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아니 에르노, 단순한 열정
이혼 연습
늘 마음속에 품고 있는 낱말입니다.
잘 정돈된 거실 한가운데서 갈길을 잠시 잃는 듯 서있었던 날도 그랬고, 십여 년을 벼르고 산 대용량의 드럼세탁기 앞에 쪼그리고 앉아 열 일하는 세탁기를 마냥 지켜볼 때도 그랬습니다. 그와 아이들이 해맑게 웃는 소리도 곧 사라질 그림일 것만 같아 마음에 새기던 습관도 그 때문이었지요. 잠시 친구와 수다를 떨다가도, 친정엄마와 통화하다가도 그것은 불쑥 마음 서랍을 밀어내고 튀어나왔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평범'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들의 '평범'에 걸맞은 삶의 방향과 매번 어긋나는 마음을 품고 사는 나는 참 불편한 사람입니다.
어떻게 시작될지 예측할 수 없겠지만 우선 집을 구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친정으로는 가지 않기로 했습니다. 매달 입금되는 수입을 고려하여 한달살이가 가능한지 시간을 들여 가늠해보았습니다. 대략 60만 원의 관리비를 포함한 월세, 그리고 핸드폰 요금, 보험료 등으로 30만 원의 고정지출이 예상됩니다. 식비를 포함한 생활비 60만 원, 그리고 남는 돈으로 얼마간의 저축이 가능할 것 같았습니다. 살아가다 보면 조금 더 짜임새 있는 경제관념이 생기겠지요.
간혹 회의 참석을 위해 가야 하는 합정역 근처의 사무실과 글 쓰는 모임이 있는 강남역, 지방 출장이나 친정으로 언제든 갈 수 있는 상황을 고려하면 지하철과 연계된 srt나 ktx역 근처가 적당해 보였습니다. 대개 역 근처에는 편의시설도 잘 되어 있을 테고 그러면 아무리 작은 방이라도 덜 아쉬울 것만 같았습니다. 핸드폰으로 지도를 검색하고 난생처음 '다방'이라는 앱도 깔았습니다.
낯설지만 '광명역'이 좋겠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역 주변으로 꽤 괜찮아 보이는 매물들이 있었고, 도보로 가능한 거리에 '이케아'나 '롯데 프리미엄 아웃렛'이 있어 윈도쇼핑으로 산책으로 홀로 지내는 시간들을 잘 버터낼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지금 나의 방은 광명 ktx역과 이케아 중간 지점에 위치한 오피스텔 8층에 있습니다.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60만 원으로 계약한 화장실과 작은 주방이 딸린 원룸은 약간은 서늘하고 조금은 아늑합니다. 작년에 재미 삼아 카카오 뱅크 26주 적금을 들었다가 약 400만 원 정도를 모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매년 소소한 목돈을 모아 평소엔 촌스럽다며 거들떠보지 않던 명품백을 살 수도 있겠다고 호기를 부리던 날들도 있었지요. 그러다 얼마 전 혹시 혼자 살지 않아도 될 것만 같아 어쩌다 눈에 담은 보석 박힌 명품백을 덜컥 사버리고 말았습니다. 꿋꿋이 후회하지 않도록 마음을 잘 동여매고 보증금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습니다. 아이들 이름으로 매달 조금씩 저축했던 통장에서 모자라는 돈을 마련하였습니다. 당분간은 별다른 인테리어는 꿈도 못 꾸게 되었습니다. 나의 짐은 1인용 매트리스와 침구류, 사계절 옷가지, 장신구, 노트북, 블루투스 스피커, 책, 보험증서, 여권, 통장과 인감, 작은 밥상, 1인용 밥솥, 몇 개의 그릇들입니다. 며칠은 이 작은 짐들도 정리란 걸 해야 해서 정신이 없었습니다.
하루의 일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깨워야 할 사람도 챙겨야 할 사람도 없으므로 더 이른 시간에 눈을 뜹니다. 좋아하는 머그컵에 조제커피를 연하게 타서 창밖을 바라봅니다. 회사 일이 시작되는 시간에 맞춰 노트북을 열고 권 과장의 카톡을 기다립니다. 30분 정도 네이버 뉴스를 보며 기다리다 연락이 없으면 쓰다만 글들을 훑어봅니다. 그날의 기분에 따라 선택된 글감에 살을 붙이고 다듬고 녹음을 합니다. 따뜻한 물을 수시로 보충하는 바람에 말갛게 색만 겨우 남아있는 커피를 마시면서 녹음을 재생합니다. 감정의 기복에 비해 차분하고 졸린 듯한 나의 목소리에 취해 스르르 잠이 듭니다.
