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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눈치 DNA 2 08화

일본에선 왜 '리액션'이 중요할까

by 알로

갓 들어온 인턴사원들이 인터뷰하러 나가면 종종 하는 실수가 있습니다. 오디오가 물리는 일인데요. 상대방의 말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맞장구를 치다가 목소리가 겹치는 현상입니다. 가령, 횡단보도 신호가 고령자에겐 턱없이 짧다는 내용으로 취재하는 상황이라면요. 할아버지를 붙잡고 인터뷰를 시도합니다. 질문을 건네죠. "횡단보도 너비에 비해 보행자 신호가 짧다고 느끼시나요?"


"불안하지. (아, 그쵸 아무래도.) 신호가 중간쯤 왔는데 (네네.) 꺼졌으니까. (아, 네네) 그냥 걸어가야지. (아, 그냥...) 걸어가면서 손 들고 미안하다고. (아, 운전자한테요? 네네)"


할아버지 말소리와 인턴의 목소리(괄호)가 맞물릴수록 영상 편집자의 작업량은 늘어납니다. 방송 시간이 한정되어 있으니 필요 없는 분량은 줄여야 하기 때문인데요. 목소리가 겹치면 전달력도 떨어지니 애써 해온 인터뷰를 몽땅 날리는 일도 종종 생깁니다. 리액션은 작게, 짧게, 열심히 되뇌어보지만 대화에 몰입하다 보면 또 마음처럼 쉽지만은 않지요. 사실은 우리가 대화를 나눌 때 자연스럽게 나오는 본능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주거니 받거니 하는 행위가 소통의 묘미이기도 하니까요.


일본 현지에서 인터뷰할 때마다 긴장감이 밀려오는 까닭입니다. 일본 사회에선 '내가 당신의 말을 듣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액션은 매너이자 필수요소인데요. 반응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방송 마이크에 소리가 들어가면 안 된다는 부담감. 그 사이 어디쯤엔가에서 저는 늘 입술을 꽉 깨물곤 합니다. 그저 상대방 눈만 뚫어져라 쳐다볼 뿐이지요.


일본어를 잘 모르는 동료들도 "스고이(대단하다), 소데스까(그렇군요)."는 곧잘 말하곤 합니다. 어디서 배웠냐 물으면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대요. 저 두 단어는 일본에서 자주 사용하는 대표적인 리액션 언어입니다. 일본에선 이러한 리액션을 아이즈치(相槌)라고 부르는데요. 일한사전에 '대장간의 맞메질'이라고 번역되어있습니다. 한자를 살펴보면 서로(相) 망치로 때린다(槌)는 뜻입니다. 마주 보고 앉은 두 사람이 쉴 새 없이 번갈아 가며 망치질을 하는 모습을 떠올려볼 수 있겠죠. 아이즈치(相槌)도 마찬가지입니다. 끊임없이 고개를 끄덕여가며 "하이(네)."와 같은 짧은 대답을 종종 넣어주곤 이따금씩 "나루호도, 소데쓰까(그렇군요)"라는 추임새를 끼워 넣어야 하지요. 말 그대로 '쉴 새 없이' 말입니다.


비즈니스 커뮤니케이션 분야엔 <아이즈치 '사시스세소'>라는 공식이 있습니다. 사스가(역시), 시리마셍데시따(몰랐어요), 스고이 데쓰네(대단하십니다), 센스 아리마스네(센스가 있네요), 소데쓰까(그렇군요) 의 앞글자만 따서 만든 호칭인데요. 뜻만 보면 굳이 '안 해도 되는' 말이지요. 정보성을 담은 언어는 아닙니다. 상대방의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렇군요. 몰랐어요. 역시 대단하십니다." 한 문장에 몰아서 말할 수도 있는 건데요. 어디까지나 '호응'의 역할을 해주는 언어이기 때문에 잘게 잘게 쪼개진 타이밍마다 저 말을 넣어주는 겁니다. 듣는 사람의 리액션이 더해졌을 때 비로소 대화의 장(場)이 완성되는 거지요. 지금부터 소개할 퀴즈들은 언어와 행동을 포함한 '일본의 리액션' 이야기입니다. 과연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걸까요.




1. 당신이 방청객이라면?


'쿠키요미(空気読み)' 게임입니다. 리액션의 척도를 알아보는 퀴즈네요. 우리도 흔히 박수를 친다거나 무슨 말만 해도 까르르까르르 하는 친구들에게 '방청객이야?'라는 농담을 건네기도 하는데요. 방청객은 리액션의 대명사란 인식이 있습니다. 퀴즈에서는 방청객이 어떤 식으로 호응하는지를 살펴보는 건데요.


