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시는 치카코를 좋아합니다.
'죽을 만큼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하와이까지 날아온 다이시에게 치카코는 운명의 상대였지요. 처음 만난 날부터 돌직구로 들이댑니다. 장거리 비행이 추울 거라며 수면양말을 선물하고, 짧은 머리를 좋아한다는 말에 오래 기른 머리를 싹둑 잘라냅니다. 치카코가 우울해 보이면 가장 먼저 달려가는 사람, 치카코가 옆에 지나기만 해도 비죽비죽 웃음이 흘러나오는 사람, 은 언제나 다이시였습니다.
드디어 대망의 바다 데이트. 다이시는 이 날만을 기다려왔습니다. 근육을 만들겠다며 수개월간 프로틴 가루만 먹으며 몸을 가꿔왔죠. 해변가에 자리 잡은 두 사람, 바다에 들어갈 준비를 시작하는데요. 치카코가 튜브에 바람을 넣는 사이, 다이시는 탈의실에 다녀옵니다.
수영복으로 갈아입은 다이시. 치카코에게 가는가 싶더니만 갑자기 바닥에 엎드려 팔 굽혀 펴기를 시작하는데요. 수풀 사이 오르락내리락하는 다이시의 상반신과 거친 숨소리는 어째 웃기기도 짠하기도 합니다. 마지막 한 방울의 즙까지 짜내겠다는 듯 꾸역꾸역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죠.
일본 리얼 버라이어티 '테라스하우스'에 나오는 장면입니다. 남녀 여섯 명이 한 지붕 아래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녹화된 장면을 스튜디오 패널들이 모니터 하는 식이죠. 요즘 방영하는 MBN '돌싱글즈'와 비슷한 구조입니다. 구애를 향한 다이시의 절절한 몸부림이 등장할 때마다 패널들은 입을 모아 외칩니다.
"다이시는 정말 여자야!"
다이시는 180cm가 넘는 키에 구릿빛 피부의 건장한 체구를 가진 사람입니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오키나와 남성이지요. 훈훈한 인상에 중저음 목소리로 등장 초반에 '멋있다'는 평을 달고 다니던 인물입니다. 그랬던 다이시에게 '여자'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은 건 구애하는 방식이 드러나면서부터였습니다. 그는 감정을 섬세하게 다루는 사람이었죠.
치카코에게 보여준다며 머리를 싹둑 잘라내거나 자른 머리를 다듬는답시고 고데기로 손질하는 모습. 왁스를 바른답시고 거울 앞에 한참을 서 있는 모습. 이 모든 장면에 '여자' 같다는 수식어가 따라붙습니다. 데이트 전날, 관리받으러 샵을 찾는 여자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한 패널이 덧붙입니다. "가꾸는 거야 그렇다 쳐요. 여자한테 튜브 불라 해놓고 본인은 푸시업을 하고 있다는 게 남자다운 모습은 아니죠."
치카코가 우울해할 때 가장 먼저 달려갔던 다이시는 나름 '남자다운' 목소리로 치카코를 '박력 있게' 끌어당기며 "괜찮아. 잘될 거야." 다독입니다. 그림만 보면 속상한 여자를 위로하는 든든한 남자의 모습인데요. 한 패널은 그 장면을 두고 "공기를 잘 읽고 타이밍을 노려서 여자가 자연스럽게 기대게 만들어야 하는데, 다이시는 너무 서두른다. 남자다운 모습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결국 다이코라는 별칭이 붙여집니다. '코'는 한국의 순자, 미자, 영자, 처럼 일본에서 요우코, 준코, 케이코, 라는 이름에 붙이는 자(子)입니다. 일본에선 여성스럽다는 뉘앙스를 담아 종종 이름 끝에 '코'를 붙이는데요. 멀쩡한 다이시는 그렇게 다이코가 되어버립니다.
앞서 몇 차례 일본의 여자력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요. 남성에게 '여자' '여성스럽다'는 말이 따라붙을 때 그 단어들이 지닌 의미는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테라스하우스에서 다이시는 '두근거리며 외모를 가꾸는 모습', '남성적인 공기를 뽐내지 못하는 서투른 모습', '일거수일투족에 설레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여성스럽다'는 말을 듣게 되었는데요. 일본 사회에서 남성스러움과 여성스러움의 경계선은 상당히 뚜렷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좋아하는 연인과의 데이트를 앞두고 외모를 신경 쓰거나 설레는 감정을 맛보는 것. 딱히 성별의 문제는 아닌 듯 싶은데요. '공기를 잘 읽는 여성' 그러니까 일본에서 '여자'에겐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들이 요구되는 걸까요. '쿠키요미(空気読み)'에서 찾아보았습니다.
