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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계약

by 신민철

인터폰이 울렸다. 문을 열자 윤서가 환하게 인사했다. 말간 피부에, 웃을 때 둥근 눈매가 인상적이었다. 이십 대 중반쯤 됐을까. 밝은 미소와는 달리 입가에는 긴장한 티가 났다. 그동안 채팅을 주고받았던 사람이 맞는 걸까. 그때 윤서가 불쑥 악수를 건넸다.

"채팅만 하다가 직접 뵈니 반갑네요. 들어가서 말씀드려도 될까요?"

"들어오세요. 따뜻한 차라도 한 잔 드릴까요?"

"그러면 감사하죠."

컵에 뜨거운 물을 붓고 티백을 띄웠다. 회사 동료에게 받은 캐모마일 티였다. 내가 회사에서 조는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숙면에 좋다면서 사다 준 선물이었다. 별 효과는 없었다. 그보단 스트레스를 줄이는 게 중요했다. 그게 내 마음대로 될 만한 종류가 아니라는 게 문제지만. 차를 준비하는 동안 윤서는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혐오스러운 벌레라도 봤다는 듯이 미간을 가늘게 찌푸렸다.

"오늘은 저희 서비스를 설명드리고, 동의하신다면 결제까지 진행하려고 하는데요. 지금부터 안내해 드려도 될까요?"

나는 가볍게 끄덕였다.

"저희는 소음으로 힘들어하시는 분들에게 여러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데요. 전문 상담사가 상담을 진행해드리거나, 회사와 협력하고 있는 변호사를 연결해드리고 있어요. 혼자서는 변호사 선임하셔도 증거 수집에 어려움이 많거든요. 저희는 정신과 진료기록, 수면 장애 진단지, 소음일지, 녹음파일 같은 자료들을 준비하실 수 있도록 도와드리고, 선임료도 합리적인 선에서 조율해드리고 있어요."

"... 그게 다인가요?"

윤서는 그 말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이 가방에서 서류을 꺼내 펼쳐 보였다. 첫 장에는 “고객 보호 및 비밀 유지 협약서”라는 제목이 인쇄돼 있었다. 윤서는 빨간색 볼펜으로 몇 개의 문장에 동그라미를 쳤다.

'본 서비스의 특성상, 모든 프로그램의 세부 내용은 외부로의 공유, 게시, 언급을 엄격히 금지합니다. 제삼자(언론, 온라인 커뮤니티, 관공서 등)에 관련 정보를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제공하거나, 내부 매뉴얼이나 절차 등에 관한 정보를 누설할 경우, 당사는 즉시 계약을 해지할 수 있으며, 이에 따른 손해에 대한 모든 법적 책임은 고객에게 있습니다.'

"저희는 도움이 필요한 분들에게 솔루션을 제공해 드리는 거지, 보복 대응을 하는 회사는 아니에요. 대외적으로는요. 이해하셨나요?"

윤서는 그 바로 아래의 문장에 동그라미를 치면서 말했다. '당사는 고객의 신원과 계약 사실을 그 어떤 기관에도 제공하지 않습니다.' 네가 비밀을 지키면 우리도 지켜주겠단 건가. 께름칙하긴 했지만, 서로 목줄을 쥔 관계라는 게 오히려 편안했다.

"그래서 어떻게 도와주시겠다는 건가요?"

윤서의 설명은 이러했다. 현장팀은 주일에 2회 방문하여 대응하며, 고객 요청 시 계약 종료된다. 비용은 출장 회차에 따라 부과된다. 계약 종료 이후 소음이 지속될 경우, 최초 1회에 한해 1주간(총 2회) 무상 A/S를 제공한다. 대응 강도는 현장팀의 판단 하에 달라질 수 있으며 고객의 동의 하에 진행된다. 세부 내용은 촬영 및 녹취가 불가하다.

동의할 만한 내용이었으나, 비용 자체는 꽤 부담되는 편이었다. 윤서는 일주일에 2회 출장 비용이 포함되어서 어쩔 수 없다고 했다. 대신 다른 분들보다 더 신경 써드리겠다고 공수표를 날렸다. 좀 전까지 초년생 특유의 긴장한 티는 어디 갔을까. 윤서의 쾌활함에 피식 웃음이 터졌다. 계약서에 싸인을 하자, 윤서는 서류를 잽싸게 가방에 넣었다. 무르기 없다는 듯이. 아직 식지 않은 캐모마일 향이 은은하게 맴돌았다.

"보통 평일에 한 번, 주말 한 번으로 많이 하시는데요. 상대 쪽에서 외출하는 날도 있어서 일정을 미리 정하기보다는, 저와 연락을 주고받으시면서 적절한 날짜로 정하시는 게 나을 거예요. 저희가 고객님들 편의에 최대한 맞춰드리고 있거든요. 불규칙한 시간대에 진행하는 게 효과적이기도 하고요."

윤서는 층간소음이 괴로운 이유도, 그 점을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도 잘 아는 듯했다. 소음은 예고 없이 시작돼서 언제 끝날지 수가 없다. 오늘 잘 참는다고 해서 내일 덜할 거란 보장도 없다. 우리는 소음의 폭격에 무방비하게 노출된 피해자이며, 눈을 가린 채로 어둠속에서 날아오는 채찍을 기다리는 피학자이다. 그걸 나도, 윤서도 잘 알았다. 이제는 우리가 그들의 방식으로 되갚아줄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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