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눈치 DNA 2 12화

'이치란' 라멘 그릇 밑바닥에 써있는 문장

by 알로

(이전 글과 이어집니다)


회사에 인턴 친구들이 들어오면 전 기수로부터 인수인계를 받는데요. 초창기만 해도 없었던 매뉴얼이 언제부턴가 생겼습니다. 그 양만 A4 서너 장에 달합니다. 이 팀에서 인턴사원의 롤은 OOO이다, 현장에 나갈 때 OOO만큼은 꼭 챙긴다, 라는 명확한 설명부터요. 오후 5시가 되면 기사를 3부 인쇄한 뒤 OOO에게 전달할 것, 기사 가안이 나오면 인터뷰 TC*를 미리 체크할 것, 과 같은 디테일한 팁까지 적혀있습니다. 2015년 겨울부터 다녀간 백여명의 인턴이 모아 온 기록물인 셈이죠. 구두로 전달되던 각자의 경험들이 활자로 태어난 순간, 암묵지는 형식지로 전환됩니다.


암묵지는 명확하지 않고, 형언할 수 없으며 정답이 없다는 점에서 상당히 추상적인데요. 5-3=2 처럼 맞아떨어지지 않는 모호함. 그 까다로운 성질이 저에겐 되레 흥미롭게 느껴집니다. 눈치와 공기에 밀접한 관련성이 있어선데요. 지난번에 이어 암묵지라는 프레임으로 '쿠키요미(空気読み)' 사례를 들여다보겠습니다.



3. '이 한 방울이 최고의 기쁨입니다.'


일본의 유명한 라멘집 '이치란(一覧)'. 국내에 들어온지도 꽤 되었으니 아시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이 집은 국물을 다 마신 손님에게만 선물이 주어지는데요. 마지막 한 방울을 들이키는 순간, 눈앞에 글자가 나타납니다. '이 한 방울이 최고의 기쁨(この一滴が最高の喜びです)'이라는 문구를 그릇 밑바닥에 새겨놓은 건데요. 한 그릇을 비운 이도, 빈그릇을 치우는 이도 흐뭇해지는 기발한 커뮤니케이션입니다. 이치란 라멘은 돼지 등뼈를 푹 고와 삶은 국물 맛이 일품이라고 불리는데요. 국물에 승부수를 두는 걸로 유명한 브랜드입니다.



'나'는 지금 라멘을 먹으러 가는 중입니다.



라멘집 앞에 글자들이 많이 보이죠. 맨 왼쪽부터 순서대로 적어보겠습니다.


'가장 밀고 있는 메뉴는 시오라멘'

'시오라멘'

'라멘'

'가장 밀고 있는 메뉴는 시오라멘'

'시오라멘'


시오라멘은 닭 육수에 소금으로 간을 한 라면인데요.


가게 안에 들어가서 무인발권기로 라면을 주문해야 하는데요.


소금라면, 간장 라면, 된장라면, 돈코츠라면


공기를 읽는 당신이라면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요? 정답은 소금라면입니다. 아니, 난 된장라면이 좋은데, 내 입맛은 간장인데! 할 수도 있습니다. 답을 고를 때 '취향'보다 '공기'를 존중해야 될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어떤 공기가 깔려있는지는 살펴볼 필요가 있겠지요.


일본 음식점은 어느 지역이든, 어떤 음식이든 간판이나 메뉴, 입구나 벽면에 유독 이 단어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이치오시(一押し) : 가장 밀고 있는 메뉴

고다와리(こだわり) : 집요함, 집착


일본엔 100년 이상 된 장수기업이 5만 개 이상 존재한다고 하지요. 그 비결에 저 두 단어가 큰 몫을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치오시'가 '승부수, 강력한 추천'과 같은 뉘앙스를 풍기는 단어라면 '고다와리'는 '고집스러움, 집착'과 같은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장인이 100년 동안 '고다와리'한 육수>, <저희 가게는 재료의 신선함에 '고다와리'하고 있다>는 식으로 사용하지요. 절대 그 어떤 것과도 타협하지 않겠다는 마인드, 철저하게 파해친 결과 이 분야에서만큼은 자신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는 느낌을 강하게 내뿜는 단어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라멘집 '이치란'도 마찬가지입니다. 체인점마다 벽면에 '이치란의 고다와리'를 붙여놓는데요. 1960년 개업 초창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특제소스, 국물, 면, 이색적인 카운터석, 주문 시스템. 이 다섯 가지에 이치란은 승부를 걸었다, 는 이야기가 적혀있지요.