1. 남자 친구랑 귀신의 집에 간 여자의 행동
데이트하던 중 귀신의 집을 가게 된 상황입니다.
귀신의 집의 묘미는 귀신이 언제 등장할지 모른다는 점입니다. 깜짝 놀랄 수 있다는 거죠. 퀴즈는 귀신이 등장하는 타이밍에 맞추어 빨간색 '나'의 행동을 고르는 겁니다. '나'의 성별은 여자입니다. 즉, 여자력을 묻는 테스트인 거죠. 선택지는 두 개. 가만히 있거나 놀란 척 하거나.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는 건 리액션이 무미건조하다는 뜻에 가깝겠죠. 좀 덜 놀라도 놀란척 꺄- 정도는 해주는 게 적당한 리액션이라고 보여집니다. 이러한 리액션은 여성에게만 요구된다는 점, 그 방향성이 너무나 뚜렷하다는 점, 이 조금 신선합니다. 남자 친구 방향으로 화면을 슬쩍 터치해주면 이미지와 같은 모습이 연출됩니다. 정답인 거죠. 공기를 잘 읽는 행동입니다. 한 발을 살짝 들어 올린 채 남자 친구에게 기대는 모습. 여성스러운 리액션이란 저런 모습을 의미하는 모양입니다.
2. 남자 친구와 식사를 마치고 계산할 때
일본은 더치페이가 일반적입니다. 와리깡(割り勘)이라는 말이 있지요. 에도시대부터 이어온 문화라고 알려졌는데요. 헤이타이간죠(兵隊勘定)*라는 별칭도 있습니다. 러일전쟁 때 군대(헤이타이)에서 유래한 단어입니다. '내일 전쟁터에서 죽을지 살지 모르는데, 같은 병사끼리 신세 지고 갚을 거 없이 균등하게 부담하자'던 설에서 시작되었다죠.
고깃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도 계산대 앞에 나와 한 명씩 차례로 1인 비용을 계산하는 손님들은 꽤 많은 편이었습니다. 1엔까지 깔끔하게 나눠 내는 것도 일반적입니다. 세 명의 식사비용이 9800엔이라면 한 사람당 3266엔씩 지불하는 거죠. 잔돈이 없어서 누군가 5엔이나 1엔을 내주었다, 하면 신세를 진 사람은 고맙다는 표현을 해줍니다. 더치페이 문화와 여자력이 만난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요?
식사를 마치고 계산을 앞둔 상황. 친구 사이라면 더치페이가 일반적이겠지만, 남녀관계에 놓이면 얘기가 또 달라집니다. '나'라고 적힌 여성 캐릭터는 어쩐 일인지 긴장한 듯한 모습인데요. 땀도 흘리고 두근두근(ドキドキ) 거리고 있죠.
예전에 일본 남녀 지인들과 어떤 데이트가 좋냐는 화제로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날의 분위기나 대화가 어떻게 오가는지가 더 중요하니 호화로운 레스토랑에 가고 안 가고는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고 말했는데요. 듣고 있던 남자 지인이 그럽니다. "돈이 덜 드는 여자네." 신선하고도 직설적인 화법이었습니다. 여성은 돈이 들거나 혹은 안 드는 대상으로 존재하는 걸까요. 재정적 비용을 남성이 부담하는 경우가 많다는 걸 의미합니다.
테라스하우스에서도 남성들이 데이트 비용을 부담하는 장면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괜찮다며 손사래 치는 여성에게 "괜찮아, 내가 먼저 오자고 했으니까 이번엔 내가 낼게."라고 하죠. 먼저 가자는 목소리를 내는 것도 대부분은 남성 쪽이지만 말입니다.
계산대 앞에 섰어요. 남자 친구의 손에 지갑이 들려있습니다. 여자 친구는 뒤따라 서있죠. 손가방을 만지작 거립니다.
남자 친구가 말합니다. "아냐, 괜찮아." 본인이 내겠다는 거죠.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는 여자 친구. 여전히 계산하려는 제스처를 취하고 있습니다. 남자 친구가 또 한 번 강조합니다. "여기는 내가 낼게."
세 번째. 남자 친구가 또 한 번 막아서는 장면입니다. "괜찮다니깐."
여기서 퀴즈. 그래도 더치페이 문화를 지켜야 하니 내겠다는 제스처를 취할지, 가만히 있을지, 선택해야 합니다. 여기선 눈치껏 멈추는 것이 여자 친구로서 공기를 읽은 행동이겠지요.
