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의 공중부양』 , 이외수
글이란 무엇인가
글이란 쌀이다. 썰로 오해하지 않기 바란다. 쌀은 주식에 해당한다. 그러나 육신의 쌀이 아니라 정신의 쌀이다. 그것으로 떡을 빚어서 독자를 배부르게 만들거나 술을 빚어서 독자들을 취하게 만드는 것은 그대의 자유다. 그러나 어떤 음식은 만들든지 부패시키지 말고 발효시키는 일에 유념하라. 부패는 썩는 것이고 발효는 익는 것이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지 그대의 인품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흔쾌히 자의에 의해 펜을 들어 썼던 글에 대한 기억은 때 묻지 않았던 초등학교 시절의 글짓기와 중고등학교 시절 연예인이나 이성을 향한 감성 터지는 일기 정도가 전부였다. 대학생과 직장인 시절에는 쓰고 싶지 않지만 써내야만 하는 글만을 억지로 쓰며 살았다. 현실에 올인한 채 글로 끌리는 마음의 소리를 못 들은 척 무시하고 부정했다. 길고도 지루한 '입덕 부정기'가 이어졌다. 그러다가 SNS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주변 사람들이 한두 마디씩 던지기 시작했다.
"깊이는 없는데 잔재미는 쪼끔 있어.”
“TV 예능프로 자막 쓰면 잘 쓸 듯... “
“블로그를 좀 적극적으로 해 봐."
칭찬인지 욕인지 알 수 없는 댓글 같았다. 가만히 내 SNS를 찬찬히 들여다보니, 귓바퀴만 간지럽히고 날아가버릴 깃털처럼 가볍기만 한 글귀들이 낭만적인 여행지, 팬시한 음식 사진들과 함께 공유를 핑계 삼은 과시욕의 옆구리에 애처롭게 붙어있었다. 그렇게 나의 일상과 나의 글은 알맹이를 잃어버린 껍데기처럼 서로 닮아있었다. 나의 쌀 알맹이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발효가 아닌 부패되어가고 있었던 것일까. 어디선가 부패의 악취가 스멀스멀 나는 것만 같았다. 마음속의 리셋 버튼을 누르고 새로운 나만의 쌀 알맹이를 찾아야겠다는 일념으로 용기를 내어 글에게 다가가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가까이 가려고 해도 글은 쉽게 곁을 내어주지 않았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으니 일단 닥치는 대로 열심히 읽는 수밖에... 하지만 문학을 읽으면 그 깊이를 어림하지 못하여 헤매었고 비문학을 읽어도 머리에 제대로 차곡차곡 쌓지 못했다. 그래서 또 읽고 읽고... 들고 나는 현인들의 지혜와 스쳐가는 복잡한 상념들 때문에 뒷골이 터질 것 같아 스마트폰을 들었다. 메모장에 일기나 하루의 단상, 그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끄적이기 시작했다. 엄지로는 성이 차지 않아 기어이 작정하고 노트북을 들고 카페에 앉아 열 손가락을 풀가동하기 시작했다. 엉망진창인 문장들과의 지루한 싸움이 반복되던 어느 날 나의 글 중에서 제법 마음에 드는 구석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지치고 넘어져도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자판을 붙잡고 있다 보니 나의 새로운 쌀 알맹이에 싹수(?)가 움트기 시작한 것일까. 사실 순수문학을 하기에는 턱 없이 부족한 창의성과 재능을 들먹이며 글쓰기를 포기할 변명거리를 찾고 있었다. 그런데 답답하고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자판을 두드려보니 실로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하는데...