아무리 어려워진 경제 상황이어도 포기할 수 없는 '브리치즈'를 곁들인 사과 반쪽과 토스트 한 조각을 점심으로 준비합니다. 멜론 DJ가 추천한 빈티지 재즈가 흐르는 가운데 단출한 식사가 끝나면 회색의 후드티와 세트인 조거 바지를 입고 그이가 썼던 야구모자를 챙겨 이케아로 산책 겸 운동을 갑니다. 얼마나 자주 가면 이케아가 시시해질지 궁금해서 이 최고의 산책코스를 따라 매일 걸을 겁니다. 그다음은 롯데 프리미엄 아웃렛이 되겠지요. 돌아오는 길에 맘에 드는 카페가 눈에 띄더라도 나는 참을 겁니다. 갑자기 일감이 카톡과 메일과 전화로 쏟아지면 샤워를 하고 잠시 눈을 붙입니다. 미리 저녁거리를 생각해놓고 일감의 규모에 따라 소요되는 시간을 역으로 계산해 분단위로 계획을 짭니다. 항상 하루 5시간 일하리라는 원칙을 세우지만 실상은 막판까지 미적거리다 밤을 새웁니다. 이번 일 역시 하루 이틀 바짝 일하고 나머지 3~4일은 노는 듯 쉬는 듯 보낼 것 같습니다.
틈틈이 아이들이 너무 보고 싶습니다. 다 큰 아이들은 내가 곁에 없어도 엄마의 사랑을 굳게 믿고 있을 테니 괜찮을 겁니다. 그래도 언젠가 방 하나가 더 있는 집으로 옮기게 된다면 그때는 아이들과 같이 살 수 있기를 욕심내 봅니다.
더 이상의 삶은 상상이 안됩니다.
이 시간에 누군가는 사랑에 잠 못 들고 나는 이별을 연습하며 밤을 보냅니다. 평범한 삶에는 이유를 묻지 않지만 벗어난 삶에는 납득할 만한 설명을 기대합니다.
굳이 그래야 한다면 나는 최선을 다해 사랑을 했고 누구든 부러워할 만한 사랑도 충분히 받았습니다. 행복한 가족사진에 걸맞은 생각과 행동들을 당연한 듯 잘도 버터 내 왔습니다. 다만 원망도 아쉬움도 일절 남지 않은 제로섬의 시간이 오면 홀연히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마음이 형체를 드러낸 것뿐입니다.
[회신] 00님께
틈틈이 당신의 글을 들여다봅니다. 어쩌면 다른 글들처럼 이미 소멸했어야 했는데도 나는 자꾸만 꺼내 읽습니다. 당신이 이 글을 쓰던 날의 모든 것이 떠오름니다. 작은 방 한가운데 앉아 푸르스름한 탁상용 스탠드 불빛 아래서 한 자 한 자 상상너머의 일상을 적어 내려가고 있었지요. 감정이란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는 단호한 눈빛에 좀 놀라기도 했습니다. 실은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 이란 책을 읽고 청개구리 같은 마음이 들어 이 글을 쓴다고 했지요. 책의 여운이 사라지는 속도만큼 당신의 글은 빠르게 내 삶 속 깊이 뿌리를 내렸습니다.
남편은 당신이 괜찮아진 줄 압니다. 사람들은 권태기라 칭하고 갱년기라는 말로 당신을 위로하려 했지요.
당신이 굳이 독후 형식을 빌어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나는 압니다.
우연히 서점에서 만난 '선량한 차별주의자'란 책 제목에 끌려 단숨에 읽어버린 산문 중 한 문장,
무심과 무지에 기인한 선량한 이들의 악함!
이 아이러니한 문장을 마주한 순간 당신은 알아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동안 당신이 멋모르고 내뿜었을 악함과 동시에 선량함이 전제된 사람들의 그것으로부터 충분히 상처받아왔음을요. 당신은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이유도 모른 채 상처를 주고받는 관계를 지속하고 싶지 않았을 겁니다.
글을 쓰고 난 후 당신은 며칠 동안 잠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상상으로 지어진 오피스텔 8층에서 단조로운 삶을 누리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방황은 실현되지 않는 글을 수천번 읽고 나서야 끝이 났습니다.
나는 당신이 정말 괜찮은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언제든 펄펄 날뛰는 활어처럼 상처는 느닷없이 튀어 오를 테고 그때마다 당신은 당황할 것입니다. 또 언제든 당신이 내뿜은 악함에 몸서리치며 이불속으로 사라져 버릴 수도 있겠지요. 그럼에도 시간은 흐르고 당신은 살아갑니다. 순식간에 지나온 삶은 예측할 수 없는 많은 이야기를 품고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시간들이 온몸을 덧칠하고 물들이며 지금의 당신 모습을 만들었습니다. 당신은 짊어져야 할 짐들은 단 한 번도 내려놓지 않았고 곱게 보듬어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그거면 되었습니다.
이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나는 쭉 당신을 좋아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좋아한다는 카테고리에 보호라는 서랍은 없었나 봅니다. 나 역시 긴 시간 영문도 모른 채 방황만 하던 당신을 그냥 지켜만 보았습니다.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당신은 기분이 좋다고 말합니다. 죽을 날이 하루 더 가까워졌다고. 지인은 평균수명이 길어져 아직도 100년은 남았다고 놀립니다. 아직은 희망조차 품을 수 없는 상황이겠지만 당신에게도 숨죽이고 쪼그라진 크고 작은 희망들이 현실이 되는... 그런 날이 꼭 오리라 믿습니다.
언젠가 아침 햇살은 없는 희망도 샘솟게 한다고 했었죠. 오늘 아침도 그렇게 시작하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