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눈치게임 '쿠키요미(空気読み)'에 등장하는 장면들을 소개합니다. <천만명이 체험한 일본 '눈치게임'>을 읽고 오시면 훨씬 이해하기 쉬우실 거예요.
"화장실 가자."
초등학교 때 친구랑 쉬는 시간마다 주고받던 말입니다. 같은 반 남자아이들은 의아한 눈초리였죠. 왜 화장실을 같이 가지? 딱히 이유는 없지만 딱히 안 갈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 시절 저에겐 으레 당연한 일이었으니까요.
얼마 전 고등학교 동창모임에 나갔는데, 한 친구가 저를 보며 말합니다.
"화장실 갔다 오자."
오랜만에 듣는 말이었습니다. 둘이 동시에 일어나니 동창들은 벌써 집에 가냐며 물어옵니다. 화장실 다녀온다 하니 또 물어요. "옛날부터 궁금했는데 도대체 화장실을 왜 같이 가는 거야?" 머쓱했습니다만 이번에도 역시나 할 말은 없었지요. 그냥 그렇게 자라왔으니까요. 문화라는 게 그런 거 아닐까요. 그냥, 으레, 스며들듯, 따라가게 되는 것 말입니다. 같이 간 화장실에서 특별한 이벤트가 벌어지는 건 아닙니다. 각자 볼일 보고, 손을 씻으며 "요즘 어때?" 근황을 주고받는 게 전부죠. 화장실에서 나오면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게 되고요. 어릴 적 친구라 몸에 배어있던 습관이 나오는 걸까요. 일종의 유대감일까요. 친한 친구끼리는 화장실도 같이 가고 팔짱도 끼고 다닌다는 그 유대감 말입니다.
요즘도 거리에서 종종 봅니다. 여고생들이 재잘거리며 걸어가는 풍경. 팔짱을 끼거나 나란히 붙어 가는 모습 말입니다. 한 번은 한국에 놀러 온 일본 친구가 궁금해합니다. "친구랑 손을 잡아? 커플이야? 팔짱을 왜 끼는 거야?" 그러고 보니 일본에서 지낼 땐 거의 본 적 없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일본의 한 온라인 기사에서 재미있는 내용을 발견했습니다. <한국에서 살려면 꼭 알아두어야 하는 문화 차이 10가지>라는 제목이었는데요. 두 개의 항목이 기억에 남습니다. 한국인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 거리감이 매우 가깝다는 것과 매일 자주 연락을 주고받는다는 것이었죠.
[여자끼리 손을 잡고 다니는 것도 흔하고, 남자끼리 어깨동무를 하기도 한다. 그러니 커플은 오죽하겠나. 상당히 뜨겁다 (찰싹 달라붙어 다닌다는 뜻이겠습니다). 한국은 퍼스널 스페이스가 0(제로)에 가깝기 때문이다.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에겐 그 풍경이 낯설 법도 하지만, 한국인들은 그렇게 가까운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친밀감을 느끼는 듯 하다] 라는 부연설명이 붙더군요.
퍼스널 스페이스(personal space)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뜻하는데요. 타인이 침범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지노선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문화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Edward T. Hall)이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주변의 일정한 공간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며 무의식적인 경계선을 가지고 있다'고요. 이 선을 타인이 넘어올 경우 불쾌감이나 불편함을 느낀다고도 하는데요. 물론 문화마다 차이가 있다는 전제가 있습니다.
기사에 등장했던 두 번째 문화 차이는 '매일 연락을 주고받는다는 것'이었는데요. 공감하실까요? 이 또한 일본에서 지낼 때 친구들로부터 많이 듣던 질문입니다. "한국은 연인 사이면 하루 종일 연락한다며?" 사람마다 다르다고 생각했기에 '이렇다'고 딱 잘라 말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연락을 자주 주고받지 않는 편에 속하지만, 조금만 눈을 떼고 있으면 순식간에 메시지가 300+를 넘어가는 카톡방들이 있습니다. 어디야, 뭐해, 밥 먹었어? 누구 만나? 언제 집 가는데? 연인끼리 일거수일투족을 주고받는 경우도 많지요. 가족, 친구, 직장동료 불문하고 쉴 새 없이 일상은 공유됩니다. 모두가 그렇다고 볼 순 없겠지만요. 친구나 연인 사이에서 카톡 메시지를 빨리 확인 안 하면 '바쁜가 보다'가 아니라 '왜 이렇게 늦게 봐?'라는 말도 종종 듣기도 합니다. 주고받는 연락에 대한 개념 자체가 다른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지요. 에드워드 홀은 퍼스널 스페이스가 단순히 물리적 거리가 아닌 마음의 거리와 연결된다고 분석합니다. 연락을 빈번하게 주고받을수록 친근감을 느낄 확률이 높다는 거겠지요.
