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디에 떠난 일본 출장
한국에서도 웬만한 지자체는 당일 인터뷰를 요청하기 힘들다. 정말 운 좋게 담당자의 일정이 비어있거나 마침 지차제에서 협조적인 분야의 아이템이거나 담당과장이 언론에 매우 우호적인 사람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예의가 아니다. 전화로 인터뷰를 받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얼굴 노출 인터뷰나 사전 취재로 하는 방문은 어렵다. 아무리 공익을 위한 보도물이라고 해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지켜져야 할 예의다.
최대한 그 예의라는 걸 지키고 싶지만 불가피하게 당일 촬영이 발생하기도 한다. 단발성 기사라면 불가피하다. 하지만 기획성 기사를, 한국도 아닌 일본에서 시도할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사실 시도하고 싶어서 시도했던 건 아니었다. 포항에서 지진이 발생했을 때, 일본의 지진방지 대책을 같이 취재하다가 벌어진 일이었다. 고베에 큰 지진이 났었잖아. 가면 뭐라도 나오지 않겠니? 누군가의 한 마디에 비행기 티켓 끊고 날아간 1박 2일 출장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손에 식은땀 난다. 아, 정말 막막했다. 시청은 오후 다섯 시 반이 지나면 들어갈 수도 없다. 다섯 시에는 도착해야 사정을 설명하고 1분이라도 인터뷰를 딸 수 있다. 다음날은 휴일이었으니 말 그대로 정면돌파였다. 늦은 오후 도착한 고베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산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 택시 타고 고베시청에 도착하니 다섯 시. 서둘러 입구를 찾아 들어갔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옷의 물기를 짜내며 문을 두들겼다.
이 시간에 누가 무슨 일로 찾아오셨을까? 정도의 표정을 담은 여직원이 나왔다. 앞머리가 젖어 찰떡이 된 날 보더니 놀란다. 안녕하세요, 굉장히 당황스러우시겠지만 한국 방송국에서 나왔는데요. 용건을 말하니 더 놀란다. 기껏해야 우산 빌려달라는 시민인 줄 알았겠지. 뒤따라 도착한 카메라맨을 보자 거의 경기를 일으킬듯한 표정이다. 뒤따라 나온 남직원이 한 마디 덧붙였다. "한국은 원래 이런 식으로 취재해요?"
자존심이고 뭐고 정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할 말이 없었다. 나도 안다. 누군들 이렇게 오고 싶었겠나. 허나 어떻게든 만들어가야 하니 사정했다. 1분만 회의를 해보겠단다. 정확히 1분 뒤 그들은 우리를 자리로 안내하며 '어쩔 수 없으니' 촬영에 응하겠다고 못을 박았다. 하지만 그들이 그때부터 보여준 건 '어쩔 수 없는 것' 치고는 열과 성을 다한 응대였다. 지진경보시스템, 지자체별 연계 시스템, 각 지역 대피소, 안내멘트, 관할 대피소 지도, 고베 지진과 관련된 자료들까지. 그만 보여줘도 된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를 정도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촬영을 시작한 지 두 시간이 되어갈 무렵 안내를 담당했던 직원이 묻는다. "더 궁금하신 게 있으실까요?" 궁금한 게 있다고 하면 정말 더 알려줄 것 같아 되려 무서워졌다. 실례가 많았다, 많은 도움받았다. 수차례 인사를 건네고 시청을 나섰다.
역대급으로 맨땅에 헤딩했던 막무가내 취재였다. 사전에 요청했다면 훨씬 깊이 있는 내용을 고퀄리티로 만들어낼 수 있었겠지만, 당일 섭외 요청에도 흔쾌히 응해준 사람들 덕분에 1박 2일 촬영하고 총 세 편의 보도물을 만들어낼 정도로 그림이 풍부했다. 맨 땅에 헤딩이 일본에서 통할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