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 농담
고전을 읽는 건 항상 힘들다. 400페이지가 넘어가면 더더욱 그렇다. 각 잡고 빠르게 읽지 못한다면 등장인물이 헷갈려 더욱 힘들어진다.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읽다가 포기한 이유다. (할아버지도 아르카디오, 삼촌도 아르카디오, 아버지도 아르카디오, 아들도 아르카디오)
물론 읽는 게 힘들다고 재미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농담>도 재미있고, 다른 앵간한 책들도 재미있다. 단지 더 재미있는 다른 것들이 더 많다는 함정이 있지만 말이다.
2차 세계대전과 공산주의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읽으면 특유의 쓸쓸함이 곳곳에 묻어있다. 문체가 담담하고 삶의 의지가 크게 담겨있지 않고 적적한 느낌. <농담>도 마찬가지다.
그러더니 그녀가 한쪽 손을 들었는데, 그것은 마치 그런 몸짓을 한 번도 해본 적도 업고, 어떻게 해야 되는지도 모르며, 단지 작별 인사로 손을 흔든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어서, 어색하지만 그 동장을 해보기로 결심한 사람이 손을 드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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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어느 날, 아버지는 부고장 하나를 받았다. 루드빅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다. 우리는 아무도 그분이 편찮으시다는 것을 전혀 짐작하지 못했었다. 루드빅이 내 지평에서 사라졌을 때 그분에 대한 내 생각도 멈추었던 것이다. 검은 테두리를 두른 그 종이를 받아 들도 나는 조금이라도 내 삶의 길과 멀어지게 된 사람들에게 내가 얼마나 무관심했는가를 발견했다.
<농담>의 주인공 루드빅 얀은 그런 잿빛 분위기를 싫어한다. 재치 있고 사회주의에 회의를 가진 이 청년은 마르케타에게 농담 섞인 문장으로 당을 비꼬고 사랑을 고백하기 위해 편지를 보냈지만 당에 충성충성충성하는 그녀는 루드빅의 편지를 위원회에게 고발한다.
-그런데 말이야, 마르케타. 내가 한 일이 정말 범죄라고 생각해?
-응, 그렇다고 생각해.
-네 생각에는 내가 당에 남아 있을 권리가 있는 것 같아, 없는 것 같아?
-남아 있을 수는 없을 거야, 루드빅
너무도 비장해서 공포스러운 마르케타의 기계 같은 차가움으로 루드빅은 농담 한번 잘못했다가 당을 배반했다는 검정 표지를 박은 채 탄광으로 끌려간다.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루치에와 사랑에 빠지지만 루치에는 어렸을 때 성폭행당한 경험 때문에 인생에서 농담을 잃은 존재다. 그래서 루드빅은 그녀와 제대로 몸을 포개 보지도 못한다.
- 왜 그렇게 나를 뿌리치는 거야?
그녀는 화내지 말라고, 자기를 미워하지 말라고 더듬거릴 뿐 무슨 조리 있는 분명한 말을 하지 못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몰라? 넌 정말 미쳤어!
-그럼 나를 쫓아내면 되잖아
-그래, 쫓아낼 거야. 넌 나를 사랑하지도 않으니까, 나를 조롱이나 하고 있으니까!
....
그녀는 울먹이며 계속 내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세 번째 사랑은 헬레나와의 사랑이다. 물론 이 사랑은 루드빅의 사랑은 아니다. 루드빅은 자신이 당에서 추방된 것이 파멜 제마넥의 탓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제마넥의 아내인 헬레나를 취함으로써 나름의 복수를 꿈꾸는 것이다. 가학적인 성관계가 이루어지지만 이 둘의 말로는 농담만큼 우스꽝스럽다.
<농담>은 밀란 쿤데라의 첫 장편 소설이다. 작가는 체코에 거주했을 시절인 1950년에 당에 노선과 다른 행동을 이유로 당에서 추방됐다. 이 경험과 사상이 <농담>의 주요 모티프를 이룬다. (그래서 쿤데라의 글을 1989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 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금서였다.)
농담 한번 잘못해서 군만두만 먹으면서 탄광에 갇힌 루드빅, 당에 충직한 시민 마르케타, 당과 국가의 전통문화를 지키고 싶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한 야로슬라브, 기독교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코스트 카, 아무런 이데올로기에 속하지 않은 채 일상을 잃어버린 가난하고 초라한 여인인 루치에. 죽음을 각오한 헬레나의 희극적인 결말로 이루어진 <농담>은 우울하고 쓸쓸하다. 마지막 장에 와서야 피식하고 웃을 수 있는 이 책은 쿤데라가 당에서 추방당했을 때 감정과 추구하는 가치를 어렴풋이 말해준다.
원래 최악의 농담은 상대방이 그 농담을 농담인지 모를 때이다. 갸우뚱한 상대에게 부득부득 농담의 뜻을 설명해주는 사람에겐 설명충이란 단어가 아깝지 않다.
<올드 보이>에서 오대수를 통해 입 조심을 배운다면 <농담>에선 농담 조심을 배울 수 있다. 때와 장소를 가려가며 하는 농담은 유머러스한 사람으로 인정받지만 그렇지 않으면 아오지 탄광행이다. 다들 조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