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기획 피디가 미친 듯이 운동하는 이유
드라마를 기획한다는 건 언제 완성된 대본이 나올지, 수정고의 끝은 어디일지, 대체 편성은 언제 되는 것인지, 캐릭터와 스케줄이 딱 맞는 배우는 어디서 캐스팅이 되는 건지 드라마 업계에서 그 누구도 짐작할 수 없다. 운 때가 맞아 들어야 하는 건지 모두가 그때를 기다리며 이미 읽고 또 읽으며 수정했던 대본을 계속 수정한다. 조금 더 나은 대본이라면 누군가 우리가 만드는 대본을 알아봐 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드라마는 그렇게 아주 오래 천천히, 다져지고 나서야 만들어진다.
주변 사람들은 내가 하는 일을 흥미롭게 보지만, 그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리 쉽고 재밌는 일은 아닐 수 있다. 내가 좋아서 재밌어서 시작한 일은 맞는데, 내가 과연 이 일을 얼마나 오래 할 수 있을지 늘 고민이다. 기획은 안개가 가득 낀 긴 터널을 눈을 감고 걷는 기분으로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마냥 걷다 보면 내가 왜 이 길을 걷고 있는지, 어떻게 이 길에 들어서게 된 건지 생각이 많아진다. 어디가 끝인지 보이지 않고, 그 끝에 뭐가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체력적으로 에너지를 크게 쓰지 않는 것 같은데도 일이 늘 사람을 지치게 했고, 늘어지는 시간, 지난한 기다림이 정신적으로 꽤 힘들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쓴 에너지를 나를 위한 에너지로 쓰고 싶어서 늘 체육관에 갔다. 일로써 채우지 못한 성취감과 효능감을 운동으로 채웠다. 미친 듯이 운동하고 땀 흘리고 나면 내가 무엇 때문에 괴로웠는지 금세 잊는다. 하루 종일 운동하고 나면 온몸이 쑤시고 아파도 마음은 아프지 않았기에 체육관에 가는 게 좋았다. 주중에도 퇴근 후에는 웬만하면 수영장이나 배드민턴을 치러 갔고, 주말에는 아침저녁으로 여러 체육관을 돌며 배드민턴을 쳤다. 내 두 발이 유일한 이동수단임에도 불구하고 발 길이 닿을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나를 부르는 곳이면 어디든 체육관으로 향했다. 직업이 운동인이 아닌데도 운동선수냐는 말을 들어가며, 치료와 회복을 병행하면서도 운동은 놓을 수 없었다. 운동 시간은 늘 확보해 두었고, 즉흥적으로 행동하는 나도 운동 계획만큼은 철저하게 계획하고 관리했다.
내 안에 어지러운 마음을 땀으로 흘려보낸 후 느끼는 보람과 뿌듯함, 성장하고 있다는 기쁨,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아간다는 자부심은 나를 살아 있게 했다. 오늘 내가 100개의 스쿼트를 한다고 목표하고 100개를 다 했다면, 나는 오늘 목표를 이룬 것이며, 운동 과정이 힘들더라도 100개라는 숫자는 오늘 운동의 끝이 어딘지를 알 수 있었다. 시작과 끝이 확실하다는 것, 운동이 좋은 이유였다. 어쩌면 드라마를 기획하는 일보다 내가 내 삶을 기획하고 꾸려간다는 게 더 좋은 걸지도 모르겠다. 이게 내가 사는 인생의 드라마일지도. (아마 운동으로 가득하겠지만)
운동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명확히 알게 했다. 각종 성격 유형 검사를 따로 할 필요 없이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나는 명확한 기한과 목표가 있는 프로젝트를 좋아하고, 과정을 즐기려면 매 순간 짧더라도 작은 성취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목표 지향적이고 자기 발전 욕망이 커서 지금 당장 내가 잘하지 못해도 오래 버틸 수 있는 끈기로 결국 성과를 만들었다. 나보다 잘하는 사람을 만나거나 내가 나라는 사람을 시험하는 한계를 경험하며, 좌절하고 넘어져도 내가 성장하고 있다는 믿음 하나로 살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좋아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조용히 사무실에 앉아 대본을 분석하고 고민하는 것만으로는 내게 충분한 도파민이 되지 않았다. “일은 일이고, 삶은 삶”이라는 말처럼 퇴근 이후에는 나의 존재 가치를 올릴 수 있는, 내가 완전히 미쳐서 몰입할 수 있는, 건강한 자극을 받을 수 있는 것에 빠질 필요가 있다. 그렇게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춰야 건강하게 오래 일하고 지친다고 해서 그대로 주저앉지 않을 힘이 생긴다. 운동이 내 삶의 전부이자 내가 미친 듯이 운동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