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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 Jan 21. 2019

헤어진 남자 대하는 법

헤어진 남자와 한 달간 포옹하기 16. 헤어지고 17일 차

오늘도 널 못 만났다. 오늘 역시 회사 비번을 서야 한다고 한다. 또 갑자기 정해진 건지 밤 9시가 되어서야 알려준다. 내가 오후 중에 '오늘은 볼 수 있어?'라고 미리 물어봤으면 괜히 기다리거나 재지 않아도 됐을 텐데 그러기가 싫었다. '고생이네. 언제까지 네가 계속 비번인 거야?'하고 물으니 '믿을 만한 사람이 한 명 늘어날 때까지일듯ㅠ'이라는 답변이 온다. 너무 기약이 없어서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이제 찾아오지 말라는 얘기인가, 끊더라도 내가 끊어야 하는데. 답장을 하지 않았다. 어제에 이어 난 좀 삐쳐 있는 듯하다. 지금 이 관계에서 삐친다는 게 무슨 소용인가 싶지만.


사실 이럴 것 같아서 안 물어보기도 했다. 그래서 저녁에 친구와 약속을 잡아둔 터였다. 너의 카톡을 받았을 때쯤엔, 친구가 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법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중이었다.


너와 헤어지고 나서 일에 의지했다. 슬픔이 잠식하기 전에 서둘러 나를 어딘가에 피신시켜놔야 했다. 이럴 때는 영화를 보는 것, 노래를 듣는 것, 친구를 만나는 것, 글을 쓰는 것 다 위험하다. 자꾸 너로 귀결된다. 주의를 돌리기에는 일만 한 게 없었다. 일 하는 동안은 널 생각하지 않았다. 내 구질구질한 상황도 일단 뒷전이다. 게다가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노라면 고난 속에서 왠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 같은 (착각에) 위안이 된다. 그렇게 워크 앤 라이프 중 라이프(너)를 빼고 워크 앤 워크로 채워 넣었다. 처음에는 일이 나를 구원하는 듯했다. 오케이 계획대로 되고 있어 하던 차에, 점점 일의 흥망이 내 상태를 좌지우지하기 시작했다. 괜히 욕심을 부리고 기대가 큰 만큼 대차게 좌절하고 불만을 만들어냈다. 일이 잘 안 될 수도 있는 건데 그 영향을 정통으로 받았다. 이런 황무지 같은 마음가짐에서 가장 먼저 그르치게 되는 것이 관계다. 동료와의 관계까지 삐그덕 대려는 차였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친구는 대학교 친구다. 그때부터 인생 2회차인 듯 경험 많고 쿨한 친구였다. 그 친구가 여느 때처럼 노련하게 말하길, 일적인 관계인데 감정이 상하거나 신뢰도가 떨어진 경우 '헤어진 남자 대하듯이' 하란다. 아니, 일적인 관계는 둘째치고 헤어진 남자를 어떻게 대해야 한다는 건가.


"헤어진 남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데?"

“내가 널 되게 사랑하지만, 나는 네가 없어도 충분히 멋진 사람이고 괜찮아. 이런 당당하고 단호한 태도를 정확하게 보여줘야지. 이래야 나 자신도 지키고, 상대방도 나중에 아쉬워할 여지가 생겨."


친구는 일에서도 마찬가지라며 말을 이어갔지만, 나는 헤어진 남자를 대하는 법에 대한 친구의 말을 곱씹었다. 친구는 내가 너와 헤어졌다는 걸 모르고 한 얘기지만. 열흘 전쯤 이 말을 들었다면 들었으되 들은 것이 아닌, 실천하기 어려운 조언이었으리라. 그때만 해도 '나는 너를 사랑하지만'은 유효해도 '네가 없어도 충분히 멋지고 괜찮은 사람'이라는 데는 자신이 없었다. 못난 감정들을 버텨낼 수는 있어도 잘난 감정을 지어내 보여주기에는 힘이 부족했다.


정말 우리의 날들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낀다. 그래서 친구가 말했던 ‘헤어진 남자를 대하듯이' 너를 대할 수 있을 듯하다. 진짜 헤어진 남자가 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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