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을 주는 꽃
여행 가기 전, 일정을 짜야 마음이 편하다. 발길 가는 대로 가자고 작정한 즉흥 여행도 목적지로 향하는 차 안에서 안절부절못하다가 결국엔 일정을 완성하고야 만다. 여기에는 평소에 가보고 싶었던 곳이 주를 이루는데 얼마 전부터는 사진이 잘 나오는 곳도 포함시키기 시작했다. 여행에서 사진이 중요하게 된 건 직업병도 한몫했다.
요즘은 사진 명소를 미리 찾아본 다음, 그대로 사진을 찍어 SNS에 공유하는 추세다. ‘뷰 맛집’, ‘인생 사진 명소’ 같은 단어가 등장한 배경도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을 터. 사진이 예쁘게 나오면 SNS상에 노출이 잘 되고 해당 계정으로 사람들이 모인다. 내가 만드는 콘텐츠는 브랜드 SNS에 게재된다. 당연히 조회수가 높고 공유도 활발히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눈길을 끄는 사진은 필수다. 취재할 때 여행지로서 갖춰야 할 요건과 더불어 ‘여기서 멋진 사진도 남길 수 있다’는 것까지 강조하게 된 이유다. 긴 설명보다 사진 한 장이 주는 힘이 막강하다는 걸 체감하며 더 신경 쓴다.
지난겨울, 비행기 타기 6시간 전에 티켓을 구해 제주도로 향했다. 전날 저녁 식사할 때까지만 해도 다음 날 아침, 내가 비행기를 탈 거라곤 상상도 못 했을 정도로 갑작스러웠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제대로 즉흥 여행을 즐겨 보자며 아무런 일정도 세우지 않기로 결심했다. 해안 도로를 따라 바닷바람을 맞으며 드라이브만 할 생각이었다. 가는 길에 괜찮은 곳이 나타나면 안전하게 차를 세우고 크게 심호흡하며 풍경을 감상하자는 게 전부. 하지만 김포 공항을 가는 길에 다시금 직업병이 도져 제주 공항에 내린 이후의 일정을 시간 단위로 정리해 버렸다.
전부터 가고 싶었고 인증 사진 하나는 꼭 남기고 싶었던 동백나무 군락지를 일정에 포함시켰다. 찬바람이 부는 한겨울 추위 속에서 고고하게 붉은 꽃잎을 뽐내는 동백꽃이 매력적인데다 다른 사람들의 여행 사진을 볼 때마다 ‘나만 동백나무 인증 사진 없어’라며 아쉬워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백나무와 근사한 사진을 남기겠다는 기대는 제주 공항 도착과 동시에 시들어버렸다. 바로 전날, 누군가가 동백나무 군락지에서 찍은 사진을 봤는데 꽃이 다 떨어진 게 아닌가. 내 머릿속의 인증 사진은 이게 아닌데! 순간 김이 확 샜다. 동백나무 군락지가 숙소에서 멀었던 터라 ‘이번엔 때가 아닌가 보다’ 하며 생략했다.
이듬해 봄, 해외여행객을 타깃으로 한 한국 여행 콘텐츠를 제작했다. 수도인 서울은 물론 춘천, 전주, 강원 등 서울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해 갈 수 있는 곳도 소개했다. 제주도 역시 비행기로 1시간 거리니 포함시켰다. 그리고 흰 눈과 붉은 꽃이 공존하는 신비로운 풍경이 여행객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는 에디터로서의 판단, 그리고 가보지 못한 데서 비롯된 (개인적인) 아쉬움을 더해 동백나무 군락지를 제주도 추천 여행지 중 한 곳으로 선정했다. 더불어 여행 기념품으로 동백나무를 활용한 굿즈를 소개했고 그 과정에서 동백나무의 의미를 깊게 되새길 수 있었다.
동백나무 꽃은 보통 11월부터 이듬해 4월 사이에 피고 진다. 붉은색 꽃잎 5~7장이 동그랗게 서로를 감싼 생김새가 잿빛의 삭막한 겨울에 따스한 불꽃을 켜둔 것 같다. 이 붉은 꽃잎을 두고 한국의 겨울이 다른 곳보다 춥고 수분의 매개자인 새의 눈에 띌 수 있도록 더 진해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뚜렷한 근거는 없지만 왠지 그럴듯하게 들린다. 이처럼 혹한에도 불구하고 뜻을 이룬 동백꽃의 모습은 강한 의지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꽃을 자세히 보면 노란 꽃가루 주머니가 있는데 붉은 꽃잎과 강렬한 대비를 이룬다. 이렇게 특별한 꽃은 지는 모습도 예사롭지 않다. 꽃잎이 하나씩 떨어지지 않고 통째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꽃잎이 하나씩 서서히 떨어지면 완전히 질 때까지 그 아쉬움을 벗 삼아 아름다움을 더 오래 즐기고 여운도 남을 텐데. 그걸 허용하지 않는 눈치다. 한편으로는 화려한 꽃이 한순간에 떨어지는 모습이 무상을 일깨워 준다고 하여 사찰 주변에 동백나무를 심는다고도 전해진다.
동백꽃이 툭 떨어진 모습은 강요배 화백에게 영감을 줘 그의 작품 <동백꽃 지다>에 제주 4·3 사건의 피해자로 표현되었다. 불시에 생명을 다한 동백꽃이 수탈과 탄압에 저항하다 희생당한 제주도민을 떠오르게 해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작품이다. 그림을 보며 역사를 자세히 알려고 하지 않던 지난날의 나를 반성했다.
얼마 전 정부는 국가 권력에 의해 대규모 희생이 이루어졌음을 인정하고 유족과 제주도민을 위한 공식 사과문도 발표했다. 또한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전면 개정되었으며, 당시에 억울한 옥살이를 한 피해자들은 무죄를 판결받아 누명을 벗었다. 뜻이 있는 제주도민과 국민들은 동백꽃을 제주 4·3 사건의 상징으로 삼고 4월 3일마다 동백꽃 배지를 달자는 캠페인도 진행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제주도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작가들은 동백꽃을 모티브로 한 다양한 상품을 개발해 이러한 관심이 지속되도록 힘을 모으고 있다.
피어 있을 때는 물론 덧없이 진 모습에서도 깨달음을 주는 동백나무를 보니 많은 생각이 든다. 제주 4·3 사건과 동백나무를 제대로 알았더라면 동백꽃이 진 모습에서도 의미를 헤아렸을 텐데. 사진이 기대와 다르다는 이유로 동백꽃을 보러 가지 않은 게 후회된다. 꼭 알아야 하는 건 뒷전으로 한, 심지어 알려고도 하지 않은 나의 태도를 직업병이라고 치부한 태도 역시 반성해야겠다.
동백나무 | 차나무과 동백나무속 / Camellia japonica L.
11월~4월에 가지 끝에 붉은 꽃이 피며 국내에는 제주도, 장흥, 강진 등지에 군락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