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채식주의자
한국인 최초 맨 부커상 수상, 알고 보니 <아제아제 바라아제> 한승원 작가의 딸 등 많은 화제를 낳은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
나도 언론에서 호들갑을 떨고 나서 책을 구입했다. 우선 궁금해서 찾아보니
맨 부커상은 원래 출판과 독서증진을 위한 독립 기금인 북 트러스트(Book Trust)의 후원을 받아 부커 그룹(Booker Group)의 주관으로 운영된다고 한다.
2002년부터 금융기업인 맨 그룹(Man group)이 상금을 후원하면서 명칭이 부커상에서 맨 부커상으로 바뀌었다.
2004년 6 월년부터 영어로 출간되거나 영어 번역이 출간된 작가오 작품을 대상으로 주는 상을 만들었는데 이게 맨 부커 국제상(Man Booker International Prize). 한강 작가가 받은 상이 맨 부커 국제상이다.
외국에서도 3대 문학상이라고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언론에서 말하는 3대 문학상은
맨 부커상
공쿠르상
노벨 문학상
이다.
나 같은 속물이 생각하는 3대 문학상을 정하는 기준은 역사와 상금이다.
1968년 시작한 맨 부커 상은 2016년부터는 맨 부커 국제상을 개편하여 영어로 번역된 소설을 대상으로 수상자를 선정하며, 상금 5만 파운드는 원작자와 번역가에게 분배된다. (약 7천4백만 원. 기사에선 8천100만 원이라고 쓰여 있는데 브렉시트로 파운드 가치가 많이 낮아졌나 보다. 한강 씨가 빨리 환전을 했기를)
얀 마텔의 <파이 이야기>는 2002년 맨 부커상을 받았다. (이안 감독이 영화로 리메이크 한)
참고로 살만 루슈디의 <한밤의 아이들>은 1981년에 한 번, 1993년 부커상 25주년에 선정한 '부커 오브 부커스', 2008년 40주년엔 '베스트 오브 부커'를 수상해 유일무이 한 3번이나 부커상을 수상한 에피소드가 있다.
공쿠르상은 1896년 에드몽의 유언에 따라 전재산을 아카데미에 기부하고 가난한 예술가를 돕기 위해서 처음 만들어졌다.
수상자에겐 50프랑, 유로화로 바뀌면서 10유로로 바꿨는데 상금은 상징적인 금액이고 수상작은 엄청난 명예를 얻게 된다. 역대 수상작은 평균 60만 부 이상 팔리고 30여 개의 언어로 번역된다.
<어린 왕자>로 익숙한 생텍쥐페리가 <야간비행>으로 이 상을 받았다.
공쿠르상은 원칙 상, 한번 상을 수상한 작가에게 다시 상을 수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1956년 <하늘의 뿌리>로 공쿠르상을 수상한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자기 앞의 생’을 발표해 공쿠르 상을 받는다. 첫 번째 수상 이후 그에 대한 관심이 사그라지자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작품을 내놓은 것이다. 그러자 에밀 아자르는 신예 천재 작가라는 세간의 관심을 받는다.
훗날 그는 66세에 유서를 남기고 권총으로 자살을 선택하는데 유서엔 ‘에밀 아자르와 로맹 가리는 같은 사람’이라고 써 세상에 사실을 알렸다. ‘나는 마침내 나 자신을 완전히 표현했다.’라는 표현과 함께.
노벨 문학상은 너무 유명해서 자세한 설명은 필요 없을 듯하다. 1901년부터 시작된 이 상은 노벨의 유언 "이상적인 방향으로 문학 분야에서 가장 눈에 띄는 기여를 한 사람에게 수여하라." 따라 시상되고 있는데, 그래서 작품이 아닌 작가에게 상을 준다. 그래서 오래 살아남아서 길게 작품 생활을 하는 작가가 유리하다고 한다.
노벨상 수상자는 노벨이 새겨진 금메달과 노벨재단이 1년 동안 운영한 기금 이자 수입의 67.5%를 부분 별로 나누기 때문에 해마다 변동이 있다.
2011년 상금은 1천만 kr 스웨덴 크로나로, 한화로 계산하면 대충 13.6 억 쯤 되겠다.
참고로 사르트르는 노벨상을 거부했다. (스웩....)
서론이 너무 길었는데 이 책은 뭔가 좀 신비롭다. 한국 작가들의 장점이자 단점이 미문(美文) 주의, 즉 문장을 너무 예쁘고 추상적이게 쓰는 점이라고 하는데 이 소설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맨 부커 쪽 관계자들은 번역 본을 읽어봤을 테니 비교가 정당하진 않겠지만 외국인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를 개인적으로 생각해보면
가볍게 나오긴 하지만 개고기를 먹는다는 이질적인 문화가 나온다는 것,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폭력과 강압, 묘하게 섹슈얼한 문장들과 금지된 것들에 대한 내용들이 흥미를 준다는 점 아닐까.
실제로 강력하고 근원적인 소설, 압축적이고 정교하고 충격적인 이야기로 아름다움과 공포의 기묘한 조화를 보여줬다는 평을 받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서 나오는 섹슈얼함과는 다르게 <채식주의자>의 섹슈얼함은 전혀 흥분되지 않았다. 농담 없이 무거운 이 소설은 의무적으로 시작했지만 상처와 치유 사이에서 여성으로서, 누군가의 딸이자 아내, 동생이자 언니라는 사회적 역할을 벗어던지고 싶은 처량한 여성의 삶을 보여준다.
<채식주의자>의 주인공 영혜는 어렸을 때 느낀 상처는 갑자기 찾아왔고, 치유되지 않는다.
<몽고반점>의 주인공인 영혜의 누나는 남편과 영혜에게 배신의 상처를 입지만, 치유되지 않는다.
<나무불꽃>의 주인공인 영혜와 그녀의 누나는 모두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마석 어딘가에 있는 요양원으로 가지만 둘 다 치유되지 않는다.
....... 어쩌면 꿈인지 몰라. 꿈속에선, 꿈이 전부인 것 같잖아. 하지만 깨고 나면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거 알지....... 그러니까, 언젠가 우리가 깨어나면 그때는.......
치유받지 못한 외롭고 지친 동물인 그녀의 누나가 영혜에게 하는 말인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말을 내뱉으며 소설은 끝이 난다.
우연히 꿈에서 나타난 옛 기억 때문에 영혜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사람은 고구마 줄기처럼 엮여있는 존재라 한 명이 망가지면 주변 사람들이 모두 망가지기 시작한다. 영혜의 남편이 그랬고, 언니의 남편이 그랬고, 언니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욕망을 선택한 사람들도 모두 파멸해갔다. 하지만 영혜는 후회하지 않을 것 같고, 영혜 누나의 남편도 자신의 인생 역작이자 금지된 것을 행했다는 묘한 흥분감 때문에 후회하지 않을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선택은 자신의 몫이니까.
그런데 책임은 자신의 몫이 아닌 경우도 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