르게 캐치해야 살아남으니 말입니다.


일본의 눈치게임 '쿠키요미'는 공기를 읽는다는 뜻입니다. 쿠키(空気)는 공기, 요미(読み)는 읽음이란 명사 표현입니다. 공기를 읽는다는 건 어떤 상황에서 요구되는 적절한 행동을 찾아내는 걸 의미하는데요. 일본 문화에서 '공기'가 어떤 자리매김을 하는지 들여다볼 수 있는 게임입니다.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상황별 설정이 주어지고, 화면을 터치해서 정답을 골라내는 식인데요. 100문제를 다 풀고 나면 마지막 화면에서 나의 점수가 나옵니다. 승부욕, 응용력, 배려, 위트, 일머리. 다섯 개 분야별로 '내 눈치 척도는 얼마'인지 가늠할 수 있는 것이지요. 2008년 휴대폰 애플리케이션으로 등장한 이후 각종 언론에서 소개되면서 인기를 끌었는데, 2022년부터는 최대 열 명까지 온라인 게임으로 즐길 수 있다고 하니 꾸준한 마니아층이 있나 봅니다.



흑백 화면에 빨간색으로 테두리가 칠해진 캐릭터. 주인공인 '나'입니다. 빨간 캐릭터가 해야 할 행동을 화면 터치로 움직이는 식이에요. 한국식 눈치에 타이밍은 생명이죠. 일본식 공기를 읽을 때도 타이밍은 중요합니다. 조금만 늦게 화면을 터치하면 다음 문제로 넘어가버리는 식이죠. 빠른 템포나 상황에 걸맞은 박자감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장면 하나를 소개해볼까요.



전철 안에 일렬로 앉아있는 사람들 사이 '나'의 모습이 보입니다. 양옆으로 빈자리가 있지요. 일행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다가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전철 타면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죠. 제 양옆으로 자리가 비었는데, 커플이 앞에 와서 서성거리면 둘이 같이 앉을 수 있게 한 칸 옆으로 이동하곤 합니다. 자리를 안 비킨다고 해서 눈치가 없다고 할 순 없지요. 귀찮거나 배려할 마음이 없거나 각종 이유로 눈치를 일부러 안 보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그러고 보면 일본은 우리보다 조금은 더 전체적인 조화를 중시하는 것 같습니다. 상대방의 눈치를 안 보면 그만, 이 아니라 전체적인 그림이 잘 어우러지는 답을 찾는 게 '공기를 잘 읽는 일'이 되니까요.


이 게임에서는 화면 속 빨간 인간을 손으로 터치해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움직여주는 게 중요합니다. 자리를 비켜주는 거죠. 움직여주면 일행은 앉을 수 있게 됩니다. 만약 아무런 동작도 취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화면 속 일행은 다른 칸으로 이동해버립니다. 이럴 경우 곧바로 다음 문제로 넘어가는데요. 점수는 조용히 깎이는 셈입니다.




또다시 전철 속 퀴즈입니다. 이번에는 빨간색 테두리가 창문에 칠해져 있죠. 나(お前라고 적혀있는 캐릭터)는 이 창문을 어떻게 할 것인가로 눈치를 가늠하는 식입니다. 사람이 아닌 사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건 일본에서 말하는 '공기를 읽는 일'이 구성원의 감정, 공간 속 분위기를 파악하는 데서 더 나아가 큰 그림의 '조화'를 이루기 위한 역할을 요구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큰 그림'이란 일본문화가 지향하는 이상적인 모습이겠지요.


전철 안에 절전 중이라는 글자가 쓰여있습니다. 더 이상 찬바람이 나오지 않을 거란 설정을 두는 거죠. '나'의 옆에 앉은 남성은 쉴 새 없이 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창문을 열어야겠죠. 화면을 터치해서 빨간색 창문을 올려줍니다. 방금 전까지 땀을 흘리던 남성은 이제 괜찮아진 듯 보이는데요. 막상 옆에 앉아있던 여성이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모습입니다. 괴로운 표정이죠. 너무 많이 열었다는 뜻이겠습니다. 다시 위치를 조정해 적당한 정도만 열어둡니다. 이로써 '공공장소에서 눈치 있는 행동'을 한 셈이 되는 것이죠.


'쿠키요미(空気読み)'게임은 이처럼 공공장소에서 불특정 다수가 대상인 예절이나 매너, 연인 사이, 가족 관계, 콘서트 장 가수와 관객, 직장 상사와 사원, 식당 주인과 손님... 셀 수 없이 많은 장면을 상황으로 설정해둡니다. '나의 선택'이 항상 캐릭터에만 한정되어있는 것도 아닙니다. 창문처럼요. 빨간 테두리는 때론 도미노가 되고, 야구공이 되고, 태풍 표시가 되기도 합니다. 어디까지나 게임이기에 절대적인 정답이라 할 순 없겠지만 언뜻 일본의 집단주의가 추구하는 조화, 요구되는 리액션, 일본 특유의 개방적인 성문화, 여자력, 평화라는 개념들을 엿볼 수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고요? 그건 다음 장에서 천천히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듯 다른 문화의 디테일함을 여러분도 발견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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