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소설가가 자신의 속도를 찾아가는 순간
이두온의 이 중편 소설은 촉법소년에 대한 흥미로운 해석을 시도한다.
“현주 씨. 저는 촉법소년이에요. 하고자 한다면 뭐든 할 수 있어요.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고요.” p. 63
나이가 어린 청소년에게 형벌을 면하게 해주는 이 제도를 긍정적인 가능성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재우라는 남자가 맞닥뜨린 혼전임신 문제다. 재우는 여자 친구가 왜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고 제 뜻대로 따라주지 않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임신한 연인과 아기를 모두 책임지겠다는 데 말이다. 재우는 자신이 주도권을 잡고 그것을 휘두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런 재우 앞에서 여자 친구가 할 수 있는 일은 침묵을 유지하는 일이었다. 그건 재우에게 휘둘리지 않기 위한 그녀만의 발버둥이기도 했다.
그녀의 동생인 태이는 (중학생 신분으로) 처음부터 운전대를 잡는다. 운전대를 잡는다는 것은 주도권을 잡는다는 것이고, 작품 속에서 그것은 남성적인 영역으로 그려진다. 재우가 여자이자 청소년인 태이에게 가까스로 넘겨주고는 생색을 내는, 일종의 권력인 것이다.(‘눈물을 머금고 아이를 운전석에 앉혔다.’ p. 13) 운전하지 않는 남자는 무력하다. 예빈의 외삼촌은 대중교통인 지하철에 익숙하지 않은 듯, 카드 단말기를 찾지 못해 허둥대거나(p. 33) 열차 문에 머리가 끼고 만다(p. 35). 지하철은 비교적 평등한 교통수단이었다.
태이는 처음부터 남자들에게 주도권을 줄 생각이 없다. 그는 재우를 짐짝처럼 트렁크에 싣고 다닌다. 트렁크는 늘 주도권을 (스스로) 빼앗겼던 예빈의 공간(=보조석이나 뒷좌석)보다도 못한 자리다. 마마걸인 예빈이 엄마를 향해 차를 몰던 때는 그녀가 엄마에 대한 마음을 가장 솔직하게 내보이며, 그녀로부터 가장 멀리 도망치던 순간이기도 하다.
운전의 세계, 그것은 또한 속도의 세계다. 태이는 고속도로에 들어서며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었다’고 느낀다.(p. 52) 고속도로는 운전자가 가장 빠르게 달릴 수 있는 공간이다. 남자들이 만들었고, 아직까지 남자들이 주도하고 있는 그 세계는 효율성의 세계이고, 스스로를 착취하듯 ‘기량을 전부 쏟아야’(p. 29) 하는 경쟁의 세계다. 바나나가 뜬다고 ‘뭐 하나 걸리라는 마음으로’(p. 29) 온갖 바나나 제품을 쏟아내는, 끝 간 데 모르는 욕망의 자본주의 세계다.
태이가 드러내는 ‘촉법소년’의 의미는, 세상의 속도를 의식하는 첫 시기이자 그 속도에서 빠져나올 마지막 기회였다. 태이는 그렇게 좋아하던 달리기를 그만두게 되었으면서도 ‘달리기보다 빠른 게 있는데 뭐하러 달리겠’냐고 반문한다.(p. 23) 세상의 논리에 맞춰 효율성을 중시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곧 그 속도가 문제라는 걸 인정한다.
잠깐만. 멈춰 봐. 시간이 필요해. 하지만 태이는 한 번도 그런 말을 해 본 일이 없었다. 그는 늘 빠른 아이였기 때문이다. p. 32
속도가 문제를 만들었다. 세상의 속도를 따라잡으려면 모든 생각과 자아를 버려야 했다. 따라잡지 못하면 영원히 낙오자의 낙인이 찍힐 터다. 다시 처음의 혼전임신 문제로 돌아가 보면, 태이의 이 모든 여정이 작품 속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언니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태이의 말은 언니의 침묵과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잠깐만. 멈춰봐.
우스운 것은 너무 빨리 달리다 보면 코앞에서 일어난 일조차 알지 못하게 된다는 점이다. 태이는 어떤 것도 보지 못했다. p. 74
재우는 이것을 알지 못했다. 마음과 인생의 문제를 아주 빠르고 간편하게, 충분한 준비도 없이 밀어붙일 수는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재우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른 채 그것을 책임지겠다고 나선 꼴이다. 그는 속도를 늦출 생각이 없었다. 그것은 주도권을 쥐고 휘두르는 쪽이 자주 저지르는 실수였다. 태이의 언니가 택한 침묵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를 성찰하고 점검하기 위해 필요한 잠깐의 유예기간이었다.
