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애정 하는 하나의 표현 방식
나도 사람인지라 자궁 근종 제거술을 받고 식습관과 생활 습관이 해이해졌다. 건강한 식습관이 얼만큼 건강에 중요한지 자궁 근종이란 녀석으로 경험해놓고도 마치 가랑비에 옷이 젖듯 술을 조금씩 다시 마시기 시작했고 (하지만 여전히 알코올 쓰레기라는 점) 인스턴트로 식사 같지 않은 식사를 하는 비중이 늘었다. 펄펄 끓는 것들에 뜨겁게 데어놓고도 편리함이란 유혹에 이끌려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는 나였다. 그것들에게서 멀리 도망친다고 도망쳤지만 출발 지점과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인간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나는 다시 스스로와 거리두기를 해야 할 국면을 마주했다. 주기적으로 내가 무얼 먹는지, 무엇을 생각하는지, 무엇을 사는지, 무엇을 바라보는지 관찰하는 자기 객관화의 필요성은 내가 하염없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이기 때문에 나는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기대 수명 100세 시대에 남은 인생이 70년이라면 나는 겨우 1/3 왔다. 실수는 당연히 벌어질 수밖에 없다. 한 끗 차이로 메긴 순위에 밀려나지 않기 위해 아둥버둥했던 예전의 나 같으면 '나는 왜 이럴까?' 자괴감에 빠졌을 테다. 그 세상에서, 실패와 실수라고 명명하는 기준이 분명한 그 세상에서 벗어나기로 다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니 이제는 면역력이라고 불릴만한 멧집이 길러졌다. 자궁 근종 덕분이겠지.
나는 요즘 무얼 먹고 사는가. 음식을 먹는다는 행위는 무얼 의미하나. 다시 이해의 터널을 진입할 때이다. 건강한 습관의 중요성을 깨달았던 그 때의 단상을 떠올려 본다. 단순히 하나의 결론, 하나의 이론으로 마무리되지는 않겠으나 오늘의 나에게 음식은 스스로를 애정 하는 마음, 그 마음의 표현이다. 궁극적으로 향해가는 죽음을 건강하게 맞이하기 위해서는 젊음이란 그늘에서 쉬는 시간이 끝나도 건강하게 움직일 수 있는 몸, 남편과 말년에도 두 다리 튼튼하게 여행할 수 있는 여유 같은 것들이 필요하다. 그 시작점은 역시나 음식이고 건강한 식습관의 필요한 이유다.
엄마와 벼르고 벼르다 방문한 오리탕집에서도 그랬다. 정성스럽게 찢은 오릿살과 죽이 마치 탕처럼 뚝배기에 담겨 나왔다. 간 깨와 흑임자, 검은깨 듬뿍, 녹각 한 조각, 능이버섯과 석이버섯. 그것들이 온데 어우러져 뜨거운 열기를 뿜었다. 보기만해도 건강해진다. 그 전날 저녁 대용으로 먹었던 피자 한 조각이 무색했다.
자극은 더 큰 자극을 부른다. 자극과 나 사이의 줄다리기. 본능과 이성 사이에서 식탁 위에 놓아질 '어떤' 음식들은 무슨 흐름을 가지는가. 내일의 나의 식탁은 어떠한 모습이려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