1. 너와 나의 거리
꽉 차 있던 전철 칸에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고 단 둘이 남았습니다. 여기서 빨간색 주인공이 어떻게 행동해야 '공기를 잘 읽는' 걸까요? 저 역시 전철을 탈 때면 비슷한 상황을 겪곤 합니다. 패딩이나 코트처럼 두꺼운 옷을 입어 자꾸만 옆사람과 소매가 스치는 계절이면 조금 간격을 두고요. 한여름에 후끈후끈한 열기가 몸에 남아있을 때도 조금 떨어져 앉곤 합니다. 책을 본다던가 곧 내릴 차례라던가 그냥 귀찮을 땐 그 자리 그대로 앉아있기도 하고요. 하지만 한 번도 '이래야 한다'던가 '이게 맞는 거다'라는 생각에 행동한 적은 없었는데요.
이 퀴즈의 정답은 옆사람과 조금 간격을 두고 떨어져 앉는 것이었지요. 언뜻 퍼스널 스페이스와도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내가 앉던 자리에 그대로 앉아있는 게 잘못된 행동은 아니지만 어딘가 모르게 부자연스러운 모양이지요. 일본 사회에서 '공기를 잘 읽는다'는 건 '상황이 허락한다면 낯선 타인과 적정한 거리를 두는 게 마땅하다'는 것 또한 포함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2. 당신의 사생활은 지켜드릴게
화장실에 들어갔습니다. 첫 번째 칸에 누군가 들어가 있네요. 바로 옆칸을 사용할 것인지 가만히 기다릴 것인지 세 번째 칸을 사용할 것인지는 자유입니다. 평소의 저를 떠올려본다면 저는 세 번째 칸을 이용합니다. 화장실은 생리현상을 가장 편안한 상태에서 처리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하니까요. 바로 옆칸에 사람이 들어왔다! 는 부담감을 옆칸에 전해주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저 역시 조금은 거리가 있는 편이 편하기도 하고요. 퀴즈에서 요구하는 답도 마찬가지였죠. 두 번째 칸보다는 세 번째 칸을 이용하는 편이 '공기를 잘 읽는 행동'에 가까우니 말입니다.
제가 출퇴근할 때 타고 다니는 광역버스는 동네 몇 정거장만 거치고 바로 고속도로에 진입합니다. 신기한 건 동네 정거장을 돌 때까지만 해도 분명 통로 쪽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고속도로에 진입하자마자 슬쩍 창가 자리로 옮겨간다는 점이었죠. 처음엔 자리가 불편해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요. 한 번은 네댓 명이 약속이라도 한 듯 옮기는 걸 보며 저건 무슨 광경일까, 의아했는데요. 버스 출퇴근 8년째 되는 요즘도 비슷한 광경을 자주 목격합니다. 옆자리에 누군가 앉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었다는 걸 조심스레 추측해볼 수 있었습니다(참고로 버스 좌석은 꽤 여유로운 편입니다).
이 퀴즈를 풀면서 가장 의아했던 건 이런 암묵적인 배려가 개인의 선택이 아닌 사회에서 요구하는 '공기'에 해당한다는 점이었습니다. 비슷한 형식의 퀴즈가 게임에 여러 번 등장할 정도라면 퍼스널 스페이스를 존중하는 일이 일본 문화에선 꽤나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걸 짐작해볼 수 있지요.
코로나 이후 '거리두기'라는 개념이 새롭게 등장하면서 조금은 달라진 모습을 종종 눈에 담곤 합니다. 다 같이 한마음으로 출발선상에서 골인까지 함께 뛰던 마라톤 대회는 이제 각자가 좋아하는 코스를 골라 GPS로 기록하는 방식으로 바뀌었지요. 식당 내 테이블은 한 자리 건너 한 자리. 마주 앉는 구내식당 테이블 한가운데엔 투명의 가림막. 강원도로 향하는 KTX 열차는 전좌석 50%에 해당하는 창가 자리만 판매하기도 했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과 알몸을 부대끼던 사우나와 목욕탕은 잠정적 휴업상태에 들어갔었고요. 제가 즐겨하는 배드민턴도 예전에 비하면 체육관 입장 인원수가 현저히 줄었습니다. 회식자리와 술자리, 약속이 줄어들면서 심리적 거리도 예전과는 다르게 체감하게 되었는데요.
이러한 시대적 변화로 퍼스널 스페이스를 존중하는 형태로 나아갈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마도 우리만의 독특한 문화가 자리잡지 않을까 기대되는 바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