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처음으로 '안녕'이라고 말한 순간부터
4월 어느 날, 회사 창립기념일이다.
오랜만에 평일에 쉰다. 달콤하다. 날씨까지 좋다. 아침 일찍 일어나 아내와 수원화성에 갔다. 자주 방문하는 곳이지만 매번 새롭다.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자연을 감상하고 사람을 구경하고. 이 루틴은 우리 부부의 행복 필살기 중 하나다.
만족스러운 데이트를 끝내고 집으로 가는 길, 스파 브랜드 매장에 들렀다. 아내의 안목으로 분홍색 맨투맨 티셔츠를 획득했다. '우와. 이거 며칠 전에 핀 벚꽃과 똑같은 색이잖아!' 당장이라도 뛰어가 우리 마을 벚나무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이렇게 말할 생각이었다.
"이거 봐, 나 옷 샀어. 너랑 똑같은 색이야!"
이유가 있었다. 오래전부터 벚나무와 친구하고 싶었지만, '단 하나의 공통점도 없는 나를 친구로 봐줄까?' 늘 이 의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공통분모를 가졌다. 지금은 맞고 그땐 틀리다. 분홍색 맨투맨을 입었으니 이제 그들과 가까워지는 건 식은 죽 먹기다.
들뜬 마음으로 집에 왔다. 아내가 새로 산 옷은 빨고 입어야 한단다. 세탁을 하고 나니 색이 더 예뻐졌다. 기분 좋다. 벌써부터 그들의 일부가 된 것 같다. 옷을 입자마자 친구들에게 달려갔다. 지난번에 연습했듯 그렇게 말하리라. "이거 봐, 나 너랑 똑같은 색이야!"
삽시간에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마을 어귀에 도착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난관에 난 거의 반 공황 상태가 되었다. 파란 하늘 옆에 도열해 있어야 꽃잎들이 이미 사라지고 없던 것이다. 찬란하게 빛나던 분홍 그라데이션은 초록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꽃잎의 일부가 바닥에 있었지만 그마저도 바람에 날려 금세 사라졌다.
같은 색 옷을 입었으니 우리 친구 맞지 않냐고. 아니면 이제부터라도 친구가 될 수 있지 않냐며 막 말하려던 순간이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다니. 울음을 겨우 참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던 게다. 그때 옆에 있던 벚나무가 말했다. 주변의 벚나무들도 집중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울상이야"
자초지종을 말했다. 말 끝마다 "이제 다 끝났어. 이제 다 틀렸어"를 몇 번이고 되풀이했는지 모른다. 내 얘기를 다 듣던 벚나무들은 내 분홍색 옷을 보더니 이제야 이해하겠다는 듯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네가 처음으로 우리에게 진심으로 '안녕'이라고 했던 날, 그때부터 우린 친구였어."
다른 벚나무가 말했다.
"그동안 널 친구가 아니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섭섭하다 야."
가까스로 참았던 눈물이 터지고야 말았다. 난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과 모습이 달라 친구가 되기 어려울거라 생각했어." 벚나무 친구들은 다시 한번 강조했다.
"겉모습은 친구가 되는 데 아무런 조건도, 자격도, 문제도 될 수 없어."
난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날따라 초록색 이파리가, 그 어떤 꽃잎보다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