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문지를 제출하고 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낯선 번호로 전화가 왔다. 그는 자신이 SilenX의 직원이라며 이름을 밝혔다. 고객관리팀 서지완. 말투부터 영업하는 사람 특유의 서글함이 묻어 나왔다. 비밀리에 운영되는 조직이라고 생각했는데, 일반 회사와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였다. 나는 경계심을 지우지 못한 채 그가 하는 말을 들었다.
“고객님, 설문 내용을 검토해 보니 스트레스 지수가 상당히 높게 측정되셨는데요. 실제로 보복을 한 적은 없다고 체크해 주셨어요. 그런데 저희가 여러 사례를 분석해 보면요. 실제로 보복을 시도하신 분들보다, 계속 참고 견디는 분들이 더 위험하거든요. 참다가 결국 심각한 수준으로 보복을 하시는 분들도 많이 봤는데요. 저희 SilenX는 고객님들이 법적인 문제로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컨설팅을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나는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낯선 사람이 은연중에 나를 위험 부류로 묶는 데에 은근한 반감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그 남자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긴 했다. 나는 온종일 그 문제에 매여 살았다. 오늘은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소음이 나는지. 그 소리의 출처가 무엇이며 어디에서 소음이 나는지, 그들에게 어떻게 경고를 해야 할지. 신경증이 도져서 머리가 지끈거렸고, 소음이 심할 때면 가슴속에 천불이 일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위층에 올라가서 욕지거리를 쏟아붓고, 가전이니 식기니 다 뒤엎어버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이성을 간신히 붙잡고 있을 뿐이었다.
“저희가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직접 찾아뵙고 소음을 측정한 뒤 대응 전략을 논의해 드리겠습니다. 정밀한 진단 후에 서비스를 안내해 드리려는데, 내일 오후 세시쯤이면 괜찮으실까요?”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알겠다고 대답했다. 통화를 끊고 나서 머릿속에는 질문들이 꼬리를 물었다. 대체 무슨 전략을 세워주겠단 건가, 정말 층간소음을 해결할 수 있단 건가. 그런 의문 끝에는 내가 어떤 불법적인 일에 연루되는 건 아닐지 두려움이 깔려있었다. 어쩌면 Y를 통해 SilenX를 알게 되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어떠한 음모가 도사리는 건 아닐까. 그러한 근거 없는 의심이 마음속에서 일었는데, 곧 터무니없는 의심이란 걸 알았다. 그들이 내게 해를 끼칠 만한 이유가 없었다. 내 삶을 시꺼먼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건, 그동안의 우유부단함과 타인의 악의조차 없는 무심함뿐이었다.
잠시 뒤 휴대폰 알람이 울렸다. 누군가의 명함이었고, 나는 그게 Y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전략기획팀의 한윤서. 곧이어 장문의 문자메시지가 왔다. 절차상 고객관리팀에서 연락을 한 거고, 실제 담당자는 본인이 맡는다는 얘기였다. 직접 찾아뵙고 자세한 안내를 드리겠다며, 책임지고 도와드리겠으니 이제 걱정하지 말라고. 형식적인 말이란 걸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그 사람이라면 정말 그럴 수 있겠다는 믿음이 있었다.
내가 생각만 했던 방법들을 거리낌 없이 실행하는 사람, 카페에 매일같이 출석 도장을 찍으며 온갖 케이스를 접해본 사람, 온갖 층소 보복 방법에 통달한 듯이 보이는 사람. 그게 Y, 한윤서였다. 이제 위층 것들은 본인들보다 더 한 사람을 만나게 될 거다. 짖는 개는 미친개한테 물려봐야 입을 다문다. 나는 그저 목줄을 느슨하게 잡고 방관할 뿐이다. 그런 생각에 이르러서야 마음이 편안해졌다. 검색해서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 회사에 대한 의심도, 윤서에 대한 불안도 모두 잠잠히 가라앉았다. 이건 복수가 아니다. 그저 균형을 맞출 뿐이다. 저울 위에서 덜 무거운 쪽에 무게추 하나를 올리는 일. 그들이 당연히 알아야 할 것들을 친절히 알려주는 일. 그 일을 한윤서만큼 잘 해낼 사람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