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다부진 체격에도 웃을 땐 눈이 없어지는 게 귀여웠다. 남들보다 조금 두꺼운 입술도 매력 포인트였다. 말수는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리액션은 누구보다 좋았고, 의외로 다정했다.
연말이었다. 보통 사람들처럼 술 한 잔에 1년 동안 있었던 일들을 늘어놓았다. 그렇게 술에 정신을 잃어가면서 우정을 다졌고 의리를 외쳤다. 그와 나도 술과 함께 정이 들었고, 스며든 정은 나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코로나 시국의 연말과는 다른 밤이었다.
밤새 술판을 벌이고 어슬렁거리다 몸을 녹이려 근처 아지트로 걸음을 옮겼다. 난방 시설이 잘 되어 있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눈 내리는 밖보다는 훨씬 나았다. 아지트에 남은 우리는 목이 쉴 정도로 말을 멈추지 않았다. 밤새 떠들고도 못다 한 이야기가 아직 많았나 보다.
나는 수족냉증에 유난히 겨울에 손이 잘 얼었다. 살짝 스친 손에도 그가 알아차린 모양이다. 그가 슬며시 손을 잡았다. 봄볕처럼 부드러웠고, 핫팩만큼이나 따듯했다. 동태처럼 얼었던 손이 언제 그랬냐는 듯 녹았다. 서로의 온도가 비슷해질 때쯤 손과 함께 마음까지 녹여버렸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가 나에게 관심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날 좋아하는 줄 알았다. '훗 아직 살아있구먼' 내심 어깨가 으쓱했다. 유교 걸까지는 아니지만, 친구끼리 손을 잡지는 않으니까 그렇게 믿었다. 적어도 시그널이라고 여겼다. 무엇보다 그의 손에서 어떤 반짝거리는 사랑의 징표를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에 더 확신했다.
'너, 나 좋아하는구나?!'
연애를 오래 쉬었어도 연애세포가 다 죽지는 않았다. 그보다 1년을 더 살았으니 그 정도 눈치는 빤히 보였다. 아직 '좋아한다'는 말을 못 들었으니 2%의 불확실성은 남겨뒀다. 그리고 그가 말할 때까지 기다렸다. 상대가 좋아도 먼저 고백하기보다 상대가 고백하기를 기다리는 편이었다. A형이지만 소심한 편은 아니고, 적극적이지만 사랑 앞에선 대범하지 못했다.
그저 할 수 있는 거라곤 술김에 어깨에 살짝 기대 보이는 거, 웃으며 스킨십하는 그 정도가 다였다. 곰인 척하는 여우였다. 아니 여우 인척 하는 곰인가.
손 잡아 얼었던 손을 녹이던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누나 나 여자 친구 있어"
퍽치기를 당한 것 같았다. 시간을 거슬러 머리를 빠르게 굴려봐도 답이 바로 맞춰지지는 않았다. 언제부터 사랑이 답이 있었나. 솔직히 깊이 고민할 필요도 없는 사이였다.
"어 그래, 축하해, 미안해" 그냥 튀어나오는 대로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뭐 별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여겼지만 당황스러움을 숨길 순 없었다. 왜 내가 미안해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죄를 지은 기분이었다.
복잡한 감정 속에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아니 너 여자 친구 있었어?'
'그런데 왜 티를 안 내?' 혼자 김칫국 먹었단 생각에 괜히 억울했다. 그때 그 자리에서 시원하게 한 소리하지 못한 것도 내심 마음에 걸렸다. 다음에 만나면 크게 한 소리 해 줘야지.
"사실 너 내 취향 아니라고" "나 연하는 안 좋아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