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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롱지다 Sep 30. 2023

종갓집 장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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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봉사(奉祀)를 지내는 종갓집 장녀다. 아니 장녀였다. 명절이 되면 회사든 동네든 이번 명절은 어떻게 보낼 건지 얼마나 장을 보고 얼마큼 음식을 장만할지 궁금해하며 술렁인다. 서로의 형편이 비슷하면 동질의 감정을 나누며 잠시 위안을 얻지만 긴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거나 이번 명절은 친정에서 보내기로 했다는 감히 상상도 못 할 일정을 들으면 이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 나는 어느 해 새해첫날 시어머니와 크게 대립한 이후 더 이상 명절음식을 하지 않는다. 그 사건은 결혼생활 최대 위기를 초래했고 이혼을 눈앞에 두고 돌아서길 수없이 반복하게 만들었다.


4대 봉사라 함은 아버지를 기준으로 고조할아버지/할머니, 증조할아버지/할머니, 할아버지/할머니, 아버지 4대에 이르는 기제사를 이른다. 우리 집은 명절 차례 2번, 4대에 이르는 기제사 7번, 그리고 고조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의 두 번째 할머니 기제사 2번(이 제사는 엄마가 친척들을 아우르기 위해 자처한 제사다), 도합 열한 번의 제사를 지낸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의 기일들은 히필 모두 겨울에 몰려있다. 가을이 끝날 무렵 시작된 길고 긴 제사의 행렬은 이듬해 4월이 되어서야 끝이 난다.


음력으로 세는 기제사는 2~3일마다 돌아올 때도 많고 12월에 있는 내 생일과 자주 겹쳐 나는 가족들로부터 내 생일을 축하받은 기억이 거의 없다. 그래서였을까 엄마는 아직도 내 생일을 잊어버리기 일쑤다. 또 이 시기엔 우리 삼 남매에겐 특별한 임무가 떨어진다. 3일이 멀다 하고 지내는 제사 때문에 집안 구석구석 스며든 기름내로 역겨운데 냉장고 칸칸이 넘쳐나는 제사음식을 먹어치워야 하는 일이다. 가장 고역인 건 그 기간 동안 외부음식은 절대 먹을 수 없다는 엄마의 엄포였다. 우리 집은 이 많은 제사를 지낼 만큼 넉넉지 않았으므로 절약이 당연한 수순이다. 안동의 헛제삿밥이 지역명물이라던데 그게 왜 먹고 싶은지 지금도 나는 도통 이해할 수 없다.


강산이 바뀔 때마다 시대 흐름에 맞춰 종손인 아버지는 엄마와 긴 상의 끝에 3대 봉사로 줄이고 할아버지 할머니 제사는 따로 하지 않고 할아버지들 기일에 같이 하는 걸로 합의하셨다. 물론 아버지는 줄일 생각이 없으셨던 것 같다. 종손의 무게는 아버지 인생을 관통하며 더 좋은 직장,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걸 포기할 만큼 아버지에게 아주 큰 의미니까. 그럼에도 줄여야겠다 결심하신 데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한테 누가 시집오겠냐며 매스컴과 두 딸, 친척들이 제사 때마다 한 마디씩 하는 바람에 가능했다.


결혼 전 그러니까 27살까지 장녀인 나는 제사준비에 이미 도가 텄다. 제사가 시작되는 계절이 돌아오면 연애도 중단해야 할 만큼 엄중히 엄마와 제사준비에 돌입한다. 나와 내 여동생은 제사준비와 뒷정리에 수년간 합을 맞춘 엄마의 든든한 최정예부대다. 수도 없이 엄마의 잔소리를 받아낸 눈물겨운 결과였다. 제삿날 아침이 되면 전전날부터 엄마와 최정예부대가 준비해 놓은, 가지런히 밑손질된 재료들이 채반과 신문지에 담겨 부엌과 거실 가득 펼쳐져 있다. 오전 10시부터 작은 엄마와 세 분의 오촌 숙모들이 하나 둘 도착해 손윗순서대로 나물을 데치고 쉬운 전부터 지지기 시작한다. 숙모들은 마주 앉아 색색의 전을 구워내며 남편 흉을 보고 아이들 교육을 상의하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 꽃을 피웠다.