그렇다면 식당에서 흐르는 공기는 어떤 걸까요? 자연스러운 흐름은 '요리사가 가장 자신 있어하는 요리를 손님이 맛있게 먹고 가주는 그림' 이겠죠. 우리 가게에 왔으면 이걸 드셔 달라, 이게 자신 있다, 어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제가 일했던 고깃집은 질 좋은 A5등급의 브랜드 소고기(검은털흑소)를 합리적인 가격으로 내놓는다는 점이 '고다와리'였습니다. "아니, 이 고기를 이 가격에 먹는다고?"라는 한마디가 최고의 칭찬이었다는 뜻입니다. 화로구이 전문점이라 숯도 좋은 걸 가져다 썼는데요. 메인 메뉴는 아니었지만, 한국식으로 구워 먹는 삼겹살도 팔았습니다. 만약 손님이 삼겹살만 먹고 나서 "이 집 고기는 별로네."라고 말해온다면 가장 자신 있는 메뉴는 검은털흑소니까 다음엔 꼭 드셔 보시라, 권했겠지요. 살짝 억울했을 것같긴 합니다.


우리나라도 비슷한 문화가 있지요. 가게에서 미는 메뉴를 고르지 않았다 해서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닙니다만, 이왕이면 가장 맛있다는 메뉴를 먹고 싶다는 욕구. 당연한 소비심리이니까요. "거기는 블랜딩이 맛있는 커피집인데, 왜 주스를 골랐어." 라던 가요. "이왕 왔으니 시그니처 메뉴를 먹어봐야지."라는 말에 그런 문화가 담겨있습니다. 한편 노을 맛집(노을이 예쁜 식당), 분위기 맛집(분위기가 좋은 가게)처럼 소비자가 발견한 특징을 가게가 마케팅의 일환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비슷한 듯 다른 듯 하지요. 우리는 공기나 흐름과 같은 맥락상의 분위기보단 그때그때 달라진다는 느낌이 좀 더 강하게 듭니다.



4. 공기, 어디까지 읽어봤니




간판 앞에 서 있는 빨간 '나'. 간판에 적힌 글자를 왼쪽부터 적어보겠습니다.


[왼쪽 : 신장개업! 지역최대규모!] [오른쪽 : PACHINKO&SLOP / 파친코]


자, '나'를 왼쪽과 오른쪽으로 움직여서 어디에 서있어야 할지 정해야 합니다. '쿠키요미' 게임은 정답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이 퀴즈는 유투버들이 해석한 걸 많이 참고했습니다. 높은 확률로 '오른쪽에 선다'가 공기를 더 잘 읽은 선택일 듯합니다.


새로 개업한 데다 지역 최대규모라는 점은 파친코가 가질 수 있는 최대 메리트입니다. 규모가 크다는 건 기계가 많다는 뜻인데, 심지어 그 기계들이 죄다 새 것이란 뜻 아니겠습니까. '파친코'라는 글자만 보이면 저기가 파친코구나, 할 텐데요. '신장개업, 최대규모'라는 글자부터 본다면 무슨 가게길래?라는 호기심이 올라오겠지요.


빨간 '나'는 그냥 누군가를 기다리며 가게 앞에 서있는 행인입니다. 파친코 업주와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죠. 그럼에도 이왕이면 이 간판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마음을 쓰는 겁니다. 크고 작음으로 분류하자면 아주 세세하다고 볼 수 있지요.


