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지인과 호프집에 다녀왔습니다. 가볍게 맥주나 한 잔 하려고 들어간 뒷골목의 작은 가게인데요. 주문했던 닭발이 기대 이상이었던 나머지 그 맛을 잊지 못하고 일주일 만에 또 방문한 겁니다. 제가 매운 걸 잘 못 먹는 편이라 닭발 하나 입에 넣고 후, 하, 매워하니 사장님이 물을 가져다주었죠.
"저번보다 맵네요. 그런데 너무 맛있어서 먹게 돼요."
"어머, 미안해라. 다음엔 고추를 안 넣을게요."
몇 분 후 처음 갔던 날 우리 테이블을 담당해주었던 직원이 바구니에 귤 몇 개를 담아옵니다.
"지난번에도 오셔서 닭발 시키셨죠? 이거 좀 드시라고 가져왔어요. 제가 못 알아봐서 죄송해가지고. 하하. 다음엔 꼭 기억할게요."
직원이 자리를 뜨자마자 마주 앉은 지인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이 집은 무조건 단골이다." "그치."
취향은 사람마다, 때에 따라, 달라집니다. 나를 알아봐 주는 공간에 친밀감을 느끼는가 하면 그냥 모르는 척, 말을 안 걸어주길 바라기도 하지요. 저는 많은 경우 전자에 속합니다. 아르바이트할 때도 손님의 소소한 습관이나 기호를 기억해낼 때 희열을 느꼈어요. 그렇게 단골을 한 명씩 늘려가는 걸 일하는 재미로 삼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손님으로 찾은 가게에서 디테일한 부분까지 신경 쓰는 직원을 만나면 마냥 반갑습니다. 기어이 단골을 자처하지요.
일본에서 했던 아르바이트는 주로 사람을 대하는 일이었습니다. 공항 면세점에서 양갱을 팔거나 오코노미야키를 굽거나. 편의점 계산대에 서있거나 거리에서 티슈를 나눠주거나. 한국어를 가르치거나 이자카야에서 서빙을 하거나. 가장 긴 시간을 보낸 건 고깃집(야키니쿠)이었는데요. 다양한 사람들과 접하고, 특성상 단골이 많다는 게 저에겐 장점으로 다가왔습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일본 아르바이트 생활을 딱 하나의 단어로 축약해본다면 아마도 '암묵지(暗默知)'가 아닐까 싶습니다.
암묵지는 '학습과 경험을 통해 개인에게 체화되어있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지식'을 뜻하죠. 네이버 지식백과에 실린 깔끔한 설명을 빌려왔습니다. 한자를 풀어봐도 '암묵적으로 알고 있다'는 의미인데요. 일본의 한 학자는 '일본 사회에서 공기를 읽는다는 건 암묵지(naito, 2004)'라고도 표현했습니다. 직원이 귤을 갖다 주며 "알아보지 못해 미안하다."고 한 것도, 찬 맥주잔에 뜨거운 물을 담아주며 "잔은 차지만, 물은 뜨겁다."고 알려준 것도, 가게 매뉴얼엔 없는 항목입니다. 매뉴얼은 '손님이 오면 바로 가져가야 할 3가지 : 물티슈, 물병, 컵'과 같은 내용을 적는 곳이죠. '지난번에 온 손님을 못 알아봤을 경우, 대응법'은 적혀있지 않습니다. 말로 표현하기 애매한 경우가 많죠.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데, 해보니 좋아하는 손님이 있고, 그러한 경험이 차곡차곡 쌓여 '암묵지'가 된 겁니다.
소소하고, 디테일하고, 절묘한 타이밍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암묵지는 유용합니다. 한국에서 눈치를 볼 때, 일본에서 공기를 읽을 때, 중요한 데이터가 되어주거든요. 자꾸 암묵지, 암묵지 하니까 묵은지 김치찜이 생각나는데요. 정신을 붙들고 본론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귤을 갖다 주는 행위는 옳고 그름의 범주가 아니죠. 필수도 아닙니다. 그만큼 양국의 문화를 비교할 때 흥미롭게, 부담 없이 들여다볼 수 있는 포인트예요. 작고 귀여운 스킬, 소소한 센스 정도로 생각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1. 서있을래, 움직일래?
편의점 계산대. '나'는 도시락을 샀고, 직원이 전자레인지로 데워주는 장면입니다. 우리나라는 도시락도 컵라면도 셀프죠. 대개 일본 편의점에선 데워진 도시락과 젓가락을 비닐봉지에 담아주는 일까지 직원의 몫입니다.
도시락이 데워지기까지 잠깐의 시간. 내 뒤엔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이 서있습니다.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을 것인가, 옆으로 비켜주어 다음 사람이 계산할 수 있도록 배려할 것인가, 선택하는 퀴즈입니다. 화면 속 빨간 '나'를 터치해서 왼쪽으로 이동시켜주었지요. 정답입니다. 그래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작은 배려를 보여줘야 하는 공기입니다.
