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에프소드] 13. 아내는 부재중(1)

어렴풋이 아는 건 아는 것이 아니었어. 그냥 어렴풋이었어.

by 알파카

몇몇 좋아하는 단어가 있다. '막상'도 그중 하나이다. 이 단어 뒤에는 긍정도, 부정도 올 수 있는데 나의 경우는 대부분 긍정으로 사용될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어떤 일을 앞두고 지레 겁먹고 있을 때, 막상 하면 별거 아닌 경우가 많았다. 하기 전까지는 잔뜩 얼어 있다가도 모든 게 다 끝난 후 '생각보다 별거 아니네' 툭 내뱉는 쾌감이란. 특히 나처럼 자신감이 부족하고 타인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짜릿하게 다가온다. 그런데 최근에는 '막상' 다음에 뒤따라오는 문장이 부정인 경우가 많아, 내가 좋아하는 단어 리스트에서 삭제할까 고민 중이다.


혼자 생활한 지 20일째. 몇 주 전 장인어르신이 세상을 떠나시고, 아내는 당분간 처가에 남아 장모님을 보필하기로 했다. 내가 처갓집을 홀로 나올 때 아내는 주요 집안일과 지켜야 할 수칙 몇 가지를 당부했다. [응, 걱정하지 말라고, 다 알아서 할 거라고.] 기계처럼 답했다. 사실 귀담아듣지도 않았다.


서당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하물며 10년을 살아오며 집의 희노애락을 경험해 온 나다. 집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일에 관여해 왔으며, 적어도 아내의 어깨너머로 쭉 지켜봐 왔다. 그러니 집안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를 리가. 주의사항, 당부의 말 따위를 듣는 것은 시간낭비, 자존심 상하는 일 정도로 여겼다.


그래서 지금 있냐고? 그랬으면 이 글을 쓰고 있을까. 앞서 언급했던 단어가 나올 차례다.




집안일을 '막상' 해보니 결코 쉽지 않았다. 쉽지 않으면 다행이고 심지어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를 때도 있었다. 평소에는 중간에 막히면 아내로부터 즉각 해결책이 나오니 머릿속에 세세하게 기억할 필요가 없었고, 또는 시원하게 잔소리나 면박 한 번 듣고 나서 지시받은 대로 따르면 될 일이었다. 그러니 어렴풋이 알아도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게 아닌가?' 싶으면 일단 당황스럽다. 특히 음식이 팔팔 끓고 있거나 뭔가를 엎지른 상황에서는 그 조바심과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한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분명히 이렇게 하면 됐어야 하는데?', '뭘 빠뜨린 거지?', '순서가 어떻게 되지?', '그게 어디에 있었지?', '뭘 어떻게 넣어야 하지?', '적당히가 도대체 얼마큼 적당히인 거지?', '지금 타이밍인가?' 그리고 깨닫는다.


'어렴풋이 아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었어. 그건 그냥 어렴풋이었어.'


전화찬스가 있지만 쉽게 쓸 순 없다. 2인자가 1인자에게 물어보는 모양새가 썩 좋진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2인자의 위치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반대로 1인자의 입지더욱 확고히 한다. 그래서 전화연결은 최대한 지양했다. 대신 유튜브를 활용했다. 그 외에는 우격다짐이었다.


무지함과 시행착오는 사람을 겸손케 한다. 모든 일이 자기의 머릿속에 있다며, 그대로 하면 될 뿐이라고 했던 자신감 넘치던 사람은 어디 가고, 중단된 어떤 일 앞에서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한 남자만 있을 뿐이다.




이러한 상황을 체득하며 한 가지를 깨달은 바가 있다. 집은 단순 주거 공간이 아닌 하나의 '소우주'이고 아내는 그 소우주를 관장하는 '신'이었구나. 그녀는 집 안의 만물들이 어떠한 부딪힘, 거스름도 없이 균형적이고 순리대로 흘러가도록 힘과 지혜를 적절하게 사용하고 있었으며, 그 토대 위에 우리 가정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 천체가 공전함에 따라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돌아가듯, 우리 가정의 '의', '식', '주'가 그렇게 돌아가고 있었다. '행복'은 그 순환의 순조로움 속에서 생겨나는 부산물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덜컥 아내가 무서워졌다. 평소에 아내의 분노버튼을 눌러서는 더욱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집에서의 능력은 신에 준하지만 성품은 아직 인간적의 모습이 남아 있어 감정의 기복이 좀 있기 때문이다. 감정적으로는 불안정하지만, 어쨌든 집이라는 소유주를 관장하고 있는 아내에게 새삼 존경심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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