그동안 엄마와 최정예부대는 숙모들이 조금이라도 덜 불편하도록 틈틈이 간식과 차를 내어주고 맛난 점심을 준비했다. 혹자는 제사준비 중에 전 부치는 일이 가장 힘들다 말하지만 엄마와 우리가 보기엔 그건 앉아서 편하게 할 수 있는 일에 불과했다. 숙모들이 전을 부치는 동안 엄마는 집안팎을 왔다 갔다 하며 생선을 굽고 갈비찜을 하고 쉴 새 없이 나오는 설거지를 하셨다. 최정예부대는 어린 사촌 또는 육촌 동생들이 엄마를 찾으면 숙모들을 대신하여 숙모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 전을 부치거나 보모가 되어 어린 동생들이 엄마를 찾지 않도록 어르고 달래며 놀아주었다. 저녁 7시가 되면 적게는 20여 분 많게는 30여 분의 친척들이 삼삼오오 몰려온다. 제사가 끝나면 마치 기다렸다는 듯 거하게 한상차림이 나온다. 친척들은 잘 훈련된 여는 뷔페식당 종업원을 대하듯 우리에게 덕담을 건네고 간장을 달라, 물을 달라, 나물을 더 달라, 김치를 더 달라, 커피를 달라 등의 주문을 했다. 우리는 호스트로서 그 주문에 토 달지 않고 즉각 대령하는 게 당연한 줄 알았다. 오히려 뿌듯함까지 느꼈다.  


새벽 1시였던 제사시간이 저녁 9시로 바뀌었다. 아버지가 현실과 타협한 두 번째 결정이었다. 제사가 끝난 후 뒤늦은 저녁을 허겁지겁 드시고 나면 친척들은 다음날 회사출근을 이유로 서둘러 일어났다. 물론 숙모들은 뒷정리를 하고 가겠다고 싱크대로 달려가지만 우리는 어서 가시라고 전과 과일을 봉지마다 담아서 숙모들 손에 들려드렸다. 친척들이 모두 떠나고 난 자리는 그야말로 눈앞이 깜깜 할 지경이다. 어느 것 하나 제자리에 있는 것이 없다. 기름기 진득한 놋제기와 나무제기가 부엌 한쪽을 막고 있고, 그 앞으론 2개의 긴 교자상이 불과 한 시간 전 한상차림의 위풍은 오간 데 없이 초라한 몰골로 빨리 치워라 외치고 있다. 아버지, 엄마, 우리 삼 남매는 '이제 진짜 일이 시작이지' 결연한 마음을 다졌다. 아버지와 남동생은 병풍을 걷고 거실과 방들을 청소했다. 엄마와 최정예부대는 말 한마디 없어도 부엌 내 각자의 자리에 위치했다. 엄마가 음식물 쓰레기를 모으고, 손대지 않은 음식들을 크고 작은 반찬통에 담는 동안 나와 여동생은 손발을 맞추어 엄마와 아버지, 남동생이 집안 곳곳에서 찾아온 설거지 거리들을 가져오면 여동생은 거품을 내고 나는 헹구며 기나긴 제사의 끝을 달렸다. 응당한 대가는 장손이라는 명분밖에 없다. 누군가에겐 명분이 목숨을 걸만큼 소중하다는 걸 안다. 그러나 이 많은 제사를 감당할 만큼 남아도는 체력과 여유로운 형편에 가히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노동의 불합리성은 조금만 이성적으로 따져봐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어느 누구도 이러한 행사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아빠처럼 엄마도 종손 집안의 딸이다. 어릴 때부터 종부인 외할머니의 일사불란한 지휘를 따르며 일가친척들이 집안에 대한 자부심과 연대감에 도취된 풍경에 익숙했던 엄마는 결혼 후 엄마만의 종가 문화를 만들어냈다. 손이 귀한 집안의 단결을 도모하기 위해 육촌을 넘어 팔촌까지 아울렀다. 게다가 두 번째 할머니의 제사를 챙기면서 그들의 자손들도 당당하게 제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초대하였다. 엄마 말씀에 따르면 누구든 일정 나이가 되면 자신의 뿌리를 찾고 싶어 한다고 한다. 그런 그들이 찾아오면 엄마와 아버지는 언제든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하셨다. 엄마는 공감능력이 뛰어나셨다. 누구에게나 상냥했고 힘든 내색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으셨다. 한 번이라도 제사에 온 먼 친척들은 계속 찾아왔다. 그들이 잘 먹고 간다며 일어서면 엄마는 얼른 달려가 늘 넉넉한 차비를 바지주머니에 찔러주었다. 결국 문제 제기는 당사자만이 할 수 있는데 당사자인 엄마는 집안의 연대를 높이는, 전통을 지키는 명분에 당신의 가치를 모두 일임했으니 어느 누구도 입을 열 수 없었다.




