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이것저것 할 일을 다 하고 11시가 넘어야 느지막이 일기를 쓰곤 했는데 오늘은 글쓰기를 빨리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저마다 학교며 직장에 간 식구들 대신 얼마 없는 설거지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노트북을 열어 인터넷 강의를 들으니 느지막한 학생의 일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백수 팔자가 상팔자다 made by 김알람 using midjourney
인터넷 강의를 듣다가 머리가 아파지면 최근에 재미를 붙인 midjourney에서 그림을 생성하고, midjourney의 기괴한 그림들에 다시 골이 아파지면 다시금 인터넷 강의를 듣는 단짠단짠의 하루. 그래도 오늘 하루 인고의 시간을 보냈더니 내일쯤이면 지금 듣고 있는 강의 전체를 끝낼 수 있게 되었다! 파이썬 강의는 아직 남았는데 그것까지 일정 안에 다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ㅎㅎ.
머리를 많이 써서인지 뇌를 식히고 싶어 오늘은 일찍 브런치에 접속했다. 최근에 퇴사를 해서인지 퇴사 후 생활에 대한 걸 일기로 많이 쓰기 때문인지. 홈 화면에 보이는 브런치 추천 글 중에는 퇴사와 이직, 사직과 해고에 관한 글들이 많았다. 특히 눈에 띈 것은 권고사직 후 심정을 담은 진솔한 에세이. 그 글을 읽을 때만 해도 작가분의 글 솜씨에 감탄만 했는데, 강의를 듣느라 확인을 미뤄뒀던 카카오톡 단톡방에서 또다시 발생한 아마존 대규모 권고사직의 소식을 들으니 느긋하던 신경줄이 확 조여들었다.
조급해지지 마
나는 걱정이 많은 편이다. 이유는 모른다. 유전과 환경의 콜라보로 이런 기질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분명히 별 것 아닌 일인데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면 최악의 결과까지 생각의 나래가 펼쳐진다. 제일 안 좋은 점은 이렇게 부정적인 생각의 나래에 도달하면 조급한 마음이 들어 섣부른 선택을 해버린다는 거다.
몇 개월 전부터 꾸준히 들려오는 세계적인 경기침체와 권고사직의 물결은 퇴사를 하기 전에도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퇴사 후에 막연한 불안감이 찾아올 것도 예상했었다. 그런데 이놈의 팔랑귀 기질이 또 발휘되어 오늘 또다시 조급한 마음이 든다.
'조급하지 마, 이미 알고 있던 거잖아?'
돌연 이중인격자가 되어 불안해하는 스스로를 달래고 긴급 처방으로 짧은 명상 시간을 가졌다. '생각하지 마. 넌 생각이 너무 많은 게 문제야' 급하게 만들어낸 김알람 인격 2의 말이 정답이다. 난 생각이 너무 많다. 잠시 눈을 감은 채 숨쉬기에 집중하고 눈을 뜨자, 불안은 옅어져 있었다.
내일채움공제 해지 메시지를 받다
다음에 발견한 건 내채공의 메시지. 해지 메시지야 진작에 받았고, 정확히 말하면 내채공에 납입했던 돈이 내 통장으로 다시 들어왔다. 내가 가입한 것은 2년 만기의 내채공이었는데, 만기가 아니더라도 1년만 채우면 정부에서 주는 돈의 일부를 함께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내가 퇴사를 결심한 시기는 내채공 1년까지 약 2개월이 남은 상태였고, 이것 때문에 퇴사 시기를 늦춰야 하나 고민도 있었다.
2개월 후 받을 수 있는 2백 만원을 포기하고 퇴사를 결심한 건 퇴사를 결정한 상태로 길게 다니는 게 회사에도 나에게도 별 도움이 안 된다는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 나는 굉장한 무기력증에 빠져있었다. 이유는 복합적이었지만 개인적인 걸 차치하고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법한 조언이라면 하나가 있다.
난 이전까지 핵심인재를 그냥 '일 잘하는 사람'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핵심인재란 '그 회사'에 꼭 필요한 사람이다. 단순히 일을 잘하고 못하고 와는 다른 영역이다. 나와 같은 포지션의 사람이 여러 명이라면, 일은 분산되고 나의 영향력은 작아질 것이다. 같은 기술을 가진 사람이 회사의 규모에 비해 너무 많다면 내가 얼마나 좋은 기술력을 가지고 있는 것과 별개로 평가절하될지도 모른다. 아니면 내가 어떤 분야에서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 기술이 '그 회사'에서 중요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내가 회사의 어떤 업무에 최적의 기술을 가지고 있더라도, 회사의 방향성이 달라진다면 내가 가졌던 기술이 쓸모없어질 수도 있다. 회사에 따라, 같은 회사라도 회사의 상황에 따라 핵심인재란 달라질 수 있다.
결국 핵심인재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다. 회사가 속한 산업, 회사가 나아갈 방향성, 내가 속한 직무, 내 직무의 발전방향에 따라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빛을 발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직이나 퇴사를 고민할 때는 단순히 '나'에 대해서만 생각할 게 아니라 '회사와 나'와의 관계, 그리고 '회사 속 나'와 '회사 밖 나'까지 함께 고민하는 게 필요하다. 물론 퇴사 안 하면 몸과 정신에 심한 타격이 있을 것처럼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이라면 저런 고민까지 할 필요는 없다. 건강은 돌아오지 않으니까.
퇴사를 결심한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생각하는 나의 핵심 기술이 이 회사에 꼭 필요한 기술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포지션 전환을 위해서 노력해 봤지만 나의 문제와 상황의 문제가 복합적으로 엮여 잘 되지 않았다. '지금 내게 문제가 있는 것 같아'라고 말할 때 그걸 함께 고민해 주고 진심으로 조언해 주는 팀을 만나는 건 운이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런 팀원들에도 불구하고 상황을 바꿔야 할 때도 있는 법. 나는 충분히 고민했고 결정을 내렸다. 뒤돌아선 것에 대해서 아쉬움이 느껴질 때도 있지만, 그런 생각은 빨리 떨쳐내려고 한다. 돌이킬 수 없는 것을 머릿속으로 붙잡으며 스스로 고통의 길로 들어설 필요는 없는 법이니까.
퇴사 후 나는 궁금했던 프로그래밍 언어들에 대해서 배우고 있다. 갑자기 프로그래머가 되고 싶어진 건 당연히 아니고, 사업계획서나 기획서를 쓸 때 '필요한 데이터를 내가 가공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마치 학생 때가 된 것처럼 약간은 진저리가 나지만 대부분은 흥미를 가지며 강의를 듣고 있다. 퇴직 전 나의 마음에 깔려있던 무기력함이란 구름 속에서 새로운 분야라는 낯선 것이 만들어낸 산발적인 불꽃놀이가 펼쳐지고 있다.
조급하지 말자, 다시 한번 내게 말한다
익숙한 조급함은 계속해서 내게 찾아올 것이다. 원하지 않는 방문 판매원처럼 말이다. 그러면 나도 계속 내게 얘기해주려고 한다. '조급하지 말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