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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민철 Mar 11. 2023

내 삶에서 에세이를 묻다

문예창작학과에 다니면서도 정작 에세이 한 권 안 읽어본 시절의 경험담이다. 라면 끓이는 이야기도 훌륭한 에세이가 될 수 있다는 A교수의 말에 라면 끓이는 방법을 써서 과제로 제출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그때는 내가 잘 쓴다는 뽕(?)에 취해있을 때다. 물을 끓이고 면을 넣고 분말스프까지 넣었는데, 후레이크는 깜빡하고 못 넣은 이야기였다. 자세한 내용은 창피해서 더 떠올리고 싶진 않지만, 나름 구구절절한 묘사를 욱여넣은 글이었다는 건 기억난다. "이건 글도 아니다." 평소 같았으면 문장마다 짚어가며 면박을 줬을 A교수는 설명할 시간도 아깝다는 듯 화면을 넘겼다. 라면 끓이는 이야기도 에세이가 된다면서요. 따지고 싶었지만, 라면 끓이는 이야기를 가지고 시비 붙었다간 망신만 당할 게 뻔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을 만큼 창피했던 그 기억이 내 첫 번째 에세이였다.

두 번째 에세이는 돌아가신 할머니에 대한 글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면> 그때 쓴 글이 따로 남아있지 않아 기억을 더듬어가며 다시 적은 내용인데, 그때가 체감상 몇 배는 더 감정적인 데다가 난잡하게 썼다. 고인이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아 감정이 더 복받쳐 올랐던 것 같다.

그 글을 울면서 낭독했다. 복학생인 터라 두 학번 아래의 후배와 동기들까지 있는 자리였다. A교수는 내가 말을 못 이어나갈 때까지 낭독을 시켰다. 다소 악질적인 행태가 아닐까 싶다만, 지금은 그것마저도 일종의 교육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기억이 무뎌졌다. 내가 더 이상 못 읽겠다며 포기하고나서야 A교수는 내 글을 이어받았다. "울고 싶을 때 안 울어야 좋은 글이다." 낭독을 마치고 나서 A교수가 한 말이었다. 그때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내 안의 설움을 다 드러내지 못하는 글이 어떻게 좋은 에세이가 될 수 있겠냐고. 그런 글은 알지도 못하고 쓰고 싶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그게 내 두 번째 에세이의 기억이다.

세 번째 에세이는 꽤 오랜 기간에 걸쳐서 쓰였는데, 나는 내가 다시 에세이를 쓸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대학을 다닐 때만 해도, 다른 글에는 관심도 없었고 오로지 소설만 쓸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회사 업무 시간에 몰래 쓴 일기로부터 세 번째 에세이가 시작될 줄은 짐작지도 못했다. 업무에 대한 불만, 쓰지 않고 살아간다는 결핍감, 미래에 대한 불안과 잦은 우울감. 그것들을 짬뽕해서 쓴 글이 한 편 두 편 쌓여가기 시작했다. 그게 내 브런치의 글이 되었다. 그동안의 글이 대부분 자괴감과 결핍의 덩어리로 이루어진 것도 이러한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야말로 결핍의 표출이었고 감정의 배출이었다. 그래서 쓰는 동안 괴로웠고, 때론 힘들었고, 쓰고 나면 후련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나의 에세이는 크게 세 단계로 변화해 온 것 같다. 무지의 글쓰기, 폭발하는 감정의 글쓰기, 결핍의 글쓰기. 이제는 그다음이 뭘지 궁금해졌다. 무엇을 담아야 좋은 에세이가 될 수 있지? 그건 아마도 이해의 글쓰기, 사랑의 글쓰기가 아닐까. 이러한 생각에 이르자 다음 단계까지는 아직 멀었구나 싶었다. 쓰기의 스킬보다는 정신적인 수양이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마저 든다. 물론 그전에 이루어져야 할 건 무엇보다 '내 안에 타자(他者) 들이기'가 아닐까 싶다.

A교수의 마지막 합평이 떠오른다. "네 글에는 타자(他者)가 없다." 그때는 그 말이 단순히 주관적 표현을 삼가라는 뜻인 줄 알았는데, 지금에 와서는 그 말이 단순히 글에 대한 얘기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5년이 넘게 걸리고 만 것이다. A교수의 말처럼 내 글에는 정말 나만 있었다. 다시 읽어봐도 대부분의 글이 그랬다. 항상 내 감정을 우선했고, 타자를 배제했고, 사랑할 줄을 몰랐다. A교수는 내가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려는 노력 자체가 너무나 부족한 사람이라는 걸 오랜 시간에 걸쳐 납득시키고 교육한 거였다. 조금은 분지만, 그보다는 감사한 마음이 더 컸다. 내 나이 서른까지도 미리 학습할 내용을 숙제로 남겨두다니. 아마 이 숙제는 앞으로 살아가면서 오랫동안 풀어야 할 난제가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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