숙모들은 종종 내게 말씀하셨다. 결혼 전에 이렇게 일을 많이 하면 결혼 후엔 손에 물 한 번 안 묻히고 살 거라며 위로를 하셨는데... 정말 미안하게도 나는 아무 행사도 없는 집으로 시집을 갔다. 나의 시댁은 정말이지 아무 일이 없다. 그러나 반전이 있다. 자식사랑이 지극하신 어머님은 주말마다 만나는 아들인데도 명절을 손꼽아 기다리셨다. 엄마의 제사준비 이상으로 최고급 재료를 찾아 장을 보시고 몇 날 며칠을 명절 내내 아들을 먹일 생각에 들떠 밤새는 줄 모르고 음식을 준비하신다. 파김치, 열무김치, 물김치, 간장게장, 양념게장, 갈비찜, 육개장, 연포탕, 낙지볶음, 불고기, 갈치조림, 닭볶음탕, 김치찌개, 된장찌개, 잡채, 도라지-고사리-시금치나물, 산적꼬치, 동태 전, 동그랑땡, 새송이버섯 전, 고구마튀김, 밑반찬 대여섯 가지를 준비하시고 매 끼마다 또 다른 새로운 음식을 만들어 내어놓으신다.


어머님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자 남편도 명절이 시작되기도 전에 시댁 갈 준비를 당연하게 생각했다. 30분 거리의 시댁을 가면서 나는 최소 3박 4일,  4박 5일 치 짐을 쌌다. 그리고 사육당했다. 밥-간식-밥-간식-밥-간식의 무한 루프 속에서 당신 아들을 위해 어머니를 보조하며 밥 차리는 무수리역에 당첨된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강제로 시키신 일도 아니었고 언제든 집에 가서 쉬다 다시 가도 되었는데... 아무 데도 가지 말라는 시댁과 남편이 주는 무언의 압박은 나를 꼼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늘 북적대는 친정과 달리 아버님, 어버님, 시동생, 남편과 나밖에 없는 단출한 가족이 왜 그리 안쓰러웠는지 친정 행은 자의로 포기했다. 모두가 당연하게 행동하면 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게 공공연한 순리였던 시월드였다.


누군가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어머님이 해놓으신 맛있는 밥을 먹는데 무슨 배부른 소리냐 하겠지만... 대의명분을 위해 가치 있는 노동을 경험한 호스트의 입장에서 시댁에 갈 때마다 그저 내 새끼 맛있는 거 먹이겠다는 일념으로 당신 아들 밖에 보이지 않는 어머님의 심부름꾼, 남편의 보모로 강등된 기분은 꽤 오랫동안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결혼 후 10년이 지나 시동생이 결혼했다. 나와 10살 넘게 차이나는 20대 중반의 동서가 어느 날 심각하게 말을 걸었다.


 "형님은 왜 친정에 안 가세요? 그리고 집도 가까운데 왜 어머님댁에서 주무세요? 어머님이 형님처럼 하라는 식으로 돌려 말하셔서 저 좀 그래요!"