자칫하면 남자 친구의 성의를 무시해버렸다는 인상을 줄 수 있어서 일까요. 더치페이 문화가 일반적인 사회이지만, 연인 관계에 놓일 경우 눈치껏 남성의 의견을 따라주는 것야말로 여자력이 높은 행동이란 뜻입니다.
방법은 많죠. 식사 후 이어질 데이트 장소에서 여자 친구가 계산을 한다던가, 다음 식사자리에서 지갑을 여는 방법도 있고요. 하지만 퀴즈에서 가늠하고자 했던 건 '이 커플이 얼마나 합리적으로 데이트 비용을 분담하는가'가 아니었습니다. 한정된 장면 속에서 '여자로서 해야 하는 행동'을 고르는 것이었죠. 데이트 비용이나 남녀관계 사례를 일반화하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이 글을 쓰는 저 역시도 매번 다른 행동을 취해왔거든요. 그래서 '순응'이라는 프레임에 초점을 맞추어보았습니다. '쿠키요미(空気読み)'에 등장하는 '여자력' 테스트는 대부분 상황 설정이 '여자로서 순응하는지, 안 하는지'를 묻는 경우가 많습니다.
3. 아바타가 된 여자 친구
밑도 끝도 없이 '부탁한다'라는 상황입니다. 빨간 '나'는 여성입니다. 화면을 터치해 살짝 움직여주면 여성이 "부탁해(하트)" 라며 애교를 부리는 장면이 연출됩니다.
여기서 신기한 건 아무런 설명이 없다는 점입니다. 뭐가 됐든 부탁하는 상황이라는 거죠. 요즘은 사라져가는 추세이지만, 한때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한 여자 연예인들에겐 곧잘 "애교 좀 보여주세요."라는 질문이 던져지곤 했습니다. 출연자들은 잠시 고민하는 듯 하다 윙크를 하거나 몸을 꼬거나 두 손을 모으거나 콧소리를 내며 비장의 카드를 꺼내듯 '애교부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앞뒤 가리지 않고 해봐, 하면 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 '여자력'이라는 말엔 순응하는 능력 또한 포함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 장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과한다'라는 글자만 등장했다 사라지는데요. 부연 설명이 없다는 건 누구의 잘잘못인지 가리는 게 더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겁니다. 내가 좀 억울한 상황이라도 사과를 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보겠다는 건데요. 결국은 "미안하다."라는 말에 인색하지 않은 여성이 여자력이 높다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닐까요.
4. 눈치껏 까치발
이 장면은 남성과 여성의 발이 마주 보고 있는 모습에서 시작됩니다. 아무 설명도 없이 그냥 나란히 맞대고 있어요. 퀴즈가 잘못된 건가, 물끄러미 보다가 혹시 영화에서 나올 법한 키스신인가 싶어 여성의 구두를 터치해서 올려보니 정답이었습니다.
물론 이 퀴즈들이 일본의 여성상을 대변해준다고 할 순 없을 겁니다. 연인 관계에서 여성이 읽어야 하는 공기는 어떤 그림인지 들여다볼 수 있는 정도지요.
사족이지만, 일본엔 '한국 여성의 특징은 기가 세고, 피부가 좋은 것'이라는 말이 정설처럼 존재합니다. 언론에서 한창 김연아 선수와 아사다 마오 선수를 비교해서 보여주던 시절. 카리스마가 독보적이었던 김연아 선수와 생글생글 웃는 아사다 마오 선수를 교차 편집해서 보여주던 장면을 보고 한 친구가 말합니다. "김연아 선수는 기가 세 보인다, 무서운 인상이다. 한국 여성들은 기가 세다는 소리가 있긴 하지."라며 제 눈치를 슬쩍 보는데요. 순간 한 대 쥐어박을뻔했지만, 저 정설이 틀리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애써 웃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기가 세다는 건 감정표현을 스스럼없이 드러내거나 호불호가 강하다는 인상을 심어주는 말이죠. 우리나라에서도 칭찬으로 사용하는 경우는 보기 드물긴 합니다. 일본에서 한국 여성을 유독 '기가 세다'는 수식어로 표현하며 거리를 둔다는 건 일본 사회가 요구하는 여자력, 과 그만큼 상반된 뉘앙스라는 걸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시대는 끊임없이 변하고, 성별이 무의미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각자의 다채로운 개성만이 주목받는 세상이 되어갑니다. 일본의 '여자력'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 조심스러운 이유이기도 한데요. 그러한 문화가 일부에 존재한다는 것, 그러한 흔적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일본어 속담사전 http://zokugo-dic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