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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은영 Feb 21. 2024

상처받은 내면을 치유하는 방법

글 쓰고 그림 그리는 여자, 최은영의 개똥철학


언제부터인가 '치유'라는 단어가 참 많이 끌린다.


의학적인 '치료'는 나에게 참 많이 아프고 차갑다.  나는 사람들에게 '치료'보다 '치유'가 훨씬 더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치료'는 물리적인 신체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고 '치유'는 비물리적인 영혼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고 구태여 구분 지어 설명을 해보지만,


그저 내 삶의 기억 저편 언저리에 남겨진 '치유 없는 치료'에 관한 부정적 감정이 내 영혼의 무의식 어딘가에 고스란히 남겨져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함께 떠오른다.


나란 사람이 어쩌다가 '치유'라는 단어에 이끌리게 된 것일까? 상처받은 영혼에게 '치유'는 아픔과 고통을 씻어내어 주는 작업이다. 슬픔을 멎게 해 주어 어둠 속에 머물던 영혼이 빛을 바라보게 해주는 행위이다.


과거 학창 시절 어느 시점...

자신의 진로를 골똘히 고민해야 하는 언젠가 나는 책상 위 놓인 백색의 스탠드 형광등 아래 고개를 파묻은 채 진지하게 내가 원하는 미래를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그 당시 나는 무엇이든 깊이 탐구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기왕이면 그 탐구의 대상이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떠올렸었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누가 알려주지도 않았음에도 

삶에 관한 진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묻고 스스로에게 답한 것이다. 


구체적인 직업이 무엇이건 상관없이 그저 막연하게 사람을 탐구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


그리고 난 후 지나온 내 삶을 돌이켜보면

참 신기하게도 사람을 탐구할 수 있는 구체적인 장면들이 끊임없이 눈앞에 펼쳐졌었다.


십 대 후반에서부터 이십 대 그리고 삼십 대 내내 나는 부모님의 모습을 통해 '병듦'과 '죽음'이 무엇인지에 관해 가슴 절절이 아프고 생생하게 사유할 수밖에 없었다.


또래 친구들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조금 이른 나이에 인간이라는 모든 존재가 마주해야 하는 생의 본질적 고통을 꾀나 오랜 시간에 걸쳐 피할 수 없이 마주해야 했던 것이다.


딸아이를 낳아 기름과 동시에 엄마의 죽음을 마주해야 했던 시간들 속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홀로 치열하게 삶의 유한성과 그 의미를 곱씹었다.


IMF 이후 강력해진 취업난 덕분에 교대의 인기가 치솟던 시절, 엄마의 강력한 권유를 뿌리칠만한 마땅한 근거가 없어 선택한 교직의 길을 통해서도 참으로 치열하게 사람 공부를 해야만 했다.


대학교 전공 공부를 하던 시절에도 유난히 '교육 심리학' 과목에 재미를 느꼈던 나 자신이 떠오른다.


 대학을 졸업하고 학교 현장에서는 이론이 아닌 실재로서 참 많은 사람 공부를 했다. 그렇게 십 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나에게 오는 별별 사람들을 무조건적으로 가슴에 품고 그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써보던 시간들을 견뎌내었다.


사람 때문에 너무 힘들 때에는 서점에 가서 심리학, 철학 책을 일부러 찾아서 읽으며 위로받기도 했었다.


교직에 몸담았던 시간 동안 아이들이 해맑게 웃어주는 순간이 행복했지만, 일 년 단위로 나에게 스쳐왔다가 스쳐 지나갈 사람들에게 인류애적 관점으로 늘 사랑을 베풀고 싶었던 내가 감당해야 하는 심적인 고통은 의외로 컸다.


 인생을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잘 살고 싶다.'는 욕심을 내는 순간부터 삶은 가볍지 않고 부담스럽듯 '모든 사람들과 잘 지내고 싶다.'는 나의 욕심은 나를 참 많이도 힘들게 만들었던 것 같다.


사람을 탐구하고 싶다던 나의 어린 시절 소망을 하늘이 들어주었던 것인지 내 삶의 지난 장면들을 돌이켜보면 학교와 병원이라는 공간에서 참으로 많은 여러 사람들의 감정을 고스란히 바라봐야만 했다.


그러다가 때로는  사람들의 감정에 나의 감정이 함께 뒤섞여 버린 듯 느껴지는 순간들도  피할 수 없이 감당해야만 했다.


그런 상황들 속에서 나라는 존재가 사라져 버리는 듯싶어 두렵기도 했었다. 그런 두려움이 올라올 때는 그저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바르게 스스로의 중심을 잡고 싶어 부단히 도 혼자 내 마음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말을 걸어 나 자신을 위로해야만 했다.


