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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민철 Nov 18. 2022

나의 몸을 가르고

N은 내 글을 잘 읽지 않는다. 그걸 알면서도 굳이 글을 들이민다. N은 다 읽고 나서도 입 발린 소리는 잘 하지 않는다. 대신 약간 불편한 기색을 보일 뿐이다. 그러면 나는 내 글이 좀 우울하고 자학적인 구석이 있다며 애써 농담을 던진다. 학교에서 상장을 받아온 어린아이처럼 글을 꺼내어 놨다가도 금방 민망하고 답답해진다. 때론 N이 오랜 편집자 생활 탓에 글을 읽는 데 지쳐버린 게 아닐까 싶다가도, 정말 지쳐버린 건 내 글이 아닐까 싶어 서운해진 것도 사실이다. 하긴, 내 글을 가장 오랫동안 읽어온 게 N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딱히 진전도 없고 우울하고 안쓰럽기만 한 글의 연속. 이런 글을 자꾸만 쓰고 있는 나를, N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그러나 내 글이 바뀔 일도 없고, 이런 글을 N에게 보여주는 행위도 멈추지 않을 것 같다. 내게 글쓰기란 일종의 집도(執刀)다. 마음의 종양을 감추고 있는 피부를 한 꺼풀 자르고 갈라내어, 그것을 바깥에 내어놓는 행위. 그러나 어떠한 치료도 조치도 없이, 그것을 다시 살 속에 파묻고 봉합하는 행위가 내겐 글쓰기다. 그 종양은 특별한 구석이 있어서, 어떠한 근본적인 치료법도 없는 대신에 잠깐 바깥에 내놓는 것만으로도 치유가 되곤 한다. 문제는 그 종양이 얼마간의 변태 기질까지 가지고 있는 악성이라는 데 있다. 가장 보이고 싶지 않은 대상에게 꺼내어 놓을수록 치유의 효과가 크다. 이러한 맥락에서, N에게 그것을 꺼내어 보여주는 데는 다소 일방적인 이유가 있다. 다만, 나의 가장 비겁하고 부족하고 부끄러운 모습을 5년 넘게 함께 한 연인에게 기어코 보여주려는 심리도 정상은 아닌 듯하다.






며칠 전 새로운 계정을 만들었다. 글 쓴다는 이야기를 워낙 여기저기 해놓은 바람에, 오히려 글 쓰기가 어려워진 탓이다. 이런 얘기를 쓰자니 이 사람이 볼 것 같고, 저런 얘기를 쓰자니 저 사람이 볼 것 같고. 이러다 남의 눈치가 보여서 못 쓰겠다 싶었다. 어떨 때는 나와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숨김없이 러내고 싶다가도, 어떨 때는 사소한 감정마저도 치부나 투덜거림으로 느껴져 감추고 싶을 때가 있다.


현재의 상황이 너무나 불안하고, 인간관계에 자신이 없고, 때때로 찾아오는 우울감을 견뎌내기가 어렵고... 이러한 고민을 털어놔봤자, 누군가에겐 그저 약한 소리로 들릴 게 분명하다. 특히 아는 누군가가 이 글을 본다는 것 자체가 어떻게 보면 손해이기도 하다. 나의 몸을 가르고 그 안의 복잡한 심정을 흐트러놓는 건, 그 자체로 불안정하고 엉망인 사람이라는 걸 스스로 밝히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하지만, 새로운 계정에 글을 발행하지는 않았다. 정리되지도 않은 감정을 아무렇게나 타이핑해놓고 그대로 저장해두었을 뿐이다. 끝내 글을 발행하지 않았던 건 취지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서였다. 내 이야기를 브런치에 적기 시작한 건 언제까지나 나를 치유하기 위해서, 내 불안한 감정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남들한테 이야기 못하는 말들을 꺼내놓음으로써 스스로 더 솔직해지고 싶었다. 그걸 숨긴다는 건 영혼 없이 글을 쓰는 거고, 의미 없이 시간을 보내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나를 드러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지금껏 글쓰기가 스스로를 더 음습하게 만든다고 여겼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글쓰기는 나의 부정적인 측면을 바깥으로 꺼내어 치유하는 도구였고, 들숨 전의 날숨 혹은 도약 전의 웅크림 같은 감정 순환의 장치였을 뿐이었다. 결국 나를 침울하게 만드는 건, 그저 돈 몇 푼, 인간관계의 어긋남, 의지박약 같은 사소한 것들이 다였다. 그걸 인정하지 못해서 글 쓰는 삶 자체를 탓했던 거였다. 창작자의 고뇌, 부족한 재능으로부터 오는 자괴감. 이런 것 정도는 들먹여줘야 '충분히 우울할 수 있지'라는 소리라도 들을 수 있으니까.






아마 N이 내 글을 보기 불편했던 이유는 여기에 있지 않을까. 좋아하는 사람의 못나고 약하고 비겁하기까지 한 모습이 껄끄러운 건 누구나 마찬가지일 테니까. 그럼에도 이런 글을 들이미는 건, 이런 모습까지도 사랑해달라는 투정이 아니었을까. 어떻게 보면 이렇게까지 못날 날 사랑할 수 있냐는 시험을 자꾸만 N에게 던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네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나도 나를 사랑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받고 싶었는 지도 알 수 없다. 어쩌면 낮은 자존감과 애정결핍이 글쓰기의 방아쇠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나의 마음을 글로써 풀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 자체가 나를 사랑하는 방법이라는 건 확실하니까.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로, 내가 나를 충분히 사랑해줘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나는 나의 몸을 가르고, 내 안의 것들을 다시금 꺼내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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