개인적으론 일본의 '디테일' 문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 생각합니다. 이어령 교수의 <축소지향의 일본인> 맨 앞장엔 '무엇이든 무엇이든 작은 것은 모두 다 아름답다'는 마쿠라노소시*의 인용 문구가 나오는데요. '일본인'과 '디테일', '일본인'과 '고마카이(細かい)'는 뗄레아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고마카이는 작고, 섬세하고, 정교하고, 자세하다는 뜻의 형용사입니다. 행동양식의 기준점이 상당히 디테일한 부분까지 미친다고 볼 수 있겠지요. 장단을 떠나 하나의 성향으로 간주하고 접근해보겠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일본 나고야로 홈스테이를 다녀왔는데요. 귀국하고 며칠 뒤 홈스테이 가정에서 보낸 봉투 하나가 도착했습니다. 제가 나고야 집구석 어딘가에 흘렸을 (더불어 잃어버린 줄도 몰랐던) 머리끈이 들어있었어요. 예쁜 장식이 달려있다거나 값이 나가는 모양새는 아니었습니다. 편의점 가면 백 개에 이천 원 정도 하는 민무늬 고무줄이었거든요. 아니, 이걸 굳이 보내온다고? 당시엔 혀를 내둘렀던 기억입니다.


한 번은 고깃집에 출근했는데 계산대 앞에 종이 한 장이 놓여있습니다. 점장에게 무엇이냐 물으니 "다음 주에 저 앞 골목에서 영화 촬영을 하나 봐."라더군요. 내용을 보니 0월 0일 몇 시, 어디 어디 구간에서 영화 촬영을 하는데, 책임자는 누구이며 어떤 장르의 영화이다, 다니는 데 불편할 수 있으니 미리 양해를 구한다, 는 내용이었습니다. 공지와 협조, 사과문의 성격을 다 가진 종이가 제겐 낯설더군요. 이걸 왜 우리 가게에 보내왔냐, 물으니 점장이 되묻던 기억이 납니다. "당연한 거 아니야?"


고깃집에 들어온 두 명의 손님. 생맥주 세 잔, 나물, 샐러드, 생갈비(소금), 소갈비(양념), 돼지갈비(양념), 곱창(소금), 냉면을 주문합니다. 아르바이트했던 시절의 기억으로 시뮬레이션을 해보겠습니다.


주문을 받으면 받은 주문을 다시 한번 읊어서 손님한테 확인시켜줍니다. 시뻘건 숯이 담긴 화로를 내가고요. 얼린 잔에 생맥주를 담아 나가고요. 곧이어 나물과 샐러드가 나갑니다. 앞접시는 기본으로 테이블에 구비되어있지만, 샐러드는 집게와 앞접시를 따로 가져가지요. 고기를 굽는 순서는 소 다음이 돼지입니다. 소금을 구운 뒤 양념은 구워도 되지만, 양념을 구운 그릴에 소금구이 고기를 내갈 경우엔 그릴을 갈아야 하는데요. 마음대로 갈면 싫어할 수 있으니 또 물어봅니다. "그릴 갈아드릴까요?" 냉면은 고기를 다 내가면서 언제쯤 가져올지 물어보지요.


이 과정 사이사이에 맥주잔이 비면 무엇을 더 마실지 물어보고, 접시가 더러워지면 새 접시가 필요한지 묻고, 빈 그릇이 보이면 양해를 구한 뒤 치웁니다. 흰 셔츠를 입은 사람에겐 앞치마를, 담배꽁초가 가득 차면 새 재떨이를, 쇠젓가락질이 어려운 사람에겐 나무젓가락을 권하는, 디테일함이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요리사가 가장 자신 있어하는 요리를 손님이 맛있게 먹고 나가기까지 그 흐름에 빈틈없이 작고 작은 서비스를 끼워 넣는 식이지요.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간다면 "저번에 소금구이로만 드시던데, 오늘은 양념이시네요. 어떤 게 더 입맛에 맛으세요?"라는 질문을 던지는 식일 텐데요. 일본의 모든 음식점이 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모든 고깃집이, 직원 누구나가 다 그렇지도 않습니다. 개중엔 저런 디테일함을 '묻지 않고 해 주었으면' '그만 말 걸었으면'이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고요.


어떤 상황을 하나의 그림, 이상적인 흐름으로 간주해봅니다. 하나의 그림을 완성해나가기 위해 퍼즐 조각을 끼워 넣는 행위. 흐름이 깨지지 않도록 작은 막대기들로 받쳐 나가는 행위. 일본의 공기 속 디테일함이란 어쩌면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TC*

타임 체크. 촬영 영상에 누가 등장하고 어떤 말이 녹음되었는지 분단위 초단위로 기록하는 행위


마쿠라노소시*

세이 쇼나곤 作. 일본 고대 후기 수필


keyword
이전 11화고도의 눈치게임, 한국과 일본의 '암묵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