그렇게 발버둥 치다가 언제부터인가 나 스스로를 치유하는 방법을 하나둘씩 발견하게 되었다.


그중 하나,

바깥으로 나가 세상을 그저 낯설게 바라보면서 걷는 것이다. 그렇게 걷다가 하늘을 바라본다.


목을 뒤로 젖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 보면 그냥 마음이 텅 빈 고요한 상태가 된다. 그렇게 하늘과 하나가 된다.

   마음이 적적한 어느 날, 나와 하나가 되어준 고마운 하늘 풍경 한 장




나는 본디 태생적으로 누군가를 내 방식대로 길들이는 것이 괴롭다.


나 역시나 누군가에게 길들여지고 싶지 않을뿐더러, 각자가 서로의 방식대로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기를 바랄 뿐이다.


그런 나에게는 쉽게 길들일 수 없고 그저 적정 거리를 유지하며 서로를 바라볼 수 있는 동물 친구가 생겼다.


 늘 과거를 돌아보며 괴로워하고 다가올 미래를 떠올리며 걱정이 많은 인간 속세와는 다르게 하루하루가 참으로 단순한 동물 친구를 바라보다 보면 내 마음도 한결 더 가벼워진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치유되는 것 같다. 30cm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며 내 주변을 맴돌아 나를 지긋이 바라봐주는 동물 친구의 사심 없는 눈빛이 나는 참 좋다.


  '너의 기억 속 내 모습은 어떤 것일까?' 늘 궁금하게 만드는 내 생애 첫 동물 친구, 젤리




적당히 오랜 시간 무아의 상태로 빠져드는 몰입을 체험하고 싶을 때는 그림을 그린다.


시간이 도무지 어떻게 흘러간 것인지 모를 만큼 빨리 시간이 지나가 버리지만 흘려버린 시간보다 값진 믿기 어려운 다채로운 색감의 작품이 완성되어 바라보는 눈을 감동시키고 만다.


우리의 인생도 결국은 한 편의 드라마이자 슬프고도 아름다운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마무리될 것이지만 내게 주어진 인생을 한 편의 작품으로 바라보기지 못한 채 당장 내 눈앞에 펼쳐진 '지금 이 순간'의 한 장면 안에 골똘히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완주하여 맛볼 수 있는 아름다움의 창조'를 의미하는 것 같다.


그래서 그림 그리기는 나에게 그 무엇보다도 내 삶과 나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어주는 치유의 시간을 선물해 준다.

자연계의 모든 동물이 이토록 아름다운 색감으로 세상을 감상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러니 참으로 감사하다.




사람 공부는 참으로 끝이 없다.

알 것 같다가도 잘 모르겠다. 나라는 사람 역시 마찬가지다.


이제는 나라는 사람이 이런 사람인 듯 싶다고 확신에 찼다가도 그 확신이 과연 맞는지 잘 모르겠다고 흔들린다.


십 대의 학창 시절,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가 나라는 사람은 '사람을 탐구하고 싶다'는 내면의 소망을 발견하게 되었듯이 마흔이 되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며 요즘 또다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게 된다.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과는 좀 다르게 살아보고 싶다는 나의 욕망이 결국 십몇 년 다니던 직장에서 나를 뛰쳐나오게 했고, 학창 시절 스스로에게 물었던 진지한 질문을 한번 더 (그때보다 한 결 더 진지하게) 스스로에게 던져볼 기회를 선물한 것이다.


사람을 탐구하고 싶던 어린 시절의 최은영은 그렇게 이십 년 남짓한 세월들 속에서 진지한 태도와 온전한 마음으로 사람이라는 존재의 빛과 어둠을 숙고했다.


그리고 그러했던 시간들 속의 내 모습을 끌어안아 치유의 시간들을 더 많이 갖게 해주고만 싶다.


그것이 내가 현재의 나를 위해 베풀 수 있는 진솔한 마음인 것이다.


이 세상 많은 사람들도 치료가 아닌 치유가 필요하다. 그들은 어떻게 스스로의 상처를 돌보고 있는 것일까?


이 지구라는 행성에 인간이라는 존재로 살아가는 시간 동안은 피할 수 없는 갑작스러운 고통의 시간들을 온몸으로 마주하고는 어떻게 그 몸과 마음을 다시금 회복시키며 안정시키고 있는 것일까?


자유와 평화로움을 사랑하는 나, 일상 속 대단하지 않은 치유의 시간들로 내면의 상처를 다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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