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공모전에 내려고 쓴 서평이라 솔직함보다는 공모전에 적합한 문장으로 쓴 느낌이 좀 있다. 거짓으로 감상평을 썼다는 건 아니고 목적이 맞는 뉘앙스로 썼다는 뜻으로 이해해주시길
부끄럽게도 소설을 다 읽기 전에 책 뒤쪽에 있는 서평을 자세히 읽었다. 물론 서평이라고 하기엔 짧은 문장이었다. 책 뒤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역사의 상처라는 무게에 짓눌려 단 한 번도 ‘존재의 가벼움’을 느껴 보지 못한 현대인, 그들의 삶과 사랑에 바치는 소설]
책을 오롯이 혼자서 읽어 본 후에 꼭꼭 씹으며 책을 받아들이고 공감하고 비판한 후에 서평이나 감상평을 읽고 다시 소설을 읽는 방법을 선호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책을 다각적으로 읽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보통 서평이나 작품평은 소설이 끝난 후 챕터를 할애해서 있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래서 책을 만지작거리다 뒤 커버를 봤고 뒤 커버에 있는 저 문구를 발견해서 읽었다. 단순한 한 줄 평 정도로 생각했다가 문득 싸한 느낌이 들어 책 안을 살펴보자 작품평이 없음을 확인하고 다소 허탈했다. 토마시가 테레사를 만나기 위한 6개의 우연에 비하면 보잘것없지만 우연히 책을 만지작거리다가 개인적은 습관과는 다르게 책을 읽게 된 것이다. 다소 우울했지만 우울함보다 더 크게 호기심이 일렁였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역사의 상처라는 무게에 짓눌려 존재의 가벼움을 느끼지 못한 현대인’들의 아픔을 느끼고 공감할 수 있을까? 이 호기심은 도전과제로 변질됐다. Muss es sein?(그래야만 하는가?)란 호기심이 Es muss sein!(그래야만 한다!)란 결심이 된 것이다. 이 무겁지만 묵직한 결심을 벗 삼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마지막 문장이 끝나고 책을 덮었을 때 내게 주어진 도전과제는 실패로 돌아갔음을 깨달았고 스스로의 얕은 내공에 자책했다. 꽤나 공들이며 읽었음에도 존재의 가벼움을 느끼지 못하는 현대인을 느끼지 못했다.
네 남녀의 사랑은 오늘날 ‘참을 수 없는’ 생의 무거움과 가벼움을 오가는 현대인의 자화상이라고 한 문장도 가슴 깊이 공감하기 힘들었다. 억지로 이해하라면, 혹은 숱하게 해왔던 것처럼 공식처럼 외우라고 한다면 누군가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대해 물어봤을 때 대수롭지 않게 ‘밀란 쿤데라의 그 소설은 역사의 상처에 의해 존재의 가벼움을 느끼지 못한 현대인의 삶과 사랑에 바치는 소설이야. 이 소설은 1968년 프라하의 봄이라는 민주화 운동이 일어난 시기를 ~~~’라며 최대한 외운 티 나지 않게 읊을 자신은 있다. 하지만 그 후 밀려오는 자괴감을 감당한 자신은 없다. 소설을 다시 읽고 곱씹을수록 희미하게 작품평을 이해할 것 같았지만 너무도 희미해서 조금만 정신 집중을 하지 못하면 금세 희미한 이해의 끈은 끊어져버린다. 네 남녀가 살았던 시대를 이해하고 감정 이입을 해야 조금이나마 그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다.
두 번째 읽었을 때 문득 생각했다. 역사의 상처라는 무게에 짓눌려 그들은 불행했을까? ‘존재의 가벼움’을 느끼지 못한 그들의 삶과 사랑은 아팠을까? 이에 토마시는 소설에서 이렇게 말한다. “테레자, 내가 이곳에서 얼마나 행복한지 당신은 모르겠어?” “임무라니, 테레자, 그건 다 헛소리야. 내게 임무란 없어. 누구에게도 임무란 없어. 임무도 없고 자유롭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얼마나 홀가분한데.”
언뜻 생각하면 ‘존재의 가벼움’을 느낀 토마시가 느낀 행복의 감정으로 그전까지 토마시의 삶은 고통스러웠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토마시에게 상처가 없었다면 자유를 느끼고 행복을 느낄 수 있었을까? 토마시에게 가해진 무거운 사건들을 통해 토마시가 ‘존재의 가벼움’을 느꼈고 테레자에게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면 역사의 상처가 불행한 듯 보였지만 사실은 행복을 찾기 위한 (조금은 가혹한) 수업료라고 할 수 있다.
사비나는 가벼웠지만 외로웠고 정신적도 육체적으로도 제대로 정착하지 못했다. 책의 표현을 인용하자면 ‘그녀는 미국을 아주 좋아했다. 그러나 단지 껍질만을 좋아했다.’며 책에서의 사비나의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반면 프란츠는 캄보디아 여행을 통해 ‘그가 이 여행을 한 것은 자신의 진정한 삶, 유일한 실제 삶은 행진도 사비나도 아니며 안경 낀 여학생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물론 식물인간이 된 후 진정한 삶을 깨닫는 것은 안타깝지만 그에게 캄보디아 여행이라는 사회의 명령이 없었다면 그는 자신의 진정한 삶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갔을 것이다.
결국 역사에 의해, 사랑에 의해 고통받은 영혼들은 비록 값비싼 대가를 치르긴 했지만 결국 자신의 삶을 사랑했고 깨달았다. 감옥을 경험한 사람이 자유의 소중함을 알 듯, 산 정상에 올라가기 위해선 가파른 절벽을 넘어야 하듯, 무거움을 경험한 이들은 결국 가벼워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