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에프소드] 14. 아내는 부재중(2)

아내의 정수리 냄새를 더 이상 외면하지 않겠다.

by 알파카

아내의 부재는 곧 잔소리의 부재다. 고로 홀로 있는 집은 평안과 안녕만이 가득할 것 같았다. 실제로 한동안은 그랬다. 하지만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아내의 '부재'는 곧 나의 '숙제'였기 때문이다. 살림살이를 해나가며 필수로 해야 하는 여러 집안일들. 그들은 평화와 안식으로 향하는 나의 여정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 관문은 고되고, 까다롭고, 번거롭고, 집요했다.


한 번은 '굳이 그 관문들을 통과할 필요가 있을까? 그냥 안분지족 하며 살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최대한 버티어 보기도 했다. 하지만 육신은 쉬어도 마음이 안절부절못했다. 쉬어도 쉰 것 같지 않았다. 언젠가는 해야 한다는 '부담감'. 당장은 괜찮지만 하지 않은 집안일들이 야기할 '불안감'. 시간이 갈수록 이들은 눈덩이처럼 커져 나를 정신적인 채무자 신분으로 만들었다. 얼마 못 가 집안일의 선행 없이는 온전한 안식을 누릴 수 없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집안일의 회피가 어떠한 결과를 낳게 되는지 호되게 데어본 사람은 안다. 최근 일이다. 새벽에 일어나 부랴부랴 조기축구를 가려는데 빨래를 하지 않은 것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빨래통에서 지난주에 입었던 유니폼을 꺼내는데, 지독한 암모니아 냄새가 코를 찔렀다. 별 수 없어 땀에 절은 유니폼을 입긴 했지만, 인간성을 포기한 것 같은 뭔가 굴욕적이고 수치스러운 기분이었다. '내 다시는 빨래를 미루지 않으리라.' 이러한 일을 몇 번 경험한 후 모든 영역에서 성실하게 집안일에 임하고 있다. 이를 통해 몇 가지 깨달은 바가 있다.




Just Do It

집안일 앞에서는 미련해야 한다. '좀 안 해볼까, 잠깐 미뤄볼까' 잠시 고민하는 순간, 당신은 이미 스스로에게 설득되어 있을 것이다. 이때만큼은 너도나도 뛰어난 달변가가 된다. 적절한 핑계와 좋은 예시가 머릿속에서 화수분처럼 떠올라 어렵지 않게 그렇듯한 명분을 만들어 준다. 적어도 적당한 선에서 타협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경우는 모 보험사 광고처럼 묻지도 따지지 말고 그냥 우직하게 하는 편이 나중에 후회되지 않았다. 이제 보니 나이키의 'Just Do It'은 스포츠보다는 집안일에 더 적합한 슬로건 같다.


총량의 법칙

집안일을 하지 않고 사는 방법 두 가지가 있다. 돈을 아주 많이 벌거나, 살림이 개차반이어도 자족하며 살거나. 그렇지 않으면 누구나 최소한의 집안일을 해야 한다. 그것이 귀찮거나 힘들다고 생각해 본 적 없다면 당신은 상당히 주체성 있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다. 그게 아니라면 누군가가 당신의 일을 대신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가족구성원의 손목과 무릎도가니 상태, 파스의 부착여부를 확인해 보길 추천한다.


관성의 법칙

모든 물체는 현재의 운동상태를 유지하려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데, 집안일도 그렇다. 몸이 움직일 때, 즉 엉덩이를 땅에 붙이고 있지 않을 때 기왕 움직여 끝내는 것이 수월하다. 장을 보고 들어와서 곧장 소파에 눕고 싶은 심정은 이해하나, 발볼을 꼬집어서라도 발걸음을 주방 쪽으로 향하여 그것들을 단번에 정리해야 한다. 식사를 마치고 바로 설거지를 해야 하는 것도 그 이유이다. 쉬었다 다시 움직이는 것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더 큰 에너지가 필요하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어느 날 아무 생각 없이 빨래를 널다가 우연찮게 종류별로 널었다. 구획별로 팬티, 양말, 수건, 셔츠, 바지가 가지런히 오와 열이 맞춰져 있었는데, 마치 국군의 날 열병식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내가 군통수권자 같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 이후에는 무조건 구획마다 종류별로 구분하여 널기 시작했다. 어떤 때는 빨래 바구니에 담긴 순서 때문에 계획처럼 널지 못할 때가 있는데, 군통수권자가 된 기분을 느끼고자 이미 다 널은 빨래를 다시 널기도 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집안일하는데, 이런 재미라도 찾아야 하지 않겠나.


피할 수 있다면 피해라

굳이 할 필요가 없는데 습관적으로 하고 있는 것은 없을까. 다림질에서 그 빈틈을 찾았다. 10월로 접어들면서 긴팔 셔츠를 입는데, 보통은 소매를 걷고 있다. 팔목을 감싸는 느낌이 답답하기도 하고 회사에서는 아무래도 걷고 일하는 게 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셔츠의 팔 부분은 다리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와이셔츠의 칼라, 앞판, 뒤판만 다리니 다림질이 훨씬 수월하고 속도가 붙었다.


집안일이 양치질 같다

빨래는 건조대에 다 널려 있고, 그릇들을 물기가 없는 상태로 수납장 안에 정리되어 있으며, 다음 식사는 무엇을 먹을지, 내일은 무엇을 입고 출근할지 머릿속에 이미 정해져 있을 때, 그때가 진짜 쉬는 타이밍이다. 비로소 진정한 평화, 안식 모드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마치 양치질 같다. 할 때는 그렇게 귀찮을 수가 없는데, 막상 하고 나면 세상에서 이렇게 개운한 것이 없다.




식기세척기, 빨래건조기, 로봇청소기 하나 없이 10년 동안 이 모든 일들을 손수 해온 아내가 존경스럽다. 게다가 단신의 키로 집안일을 하려니 새삼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싱크대 상부장에서 뭐라도 하나 꺼내려면 의자라도 어디서 가져와야 하고, 본인 키보다 훨씬 큰 이불을 베란다로 들고나갈 땐 땅에 끌리지 않게 하기 위해 참 끙끙거렸을 것이다. 하다못해 내가 밀대 걸레로 한 걸음 갈 때 아내는 두 걸음 가야 하니 땀을 두배로 흘렸을 것이다.


가끔 아내가 날 사랑한다면 자기의 정수리 냄새를 맡아보라고 한다. 지금까지는 극구 거절했으나, 이번에 아내의 부재를 통해 집안일의 수고를 안 이상 어찌 외면할 수 있으랴. 단신의 키로 땀을 두 배나 흘렸고 그 때문에 정수리 냄새가 심해진 것이니, 내 기꺼이 맡는 것이 지당하다. 그래. 이왕 맡는 거 쩨쩨하게 킁킁거리지 않겠다. 흠뻑 들이마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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