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누구 닮았냐

2020년 1월 9일

by 알로

나는 누군가에게 아쉬운 소리를 죽기보다 하기 싫어하는 사람이다. 하다못해 앞자리 선배가 맛있어 보이는 사탕을 먹고 있어도 하나만 달라, 고 쉽게 말하지 못하는 성격이다. 소심하다면 소심할 수도 있다. 사탕을 얻어먹고 내게 돌려줄 무언가가 있다면 별개 이야기가 된다. 내가 주는 건 마음이 편하지만 내가 달라고 말하는 건 꺼려지는 성격. 그래서 돈 빌려달란 소리도 뭘 알아봐 달란 소리도 부탁하는 소리도 해본 기억이 거의 없다. 사람은 누구나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신세를 지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부대끼는 것도 중요하지, 기댈 수도 있는 거지, 힘들다 할 수도 있는 거고.

세상에 공짜란 없다는 걸 알게 됐을 때 즈음인 것 같다. 내가 무언가 신세를 지게 되면 이 사람은 나에게 바라는 것이 생길 수도 있다는 걸. 그 바라는 것이 내게 부담이 됐을 때 고민해야 되는 상황이 있다는 걸. 그럼에도 정과 도리를 생각해 내게 무리가 되더라도 나는 마지못해 그걸 받게 되는 성격이라는 것도.

초년생 시절, 급하게 섭외나 취재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지인이었다. 대한항공 조현아 땅콩 사건이 터졌을 때, 승무원을 향한 갑질을 취재해야 해서 승무원 친구에게 전화했다. 그냥 물어볼 수도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는. 친구는 다소 부담스러운 목소리였다. 혹시 녹취하니? 아니, 안 해. 그냥 내용을 알아보려는 것뿐이야. 정에 약한 친구는 내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냈지만 나는 결국 그 이야기들을 쓸 수 없었다.

학교 폭력에 떠오르는 건 교사직에 있는 친구. 아파트 주민들의 갑질을 취재할 땐 경비직에 있는 친척분. 부실공사를 취재할 땐 옆집 사는 부동산 아저씨. 어느 순간 오랜만에 연락하면 "결혼하나"라는 생각부터 든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이들을 내가 '취재원'으로 생각한다는 느낌을 줄까 봐 두려워졌다. 그 후로 가급적 지양했던 것 같다.

모든 부탁이나 아쉬운 소리에 귀를 닫고 산다고 해도 부모의 말씀은 거절하기가 어렵다. 그 바닥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쉽게 부탁하지 못할 것 같은 내용도 서슴지 않고 건네 온다. "주변에 프리뷰 할만한 사람이 있니?"라는 아빠. 물어보면 영상 분량도 정산비용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다. "당장 이번 주 토요일에 진도 팽목항에서 1박 2일로 촬영해줄 만한 친구가 있니?" 서울에서 진도 팽목항은 버스로 다섯 시간을 내려가고도 또다시 버스를 갈아타야 하는 거리다. "명함 좀 만들어줄 수 있니?"라며 묻는 엄마는 어떻게?라는 물음에 "최대한 싸고 예쁘게"라고 답한다. 싸고 예쁘게. 그 어려운 과제를 왜 하늘은 내게 내려주는가.

광명시 철산동 우성아파트. 5층에 살던 여섯 살 무렴. 엄마가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난 옆집에 가있었다. 언니들이 있는 3층에 가기도 있지만 언니들은 나보다 고학년이었고 공부를 잘하는 언니들이었기에 조용히 해야 했다. 그래서 옆집 동생과 노는 걸 좋아했던 것 같다. 하루는 동생이랑 놀다 뭐에 꽂혔는지 동생의 머리를 잘랐다. 아마도 "내가 머리 잘라줄까?" 하고 가위를 들고 다가갔겠지.

집에 돌아온 동생의 어머니(옆집 아주머니)는 잠깐 외출한 사이에 이게 무슨 일이냐며 기겁하셨을 거고 여느 때처럼 날 데리러 옆집을 찾아온 엄마는 할 말을 잃었을 거다. 쥐 파먹은 것처럼 잘려나간 옆집 꼬마 아이 옆, 한 손에 가위를 들고 멀뚱멀뚱 엄마를 쳐다보고 있는 딸, 애한테 화를 내지도 소리를 치지도 못하고 속이 상해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옆집 사람에게. 엄마는 무슨 심정으로 어떤 말을 건넸을까.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너무나 엄마한테 미안해서.

이유 없이 남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했던 나의 부모. 난 그렇게 널 키우지 않았는데 넌 누굴 닮아서 그렇게 개구쟁이니. 머리를 조아려야 했고 사과를 해야 했고 연신 고개를 숙여야 했던 엄마와 아빠.

그러니 "이쁘고 싸게"라는 그 타당한 말을 들었을 때 내게 거부할 권리는 없다. 앞으로도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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