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고 한동안 무기력했다. 퇴근 후에는 회사 근처 PC방에서 시간을 보냈고, 그마저도 지겨워질 때면 연락처를 뒤져서 친구들을 불러냈다. 밤늦게 술에 취해 집에 들어왔고, 약속이 없는 날에는 맥주라도 마셔야 잠이 들 수 있었다. 돈을 빌려주고 못 돌려받은 사람의 심정이 이럴까. 조용히 좀 해달라는 말이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을 거란 짐작에, 지레 의욕이 꺾여버리고 마는 것이다. 애초에 아이라고 해서 망설인 내가 바보다. 부모가 마땅히 해야 할 교육을 대신했다고 그게 비난받을 이유가 될까. 아이에게는 상냥해야 한다. 남이 선을 넘을지언정, 나는 선을 지켜야 한다. 그런 건 결국 남들에게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자의식에 불과하다. 피해자는 나고, 날 위해 싸워야 할 사람도 나다.
Y에게 채팅을 보내서 아이를 쫓아갔던 일을 말했다. 아이를 미행까지 했는데도 말 한마디 못 걸었다고. 이러다가 결국 무슨 짓을 저질러버릴 거 같다고. Y라면 어떤 해결책을 주지 않을까. 나는 이제껏 Y가 은근히 보복을 부추긴다는 걸 알고도 흘려 넘겼다. 그 사람과 똑같이 행동하는 건 미친 짓이라고.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무의식 중에 선을 그었으니까. 나는 위선자였다. Y가 그런 말을 하게끔 하는 사람이 나란 걸 잘 알면서도, 나만이 고상한 사람이라는 착각에 빠져있었다. '이거 한 번 읽어보실래요?' Y로부터 PDF 파일 하나가 전송되었다. 파일을 클릭하자 낯선 건물 사진과 SilenX라는 글씨가 눈에 띄었다. 스크롤을 천천히 내렸다.
「SilenX는 층간소음 피해자의 심적 회복을 돕는 기업입니다. 저희는 단순한 소음 해결이 아닌, 고객의 정신적 평온을 목표로 합니다. 층간소음으로 인한 분노, 불면, 우울, 공포 — 고객의 마음을 가장 잘 아는 전문가가 최적의 전략을 준비합니다.」
정상적인 회사인 것처럼 설명해도, 그렇지 않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층간소음 보복 대행 회사. 적어도 합법적으로 운영되진 않을 거란 걸 짐작했다. 그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끝까지 몰리면 누구라도 물어뜯기 마련이다. 어떤 생명체도 그러한 본성에서 자유로울 순 없다.
스크롤을 더 내리자 고객 진단 설문지가 나타났다. 일주일에 몇 회나 층간소음을 겪는지, 소음이 발생하는 시간대는 언제인지, 보복을 시도한 적이 있는지 등. 꽤나 자세한 질문들이 이어졌다. 나는 그 질문이 진단보다는 검증에 가깝다는 느낌이 들었다. '조용해진다면 어떤 방법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충분히 참았다고 생각한다.'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비슷한 질문이 여러 번 반복됐다. 나는 그 질문에 바로 답할 수 없었다. 뭔가 위험한 일에 얽히는 건 아닐까. 그런 두려움이 들어서였다. 나는 파일을 최소화하고 Y의 채팅을 읽어나갔다.
"저도 처음에는 이상했어요. 누가 이런 걸 만들었는지도 모르겠고, 정상적인 회사인지도 모르겠고. 이 파일을 준 사람이 그러더군요. 그냥 한번 연락해 보라고. 솔직히 말하면 저도 못 믿었어요. 그냥 열받아서 메일을 보냈을 뿐이죠. 그런데 정말로 조용해졌어요. 몇 달간 별짓을 다해봐도 안 됐는데, 결국엔 위층에서 이사를 가더라고요."
Y가 몇 달 동안 카페에 글을 올리지 않았던 이유가 이제야 이해됐다. 아마 그 시기에 SilenX를 알게 된 게 아닐까. 그토록 다투던 위층이 갑자기 이사를 간 이유가 뭘지, 문제가 해결되고 나서야 글을 올린 이유가 뭘지. 그제야 여러 퍼즐 조각이 하나로 맞춰졌다. 외부 유출 금지 조항 같은 게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곧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층간소음 피해자들이 그렇게 많은데, 그 누구도 이런 회사를 언급한 적이 없었다. 회원수만 십만 명이 넘는 커뮤니티에서조차 이런 정보는 단 한 번도 올라온 적이 없었다. 그런데 Y는 너무 자연스럽게 그 파일을 건넸다. 처음 대화를 나눴을 때도 아니고, 이제 와서 갑자기. 단순히 나를 돕고 싶었다면 이렇게 늦을 이유가 없었다. 도와주려는 건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접근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저한테 이런 파일을 보낸 이유가 뭐죠?"
“미안해요. 사실 저, 그 회사에서 일하고 있어요. 도움을 받고 나서, 저 같은 사람들을 돕고 싶어 졌거든요. 그 뒤로는 카페를 돌면서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왔어요. 제가 봤을 땐, 당신도 그중 한 사람 같았어요. 그래서 그냥… 모른 척할 수가 없었어요.”
이제야 Y가 왜 내게 먼저 말을 걸었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되지 않았다. 왜 나였을까. Y는 내게서 대체 어떤 모습을 본 걸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당신도 그중 한 사람 같았어요.’ 그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결국 나는 파일을 다시 열었다. 설문 문항을 천천히 읽어 내려가며 답을 채워 넣었다. 조용해진다면 어떤 방법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문항에 ‘그렇다’고 적는 순간, 이상하게 머릿속이 맑아지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