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축한 비냄새가 공기의 구석구석까지 퍼져있고 쌀쌀한 공기가 신주의 볼을 스친다. 마른 몸에 또래보다 앳되어 보이는 신주가 버스정류장에 서 있다. 휙 바람이 불었고 차가운 느낌에 신주가 양손에 김을 호호 불어서 볼을 감쌌다. "아얏." 그의 손이 귓불에 스쳤을 때 신주는 통증을 느꼈다. '날씨도 나를 아프게 하는구나.' 신주가 속으로 투덜댔다. 그는 버스의 도착을 알리는 전광판을 힐끗 보았다. '뭐야!' 2분 뒤에 도착한다던 버스가 종점에 있다는 표시로 바뀌었다. 옆에는 눈이 온다는 날씨표시가 있었다. 20분 뒤 종점에서 출발 예정이라는 문구는 신주가 여기서 30분은 더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었다.
신주는 정류장 의자에 털썩 앉았다. 신주의 뒤로는 복잡한 버스 노선도가 그려져 있었다. 다행히도 신주가 앉은 의자는 따뜻했다. 그는 삼십 분 동안 볼 유튜브를 골랐다. 시시덕거리면서 볼만한 영상들 사이를 비집고 어느샌가부터는 정치 얘기들이 신주의 알고리즘에 나오기 시작했다. '언제 도착?' 친구 녀석의 연락이 신주의 핸드폰 화면에 떠올랐다. '버스 놓쳐서 늦을 듯? 삼십 분 정도?' 신주는 친구에게 후다닥 답장을 했다. 곧 친구의 답장이 왔다. '빨리빨리 다녀야지. 오늘은 내가 사는 거니까 좀 기다리지 뭐.' 신주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친구는 얼마 전에 취업을 했다. 동기들 중에서 제일 빨리 제일 좋은 곳에 취직을 했다. 마지막 면접을 보고 의기양양하게 강의실에 들어서던 모습은 마치 장원급제해서 어사화를 꽂은 선비 같았다. 왜인지 녀석은 집으로 바로 안 가고 완전히 편하지만은 않은 정장을 빼입은 채 돌아왔다. '익숙해져야지.' 친구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나는 언제쯤 익숙해질 무언가가 생길까? 학교를 졸업하면 이제 이곳에서 이사도 나갈 건데. 어디에 자리를 잡아야 하지?' 신주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복잡한 머리와는 반대로 신주가 앉아있는 버스정류장은 너무도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티브이에는 연일 지금의 20대는 부모보다 가난한 최초의 세대가 될 것이라고 떠들어댔지만, 항아리 속에 빠진 개구리처럼 허우적대는 사람은 신주뿐이었다. '후. 이런 생각하지 말아야지.' 신주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몇 번 콩콩 뛰어댔다. 그리고는 자세를 낮추어 스쿼트를 몇 번 하려고 했다. 두 번인가 내려왔다 올라갔다 하자 옆에서 누군가가 헛기침을 했다. 백발의 노인이 신주를 보며 계속하라는 듯 손짓했다. 신주는 머리가 구름처럼 하얀 할머니를 보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할머니는 단정하게 옷을 차려입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두어 번 더 스쿼트를 했고, 할머니와 최대한 멀어지도록 정류장의 구석에 자리 잡았다.
"학생." 할머니가 신주를 불렀다. 가방에서 귤 몇 알을 꺼내던 참이었다. 할머니는 신주를 향해 귤을 내밀었고 신주는 괜찮다는 듯 손사래 쳤다. "학생. 이거 우리 동생이 농사지은 거야." 할머니도 지지 않고 귤을 손바닥으로 쥔 채 신주에게 내밀었다. 신주는 난처한 듯했지만 이내 귤을 받아 들고는 할머니를 향해 꾸벅 인사했다. "밥을 잘 챙겨 먹어야지.." 할머니가 중얼댔다. 신주는 귤을 주머니에 넣으려다가 할머니의 눈치를 한번 보고는 귤을 슬금슬금 깠다. 사실 신주는 좀 허기가 지던 참이었다. 귤의 껍질은 잘 벗겨졌다. 한 번에 벗겨져버린 귤은 자주 피곤하고 지독한 패배감을 느끼며 휙 나가떨어져버린 신주 같았다. 어느새 삐죽삐죽한 귤락이 붙은 동그란 귤이 배슬거리며 웃고 있었다.
"요즘 어린애들은 어리면 안 되는 것 같아. 그렇죠? 취업 준비하랴 공부하랴. 학생도 바쁘죠?" 한참의 정적을 깨고 할머니가 말했다. "아니 뭐.. 저는 괜찮아요." 신주가 대답했다. 공기는 여전히 차가웠다. "우리 손주가 우울증이 있어요. 맨날 힘이 없고 슬프다는데 나는 힘차게 사는 젊은 이들 보면 든든하고 부럽고 그래." 버스 한 대가 멀리서 다가왔다. "학생, 혹시 버스 몇 번인가?" 노인이 물었다. "31번이에요." 신주가 대답했다. "고마워." 할머니가 일어나 떠날 채비를 했다. 할머니는 신주를 보며 웃어 보였다. 하지만 신주는 선뜻 할머니의 미소에 미소로 화답할 수 없었다. 우울증에 걸렸다는 할머니의 손자의 일이 남의 일이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신주가 타야 할 버스는 10분 뒤에 도착했다. 도로에는 차들이 지나다녔다. '나는 언제쯤 차를 살 수 있을까?' 학교 끝나고 자기 차로 집에 가는 친구들은 무슨 복일까 싶은 생각이 스쳤다. 부러웠다. '곧 일자리를 구하고 월급을 삼백에서 사백 사이로 받으면 언제쯤 차를 사고 집을 살 수 있을까?' 먹고, 자고, 입는 것도 필수이지만 좋은 음식을 먹고, 내 집에서 편안히 자고, 깔끔하고 단정하게 입기 위해서는 시간도 좀 있어야 한다. 친구가 들어가게 된 회사까지 여기서 출퇴근을 한다면 얼마나 걸릴지 신주는 떠올렸다. 대중교통으로 가나 차로가나 출근시간은 비슷할 것이었다.
친구를 만나고 나서 아르바이트를 가려면 서둘러야 했다. 신주는 계속해서 손목시계와 정류장의 도착시간을 번갈아 보았다. 볼이 추웠다. 눈이 온다더니 하늘에서 소곤소곤 속삭이듯 하얀 눈송이가 낙하했다. 신주가 손바닥을 하늘을 향해 눈발 속으로 밀었다. 깃털 같은 눈발이 신주의 손 끝에 나풀대며 앉아있다 벼랑에서 떨어지듯 사라졌다. 깜짝 놀란 신주는 자신의 손 끝에서 떨어진 눈송이를 다시 잡으려 했지만 비듬처럼 자그마한 그것은 떨어지질 않았다. 다만, 그것은 신주의 손톱에 간신히 붙어있었다. 벼랑 끝에 간신히 붙어 끝까지 버티고 앉았다.
오랜만에 브런치에 글을 썼습니다!
이번에는 역시 아주아주 짧게 금방 읽을 만한 글을 썼어요.
시끄러운 시간이 지나가면서 우리는 좀 더 성숙해지리라 믿고,
글 속의 신주도 좀 더 어른이 되어갈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가을학기를 마치고 조금 여유를 찾았는데요.
그간 마음고생과 몸고생을 하면서 글쓰기에 좀 소홀했던 것 같습니다.
다시 부지런히 쓰도록 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