우리나라 편의점은 계산이 끝난 손님이 계산대 앞에 그대로 서있어도 직원분이 먼저 "오세요." 하고 불러주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계산 마치고 카드를 지갑에 넣는 중이거나 물건을 가방에 넣는 사이, 뒷사람이 스윽 다가오는 바람에 어정쩡한 자세로 밀려났던 경험, 종종 있습니다.
일본의 경우 편의점 매뉴얼엔 존재하지 않지만, 대부분은 먼저 온 손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뒷사람을 부릅니다. 퀴즈와 같은 경우라면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하고 먼저 온 손님에게 눈치를 준다던가 "이쪽에서 기다려주세요." 라며 직접적으로 안내를 하는 식이지요. 우리는 좀 빠릿빠릿하게 일처리가 빨리 끝나는 효율성에 의미를 둔다면 일본은 접객의 장(손님을 대하는 공간)이라는 공기를 중요시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2. 정답을 맞히면 상금을 드립니다!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앉아있습니다. 문제를 맞히면 상금을 주는 퀴즈쇼 방송 프로그램입니다. '나'는 문제를 맞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카메라 옆 스테프가 '예산이 없다'는 내용의 플래카드를 들고 있지요.
문제 : 일본에서 가장 높은 산은?
A : 후지산
B : 고로케
C : 멘치카츠 (다진 고기와 양파를 섞어 튀긴 요리)
D : 하무카츠 (햄에 튀김옷을 입혀 튀긴 요리)
네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정답은 A지만, 공기를 잘 읽는 사람이라면 후지산이 아닌 다른 답을 골라야 할 겁니다. 예산 없다, 오답을 말해라, 라는 암묵적 메시지를 보내며 무릎까지 꿇고 있는 스테프. 아는 정답을 맞히는 건 지극히 당연한 도리인데, 공기를 못 읽으면 도리를 지킨 것만도 못하게 되니 참 아이러니하지요.
제가 일하던 고깃집에선 매년 송년회가 열렸습니다. 일본은 12월 31일이 되면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도시코시소바(年越しそば)라는 전통음식을 먹습니다. 액운을 끊고 소바의 긴 면처럼 장수하라는 의미를 담은 가정요리입니다. 그날만큼은 손님들도 일찍 귀가하는 편이지요. 빨리 가서 홍백가합전* 보며 자정을 넘기기 전에 소바를 먹어야 하거든요. 하지만 아르바이트생은 사정이 다릅니다. 대부분 지방에서 올라와 자취 중인 대학생이었으니 혼자 소바를 만들어 티브이 앞에 앉아 카운트 다운하는 게 달갑진 않았겠죠. 늘 바글바글하게 한자리에 모여 새해를 맞이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밤 10시가 되면 슬슬 저마다 먹고 싶은 메뉴를 요청합니다. 갈빗살, 토시살, 육사시미, 육회... 한 명이 돌아다니면서 주문을 받아요. 그렇게 모아진 리스트를 주방장이 열심히 준비해서 11시부터 먹고 마시는 식입니다. 다들 양심상 '진짜 먹고 싶은 걸' 고르진 않았습니다. 한두 단계 낮춰 적당한 가격을 골랐죠.
그런데 누군가 꽃등심을 주문합니다. 네 조각 달랑 나오는 한 접시에 6만 원 하는 부위입니다. 다른 점포 직원들도 모이니 얼추 30명쯤 되는 인원입니다. 주방장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려요. "아... 꽃등심이 어디에 있더라... 그게 애들 다 먹일 만큼 양이됐던가... 어디에 뒀었지..." 어쩐지 말이 좀 느려지고요. 일할 땐 그렇게 손이 빠르던 사람이 행동도 뭔가 좀 느릿느릿합니다. 어색한 정적을 느낀 아이는 말을 바꾸죠. "아, 생각해보니 너무 기름질 것 같아요. 저는 항정살이 먹고 싶습니다!" 순식간에 꽃등심은 증발합니다. 용기 내어 '후지산..?' 하고 내뱉었다 눈치 보며 '고로케!' 외치는 격입니다. 가게 주방장은 인심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말을 꼭 기억해뒀다가 다른 날 아이를 불러내어 마블링이 블링블링한 고기를 사주곤 했지요.
나의 이익이나 의도, 욕구와는 다른 선택지를 골라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암묵지라는 데이터가 '경험상 그 선택은 아닌데?' 라며 손사래 치는 것 같습니다. 그 선택의 기준에 한일 간 차이도 존재하는지 조금 궁금해지는데요. 암묵지 이야기는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
홍백가합전*
매년 12월 31일 NHK에서 방송하는 남녀 대항 형식의 음악 프로그램(1945년~현재까지 방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