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그릇, 당신의 마음
지금은 노트북과 태블릿을 주로 사용하지만,
회사에서 1년에 한 번씩 나눠주는 수첩을 아직도 손에 들고 있다.
물론 1권을 다 채우지는 못하지만, 그 얇은 종이 위에는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어느 날 노트를 펼쳤을 때,
암호처럼 알아보기 어려운 글씨가 적힌 페이지를 마주한다면, 그건 대개 급한 미션을 받았던 날의 흔적이다.
녹음도, 사진촬영도 허용되지 않았던 긴장감 넘치는 회의실.
그 자리에서 바로 결과물을 만들어야 했기에 펜은 종이 위를 급히 달렸고, 중요한 키워드만 건져 올리듯 휘갈겨 썼을 것이다.
그 날카로운 획들 사이로 당시의 긴박함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반대로 어떤 페이지에는 둥글둥글하고 몽글몽글한 글씨가 남아 있다.
맛있는 점심을 먹고 나서 슬며시 졸음이 몰려왔던 오후 시간대의 기록일지도 모른다.
혹은 회의가 너무 지루해서 마음은 이미 창밖을 향해 있고, 손만 무의식적으로 움직이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 부드러운 곡선들에서는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신기한 것은 그런 글씨를 다시 꺼내 읽어보면,
당시의 장면이 스냅사진처럼 생생하게 되살아난다는 점이다.
글자 하나하나가 그 순간의 증인이 되어준다.
감정을 담는 글씨의 언어
손글씨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감정 그 자체다.
디지털 폰트가 아무리 세련되어도 감정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는 이유는,
정제된 만큼 표정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반면 손글씨는 그 순간의 마음이 고스란히 스며든다.
획이 날카롭고 거칠어진 날에는 무언가에 기분이 상했거나,
피로가 극에 달했을 가능성이 크다.
펜 끝에 실린 감정의 무게가 종이를 더 세게 누르고,
글자들은 마치 가시처럼 뾰족해진다.
반대로 또박또박한 정자체가 가지런히 적혀 있다면,
그날은 마음이 차분했거나 누군가에게 보여줄 준비가 되어 있던 하루였을 것이다.
정성스러운 한 획 한 획에서 안정감이 묻어난다.
때로는 글씨에서 ‘자기검열’의 흔적이 발견되기도 한다.
박박 지우거나 두줄로 쓱쓱 긋고 다시 쓰고,
단어 사이를 의도적으로 벌려 쓴 자국들.
이는 조심스러운 이야기를 적고 있었을 것이다.
스스로를 의식하면서, 마음과 손 사이에서 한 번 더 걸러진 단어들.
글에 생각이 담긴 것처럼.
시간을 가두는 기록의 힘
다꾸라고 불리는 다이어리 꾸미기를 꾸준히 하는 사람들을 단순히 ‘예쁘게 꾸미는 것을 좋아하는’ 부류로만 바라보면 놓치는 것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감정과 하루의 리듬을 담아낸다.
종이 위에 정성스럽게 그들의 감정을 눌러 담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 기록을 다시 펼쳤을 때,
혼자 씨익 웃음지며 그 때 그 순간의 자신과 다시 마주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색연필로 그어진 밑줄, 마커펜의 형광빛, 귀퉁이에 그려진 작은 낙서까지도.
모두 그날의 온도를 기억하는 단서들이다.
웃었던 일에는 둥근 스마일이, 속상했던 순간에는 빗금이 그어져 있을 것이다.
기록은 단순히 정보를 저장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날의 온도와 표정, 향기와 소리까지 함께 봉인하는 시간 여행의 열쇠다.
몇 년 후 우연히 그 페이지를 펼쳤을 때, 우리는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
그때 입었던 옷,
그날 들었던 음악,
그와 마셨던, 그녀와 마셨던 쌉싸레한 커피의 맛까지도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증거가 되는 글씨
그래서 종이 위의 글씨는 단순한 텍스트가 아니라 하나의 ‘증거’다.
내가 그 순간을 살았다는 증거,
그 감정을 느꼈다는 증거,
그 생각을 했다는 증거.
디지털 시대에도 사람들이 여전히 펜을 놓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키보드 위에서 탄생한 글자들은 완벽하지만 차갑다.
반면 손끝에서 태어난 글자들은 불완전하지만 따뜻하다.
삐뚤빼뚤한 글씨체,
한글자 한글자 써내려간 종이 위에는 나의 체온이 남아 있고,
종이 표면이 변형된 느낌이 느껴진다면 아마도 그날은 습했을 것이다.
“글씨는 마음을 담는다, 글씨는 마음을 닮는다.” .
- 알파시커
정말 그런 것 같다.
마음이 급하면 글씨도 급해지고, 마음이 편안하면 글씨도 여유롭다.
설레는 마음에는 글씨마저 들뜨고, 우울한 날에는 글자들도 힘없이 축 처져있다.
그래서 글씨는 우리의 마음을 닮는다.
오늘의 감정은 어떤 모양일까?
지금 이 순간,
당신이 펜을 들고 무언가를 적는다면 어떤 글씨가 나올까.
오늘 하루의 감정들이 어떤 모양으로 종이 위에 스며들까.
혹시 모를 미래의 당신을 위해,
오늘의 마음을 한 줄이라도 적어두는 것은 어떨까.
그 작은 기록이 언젠가 소중한 추억의 열쇠가 되어줄 것이다.
종이와 펜이 만나는 그 순간, 서걱거리는 시간은 멈추지만 글씨에 담긴 나의 감정은 영원해진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손글씨를 쓰는지 모르겠다.
어떤 폰트보다 더 멋진 손글씨, 거창한 캘리그라피일 필요는 없다.
우리에게서 사라져가는 것들을 붙잡기 위해, 기억하고 싶은 것들을 남기기 위해.
오늘도 끄적거려보자.
오늘도 우리들의 감정을 글씨에 담아 소중히 다뤄주세요.
영원히 기억될지 모르니까요.
※ 메인 그림: 캘리그래퍼 이상현작가 작품중에서.
Here With Me
알파시커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