패널로 보이는 남성이 "안녕하세요!" 하면 '안녕하세요!'라는 말 버튼을 누르고, 게스트로 아이돌(B子)이 등장하면 타이밍에 맞춰 '귀엽다' 혹은 '꺄!'와 같은 말 버튼을 눌러 호응하는 식입니다. 언제 누르는지, 어떤 말을 고르는지가 점수 책정의 요인이 되겠지요.



2. 눈치 없는 척하는 게 사실은 '눈치왕'

크리스마스이브날 밤, 아이가 잘 준비를 하는데 산타할아버지가 등장합니다. 선물을 들고 온 모양인데요. 여기서 빨간색 아이가 어떻게 행동할지 고르는 퀴즈입니다. 선택지는 가만히 앉아있은 것과 자는 척하는 것, 두 가지인데요. 짐작하시겠지만, '공기를 잘 읽는' 행동은 후자입니다.


산타할아버지가 '나'를 놀라게 해 주려고 기어이 선물을 들고 와주었으니 자는 척해주어야 서프라이즈가 성립되는 것이죠. 눈치를 챘어도 상대방의 성의를 생각해 눈치껏 모르는 척해주는 상황처럼 말입니다.


친구들이 생일 파티를 나 몰래 준비하는 것 같은데, 어딘가 모르게 어설퍼서 다 티가 나는 상황. 자꾸만 바시락 거리는 포장지 소리가 들리고, 후다닥 도망가는 친구 손에 언뜻 케이크 상자가 보입니다. 보물 찾기에서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 "오! 너네 지금 내 생일파티 준비하는 거지?" 한다면 얼마나 김이 새겠습니까. 그럴 땐 알아도 모르는 척 안 보이는 척하는 게 준비하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이기도 합니다.


눈치를 못 챈 척 연기하는 게 되레 눈치 있는 행동이 된다는 건 재미있는 아이러니이지요. 눈치의 기준, 공기의 기준이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겁니다. '나를 위해 친구들이 파티를 준비해주었고, 내가 놀라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면 친구들도 기뻐할 것'이라는 맥락이 토대가 됩니다. 그 맥락을 깨는 순간 '공기를 못 읽었다'는 말을 듣게 되는 것이죠.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닙니다.



3. 그녀는 왜 달려야 했나

기차역에서 두 친구가 헤어지는 상황. '나'는 꼭 편지를 쓰겠다며 친구를 달래고, 친구는 알겠다고 대답하는데요. 많이 아쉬운 표정입니다. 기차에 탄 친구가 차창 밖 '나'를 바라봅니다. 일반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다음 장면은 기차가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드는 그림이겠지요. 저라면 친구의 마지막 모습을 사진으로 찍는 정도일 텐데요. 퀴즈에서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두 가지입니다. 그 자리에 서서 멍하니 친구를 바라보는 것과 출발하는 기차를 따라 힘껏 달리는 것.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장면이죠.


이 퀴즈에 따르면 공기를 잘 읽는 사람은 후자를 선택합니다. 조금 오버액션이 아닐까 싶지요. 그 오버액션이 좋은 리액션이라고 가정해볼 수 있습니다. 실제 도쿄역에서 이별을 맞이하는 가족이나 연인, 친구들이 저렇게 행동한다는 뜻은 아니지만요. 내 감정과는 별개로 상대방의 감정에 어느 정도 맞춰서 부응해주는 것이 '좋은 리액션'이라 여겨집니다. 상대방의 감정선과 비슷한 정도의 액션을 취해주는 것이지요.



4. "난 괜찮아. 취했지만... 괜찮아."

장면 #1

실연당한 여성이 바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상황.

"난 여자로서 매력이 없나 봐."


장면 #2

의기소침해져 말을 잃은 여성.

'나'는 많이 취했고 상당히 졸린 상태.


장면 #3

다시 말을 이어가는 여성.

"내 청춘사업, 응원해줄 거지?"

'나'는 만취상태.


퀴즈에서 '나'의 선택지는 '집에 가느냐, 마느냐'입니다. 지인이 고민을 털어놓는 자리. 이미 피곤할 대로 피곤하고, 취기가 올라 얼굴이 점점 벌게지지만, 지인의 넋두리는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그때 '나'는 어떻게 할 것인지 고르는 건데요. 가장 공기를 잘 읽는 행동은 잠자코 상대방의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는 겁니다.


네 가지 퀴즈에서 알 수 있듯 '나'의 행동의 초점은 전적으로 '공기'에 맞춰져 있습니다. 여기서 '공기'란 상대방의 감정상태와 그것에 부응하는 나의 역할까지 포함하는 범주가 되겠죠. 언뜻 눈치와 비슷한 맥락이기도 합니다. 다만 우리는 상황 속 내가 '해야 하는'역할을 생각하기보다 좀 더 상대방의 기분이나 감정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요. 상대가 누군지에 따라 행동양식도 천차만별인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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