그 유예기간을 갖지 못한 채 정신없이 달리다 보면, 사람들은 불안이라는 덫에 빠지게 된다. 낙오될지도 모른다는 불안 말이다. 낙오자들끼리 일시적인 동맹이 맺어진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결국 그들은 불행에 빠지지 않기 위해 서로를 배신한다. 체력장 오래달리기에서 급하게 친구가 된 아이들처럼. 약을 얻기 위해 인질극을 벌이는 태이와 예빈처럼. 그들은 낙오자인 서로를 혐오한다. 낙오자도 속도에 쫓기기는 마찬가지였다.
불안은 일시적 평안을 찾아 마약에 손을 뻗게 만든다. 불안은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게 만들어 어린아이에게 유괴 상황을 시험하게 한다. 불안은 중독을 부른다. 끝내 불안 자체에 중독되고 만다. 불안이 곧 삶이 된다. 지금 세계는 불안에 떨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속도의 세계는, 좋아하는 일을 더 이상 좋아하지 못하게 만든다.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가만히 그것을 들여다보고, 시간을 들여 그 즐거움을 충분히 만끽하는 일이다. 속도의 시대에 그것은 사치스러운 일인지 모르겠다. 이두온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말한다.
그리고 뭔가를 좋아했지만 이제 그것을 더 이상 좋아할 수 없게 된 분들이 이 이야기를 읽었으면 좋겠다고 몰래 생각해 본다. p. 165
‘뭔가를 좋아했지만 이제 그것을 더 이상 좋아할 수 없게 된’. 나는 이 말이 이제 완연한 프로 작가의 길에 접어든 작가가 자기 스스로를 표현한 말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문학계(특히나 장르 문학계)는 눈코 뜰 새 없이 빠르게 변하는 시장이다. 일본과 미국, 유럽의 작품들이 국내 작품들과 뒤섞여 빠르게 나타났다 순식간에 사라진다. 이제 막 데뷔전을 치른 작가는 자신이 그 빠른 속도전 속에 뛰어들었음을 실감하고 순수하게 소설을 좋아했던 시절과 작별을 고한다.
시작한 일은 성취욕으로 변모해 있다. 그는 그 세계를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는 운명을 직감하면서 무엇이든 움켜쥐고자 한다. 애정과 성취욕이 어떻게 뒤섞여서 하나가 되어버린 건지 태이는 잘 모른다. 애정이 분노와 슬픔으로 뒤바뀌는 것을, 박탈감으로 변모하는 것을, 자기혐오가 되어 온몸을 두드리는 것을 바라본다. 그리고 애정이 육상 세계에 입성하기 위한 입장권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입장권만으로는 그 세계를 즐길 수 없어서 자꾸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가진 돈이 없는 줄도 모르고, 그 돈이 전부 빚이 된다는 사실도 모른 채 그렇게 했다. p. 46-47
이 작품이 발표된 지금은 오히려 이두온 작가 본인에게 ‘더없이 중요한 시기’가 아닐까 싶다. 태이는 마지막에 과감하게 고속도로를 이탈한다. 고속도로 밖에는 그동안 너무 빨리 지나가느라 보지 못한 작은 생명체들이 보인다. 나머지 사람들은 여전히 고속도로에 남았다. 예빈이는 약을 끊지도 못하고 엄마와 결별하지도 못한다. 재우는 태이가 언니를 대신해 남긴 메시지를 제대로 알아들은 것 같지 않다. 아마도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태이는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 정신없이 뛰다 뒤를 돌아봤을 때 아무도 그녀의 뒤를 따르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로 그때가 달리기를 좋아하게 되는 순간이라고 말한다.(p. 84) 타인의 속도에 자신을 맞출 필요도, 자신의 속도에 타인이 맞출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뒤를 달리며 안도해야 할 필요도 없다. 오직 자신의 속도에만 집중하면 되는 것이다.
태이는 이제 속도와는 무관하게 자신이 좋아하는 달리기를 마음껏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두온 작가도 자신만의 속도를 유지하며, 최대한 즐겁게 그 달리기를 이어가줬으면 하는 마음이다. 누가 더 앞서가든, 자신의 위치가 1등이든 꼴찌이든 말이다. 자기 작품 세계에 집중했을 때 가장 자신다운 속도가 나오는 법이다. 이두온 작가가 이 작품집에서 서미애 작가와는 무관한 자신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만들어 냈듯이 말이다. (두 작가는 같은 테마를 공유하면서도 전혀 다른 작품을 만들어냈다)
범죄 소설을 쓰는 신인 작가에게 촉법소년이란, 무궁한 가능성을 뒤로하고 성숙함으로 나아가는 기회였던 게 아닐까 싶다. 아마도 자기 속도를 가늠하고 잠시의 유예기간으로 삼을 수 있는 기회였을 것이다. 앞으로도 이두온 작가의 질주를 즐겁게 바라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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