첫 번째, 생각지도 않았던 자신의 숨겨진 재주(아직 재능이라기엔...)를 발견할 수 있다. 스토리텔러로서의 창의성과 재능은 안타깝게도 아직 발견하지 못했지만, 글을 쓰다 보니 말도 안 되는 듯 하지만 묘하게 수긍이 가는 특이한 사고의 흐름 체계와 그 생각과 주장을 무작정 펼쳐버리고 마는 배짱을 갖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나의 재능이 아니라 손가락을 움직이는 자극이 뇌로 전달되고 나서야 비로소 벌어지는 즉흥적인 현상이었다. 말도 안 되는 듯하면서도 그 사고의 흐름이 신기할 뿐만 아니라 과히 나쁘지 않았다. 예기치 않은 재주를 마주하는 신기한 일이 벌어지기도 하니, 자꾸만 끌리는 일에는 무작정 덤비고 볼 일이다.
두 번째, 시간이 쏜 살 같이 흘러가 버려 삶이 지루할 틈이 없다. 늘 읽고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써야 하니 아무도 시킨 적 없는 '지 혼자 바쁜 척 놀이'에 24시간이 모자라다. 서른이 넘어서도 이 길 저 길을 서성이며 나의 길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회사에 몸만 붙들어놓았을 뿐 늘 내 영혼은 어느 곳에도 안주하지 못하고 떠돌았다. 칙센트 미하이 교수의 『Flow』를 읽으며 '나는 언제쯤 저런 몰입의 경지를 경험해볼 수 있을까? 이번 생에는 가능한 것일까?' 지하 백만 킬로미터 아래로 땅이 꺼져라 깊은 한 숨을 내뱉곤 했다. 글을 쓰고 고치는 작업이 눈 깜짝할 새 흘러가버렸음을 깨달았던 어느 날, 글을 쓰는 순간이 바로 나에게는 Flow (다른 어떤 일에도 관심이 없을 정도로 지금 하고 있는 일에 푹 빠져 있는 상태)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세 번째, 영혼의 청소 아니 정화가 된다. 머릿속을 깨끗이 모니터에 쏟아내고 나면 쏟아진 텍스트들은 내 머릿속에서 해방되어 살아 날뛴다. 쓸데없는 고민과 상념들은 날아가 버리고 앞으로 가야 할 길까지 어렴풋하게 보이는 것만 같았다. 비워내고 남은 자리에는 적당한 여백과 마음을 토닥여주는 좋은 기운이 들어찬다.
네 번째, 영혼의 탄력이 생겨 쉽게 늙지 않는다. 일찍이 박완서 선생은 ‘작가는 창작과 휴식의 과정을 통해 뇌를 수축하고 이완하는 과정을 되풀이하기에 감각의 근육이 생겨 늙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글쓰기는 우리의 뇌까지 탱탱하게 안티에이징 할 수 있는 절호의 경험인 셈이다.
다섯번째, 글을 쓰면 아픔과 상처를 잊을 수 있다. 전형적인 A형의 소심함과 사람을 좋아하는 사교성, 앞뒤 안 맞는 두 조합의 성격을 소유한 죄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상대방의 의도와 상관없이 곧 잘 상처를 받곤 했다. 가족, 연인, 친구와 동료, 선후배들과의 관계에서 괜한 걱정과 오해로 끙끙대기도 했고 글을 좋아하는 망상가이다 보니 엉뚱한 생각이 나래를 펼쳐 상대방의 마음을 내 마음대로 지레짐작하고 결론 내버린 뒤 아파하기도 했다. 나이가 드니 안보이던 것이 보이기 시작하고 마음의 여유가 생겨 어린 시절보다 나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제 버릇 어디 안 간다고 여전히 유약한 영혼의 소유자이시다. 상처가 잊히는 것과 아무는 것은 엄연히 다르지만 글을 쓰는 그 순간만큼은 상처를 잊을 수 있다. 그리고 타인을 좀 더 다양한 시각에서 폭넓게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그 순간들과 마음의 움직임들이 쌓이면서 새 살이 차오르고 천천히 상처도 아물어간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효과들이 시너지를 이루어 글쓰기는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 세상과 내 자신에 대해 이전의 삶에서 느껴보지 못한 것들을 느끼고 깨닫지 못한 것들을 깨닫게 됨으로써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사람이 된다. 나 자신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서 잘 들여다볼 수 있게 되고 타인과 세상을 보다 폭넓게 이해하게 된다.