처음 든 생각은 '그렇지. 명절에 친정 가고 별 행사도 없는데 자지 않아도 되는 거 맞지!' 막연하게 불편하다고 느꼈던 부분을 동서가 짚어주니 세상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일을 했던 동서는 명절 연휴가 길어지면 시동생과 함께 친정어머니와 해외여행을 가고 시동생과 싸우면 명절일지라도 시댁에 오지 않았다. 어머님이 반찬을 해서 가겠다고 아무 때나 연락을 하면 경비실에 맡겨 달라고 했다. 처음엔 참 그렇다 했는데 어머님과 아버님 취향에 딱 맞는 선물을 하거나 때때마다 빵이나 케이크를 구워 드리기도 하고, 종종 어머님을 모시고 단둘이 외식도 한다. 또 어머님이 챙겨주시는 모든 것을 거절하지 않고 감사히 받아간다. 할 수 있는 건 제대로 시원하게 하고, 할 수 없는 건 단호하게 못한다 말한다. 그런 동서가 들어오고 나서 나도 조금씩 해방되었다. 명절엔 나는 전을, 동서는 고기를 담당하고 명절 당일 날 온 가족이 모여 점심 또는 저녁 한 끼 같이 하는 걸로 규칙을 만들었다. 아울러 어머님 생신은 우리가, 아버님 생신은 동서네가 준비하기로 했다.


이 합리적인 규칙은 모두를 만족시켰지만 어머님은 내심 쭉 불편하셨던 모양이다.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다 어느 해 새해날 그 일이 터져버렸다. 추석과 새해에는 어머님이 늘 하시던 전 5가지를 해갔는데 처음 두어 번은 덕분에 편해졌다 좋아하시더니 그다음부터는 어머님도 똑같이 전을 해놓고 기다리셨다. 참고로 나 역시 어머님만큼 맛있게 전을 잘 부친다. 내가 해온 전은 펼치지도 않고 어머님이 하신 전을 상에 올리기 시작하시더니 아주 좋은 고기로 전을 부쳤으니 맛이 좋을 거라며 가족들 숟가락마다 얹어 주셨다.


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건 더 이상 전을 하지 말라는 암묵적인 지침인 것 같아 명절엔 전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다음 새해날 온 가족이 모여 점심을 먹던 중 어머님은 내게 '네가 전을 해오지 않아 내가 하느라 너무 힘들었다. 다음 추석엔 전도 나물도 다른 음식들도 다 해오라.'며 역정을 내셨다. 나는 전을 부쳐도 어머님이 다 해놓으셔서 하지 않았던 거고, 이제 일을 시작해서 음식장만이 쉽지 않으니 원하시면 사 오겠다고 말씀드렸다.


"꼴랑 200 버는 주제에 유세는..."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들고 있던 숟가락 내려놓고,


 "어머니 참 너무 하시네요!"


고작 이 한마디를 외치고 방으로 들어왔는데 끓어오르는 속상함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남편은 전후 사정도 들어보지 않고 어머님께 대드는 꼴은 못 보겠다 화를 내고, 어머님은 시아버지와 남편, 시동생에게 영문도 모르고 피해를 당한 사람처럼 어머님 입장에서 억울한 상황만 설명했다. 어머니가 말씀하신 '꼴랑 200 버는 ~' 문장은 어머니 기억에 이미 없는 말이 되어 버렸다.


몇 주일 후 그 자리에 같이 있었던 동서에게 그때의 상황을 확인하신 어머님은 정식으로 내게 사과를 하셨다. 어머님과 마음을 풀었다는 소식에 그제야 화를 거둔 남편을 보자 이 남자의 엄마 사랑을 인정하지 않는 한 우리는 한 길을 걷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아주 먼 길을 돌아온 듯한 시간이 흐르고 내가 남편을 더 사랑하니 남편과 어머님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대신 더 이상 살가운 관계를 지향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내 연봉이 많이 올랐다는 이야기도 절대 하지 않기로 했다.


어머님은 여전히 명절마다 음식을 장만하신다. 힘들어 죽겠다고 하시면 도와드리지 못해 죄송하다고 말씀드린다. 음식값의 절반비용을 현금으로 챙겨드리며 어머님 덕분에 정말 맛있는 걸 원 없이 먹는다고 칭찬과 감사함을 담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어제도 어김없이 돌아오는 추석이다. 12시쯤 오라고 하셔서 시댁에 도착하니 말끔히 정리된 부엌에 크고 넓은 냄비마다 가득가득 채워진 음식들이 데우기만 하면 곧 식탁으로 달려갈 태세였다. 올해는 특히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많아 명절 연휴가 시작되자마자 몸살이 났다. 어머님이 차려준 점심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나니 달리 할 일이 없었다. 소파에 길게 누워 남편과 네플릭스 드라마 '도적'을 보다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어머님께서 이불을 덮어주시며 이마에 손을 대셨다. 그러다 자연스레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나누었다. 80이 다 되어가는 어머님 친구분들이 많이 아프시다는 말씀에 덜컥 겁이 났다. 자세를 고쳐 앉고서 어머님 건강에 대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탐문하고 이상이 있는지 어머님 몸 여기저기를 만져가며 확인했다. 문득 이 만큼 사신 어머님의 꿈은 무엇이었는지 어느 누구도 묻지 않는, 아들조차 궁금해하지 않는 어머님의 꿈을 여쭈었다.


"응... 난 진짜 공부만 하고 싶었어! 공부만 할 수 있다면 좋겠어"


그러고선 왜 공부를 못하게 되었는지 지난 80년 인생을, 과거와 현재를 두서없이 오가는 이야기를 저녁시간이 될 때까지 들었다. 이야기 말미에 친정엄마랑은 통화하냐고 물으셨다. 잘 안 한다고 했더니 그럼 못 쓴다며 눈을 흘기시는데 반가운 표정이다.


거짓말이다. 추석전날 엄마랑 통화했다. 남동생네가 수요일 저녁부터 일요일까지 내려와 있는다고 좋아하셨다. 예전만큼 손님들이 안 와서(다들 돌아가셨다) 덜 분답스러울 것 같다고 하시는데 왠지 쓸쓸한 느낌이다. 올케가 우리 최정예부대만큼 일을 잘하지 못하지만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도 하셨다. 70을 넘긴 엄마는 몸이 힘들어도 정성스럽게 음식을 준비해 놓고 여전히 누구든 자꾸만 찾아오기를 기다리신다. '전통을 지키는 일은 참 좋은 것 같다'며 올케에게 말할 수 없는 속내를 내게 다짐하듯 속삭이셨다. 나는 속으로 말한다.


'엄마... 그건 엄마가 살아온 세상이 엄마를 가스라이팅한 거야!"


추석선물로 올케에게 넉넉히 입금해야겠다.   

 

   


난 가끔 어릴 적 명절 풍경을 생각한다. 명절 전날은 밤새도록 불을 끄지 않는다. 깜깜한 어둠을 무서워하던 나는 명절 전날 환한 밤과 새벽을 좋아했다. 새벽 5시쯤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면 엄마는 삼 남매 눈앞에 한복을 내미신다. 키가 클 때마다 새로이 장만해 주시는 한복을 입고 나와 여동생은 집 앞 놀이터에서 그네를 탔다. 두 다리를 구부려 앞뒤로 힘차게 그네를 움직이면 치렁치렁한 한복 치마가 내 몸을 감싸다 퍼져 버리는 참에 느껴지는 시원한 기분이 참 좋았다. 엄마가 아파트 베란다에서 '어서 들어와 손님 맞을 준비를 해야지!' 하는 의미의 손짓을 하면 우리는 당연한 듯 각자의 자리로 뛰어간다. 엄마와 달리 거기엔 어떤 의미도 어떤 가치도 없다. 그저 엄마를 도울 수 있는 일이면 되었다.


어머님도 마찬가지다. 이랬다 저랬다 하는 어머님의 태도는 어떤 연유에서 기인한 건지 더 연구해 봐야 알 테지만... 지금까지 파악한 어머님은 영원히 돌보아 줄 내 새끼가 필요했던 것 같다. 그 대상에게 원 없이 사랑을 주고 아낌없는 칭찬과 인정을 받으면 그게 바로 어머님이 세상을 사는 의미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내 새끼 카테고리 안에 들어가면 어느 누구라도 어머니의 진심 어린 사랑을 온전히 받을 수 있으니… 나는 기꺼이 어머님께 반찬을 해달라 조르고, 아프다며 징징거릴 것이다. 독립적인 성향이 강한 내가 가장 못하는 일이라 많은 연습이 필요하겠지만.


그럼 내년이면 50인 나의 의미는 어디에 있냐고?

하하! 이 두 분이 평생도록 지켜온 세상을 사는 의미에 맞서지 않고 나도 편안한 생을 살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내가 세상을 사는 의미라고 말한다면 답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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