이렇게 쓰고 보니 그 어떤 사이비 교주도 야시장 약장수도 이렇게까지 '글쓰기'라는 약의 효과에 대해 허풍을 떨지는 않을 거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언급한 모든 것들은 모두 내가 몸소 경험한 놀라운 효과이며 그에 대한 간증이다. 결국 나는 나 살자고 나 편하자고 이기적인 의도로 글을 쓸 수밖에 없었음을 부정할 수 없기에 낯이 뜨거워진다.
평범한 주부가 어느 날 우연히 브런치를 만났고 작가의 서랍에 그동안 써두었던 글 몇 편과 새 글을 차곡차곡 쌓아두기 시작했다. 틈 날 때마다 꺼내어 고치고 고치다가 어느 날 문득 이젠 더 이상을 미루면 안 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우발적으로 허술하기 짝이 없는 자기소개와 계획서, 글 한편을 첨부하여 작가 신청을 했다. 이게 뭐라고... 가끔 입술이 마르고 초조하던 며칠이 흐르고 작가가 된 것을 축하한다는 메일을 받았다. '작가'라니...
경력단절녀로 살았던 몇 년 동안 여행을 할 때면 출입국 서류 직업란에 'housewife'라는 단어를 적으며 괜스레 쓸쓸했던 기억. '나 이제 직업란에 작가라고 써도 되는 거야?' 초등학생도 비웃을 농담을 중얼거리다가도 피식 웃음이 나온다. 글쓰기가 상처를 차오르게 하고 내 영혼을 살려내더니 급기야는 신분증까지 내어 주었다.
글쓰기를 사랑하고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은 이상하게 꼬인 구석이 있는 별종들이라 인생의 다른 길로 시선을 돌리려고 해도 잘 돌려지지 않는다. 끌려지지가 않는다. 그저 늘 글 가까이 살고 싶었을 뿐인데 글쓰기는 나를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내가 정말 그들이 불러주는 ‘그대로’ 살 수 있을까..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고 무작정 부러워할 일이 아니다.
산이 진실로 아름다운 산으로 존재하려면 거대한 바위 덩어리로는 어림도 없다. 수많은 세월을 거치고 수많은 풍상을 겪어야 한다. 견고한 바위 덩어리로서의 실체와 속성을 버리고 수만 년동안 갈라지고 바스러져서 부드러운 흙의 실체와 속성을 얻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수많은 생명체들을 키울 수 있다.
그대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이 되기를 소망하지 말고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평지가 되기를 소망하라. 한 글자 한 문장이 그대가 허무는 살과 뼈가 되기를 소망하라. 그대가 허무는 살과 뼈들 속에서 수많은 생명과 영혼들이 무성하게 자라 오르기를 소망하라.
작가 이외수는 『글쓰기의 공중부양』에서 미래의 작가들에게 이야기한다. 결국 글을 쓰기까지 지나온 내 삶의 여정은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바위덩이가 비와 바람을 맞으며 차츰차츰 평지의 흙이 되기 위해 바스러져가는 과정이었기를... 수많은 생명과 영혼이 자랄 수 있는 자양분 가득한 평지의 흙이 되는 길은 아직도 멀고도 험하지만 그 길은 기꺼이 행복하고 즐겁다.
졸지에 손바닥 위에서나마 작가가 되었다. 내 글을 읽어줄 독자가 한 명이라도 있다는 것이 이렇게 용기와 충만함을 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독자의 숨결과 생각까지 살아 숨 쉬는 신세계가 내 앞에 펼쳐졌다. 더 바랄 것이 없는 충만함으로 드러눕고 싶은 지금, 그래도 더 묵묵히 더 열심히 자판을 두드려야겠다. 내가 모르는 저 멀리 어딘가에서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줄 단 한 명의 독자를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