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진 남자와 한 달간 포옹하기 15. 헤어지고 16일 차
자정을 넘기고서야 너에게서 연락이 왔다.
"아 나 오늘 회사 비번이라 아침에 들어가ㅠ"
오늘은 너의 회사 서비스 출시일이었다. 정말 기다리던 날이다. 너만큼이나 나도. 축하하려고 일찌감치 꽃다발을 사뒀다. 부담스럽지 않게 작은 걸로.
오늘은 일과의 전쟁을 벌인 하루였다. 전방위로 펼쳐진 일들 사이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혼이 쏙 빠지고 마감도 못 지키고 실수가 잦았다. 밤 11시 반쯤 미처 마무리되지 못한 일을 억지로 오므리고 퇴근을 서둘렀다. 집에서 가는 게 아니라 사무실에서 가는 거라 이동 거리가 있으니 지금 일을 끊지 않으면 너보다 늦게 도착할 수도 있다. 택시를 타고 바로 너네 집으로 가려고 콜 택시를 부르는데 영 안 잡힌다. 마음이 급해진다. 일단 길에 나가서 직접 택시를 잡아야겠다. 오늘 밤부터 기온이 훅 떨어져서 옷 사이로 찬 바람이 매섭게 스민다. 15분쯤 발을 동동 구르다가 가까스로 택시를 잡았을 땐 바람으로 후드려 맞아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다. 그렇게 한참을 가던 중에 너에게서 저 카톡을 받았다.
비번인 게 갑자기 정해진건가, 아니면 설마 내가 기다리고 있다는 걸 깜빡한건가. '아 나'는 갑자기 비번을 서게 되어 당황스럽다는 '아놔~'의 의미인가, 아니면 '참! 있잖아'라는 의미인가. 후자라면 나에 대한 배려가 너무 없는 거 아닌가. 화가 나려는 걸 참고, 택시 타고 가던 중인데 회사 앞으로 갈까? 물었더니 오늘 꼴이 엉망이고 상사와 같이 뭐 보고 있어서 나가기 좀 힘들 것 같단다. 상황은 이해가는데, 내 손에 들린 꽃다발이 황망했다. 그냥 집에 갈까 하다가 행선지를 고치지 않고 너의 집으로 그대로 향했다.
너의 집에 왔던 모든 순간 중 지금이 최악이다. 오지 않을 너를 기다린 적은 없었다. 넌 환기한다고 창문을 모두 열어두고 가곤 하는데 오늘 갑자기 추워져서 그런지 방 전체가 황량하기 그지없다. 안 그래도 차디찬 몸과 마음이 더 싸늘해졌다. 춥고 남의 집 같아서 겉옷 벗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렇게 춥게 만들어놨으면서 여전히 안 빠진 쾌쾌한 자취방 냄새가 몸서리치게 싫어졌다.
펑펑 울었다. 오늘 뭐 하나 뜻대로 되지 않는 하루였는데, 축하까지 못해줬다. 사실 그 잘난 서비스 출시하느라 우리의 마지막이 앞당겨진 것 같아 한동안 사람도 아닌 걸 원망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같은 직업인으로서 정말 고생했다고 꼭 안아주며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싶었다. 너가 얼마나 고생했고 기대했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봐왔기에, 또 나 역시 과거 그 터널을 거쳤기에 의미가 남다르게 다가왔다. 그래서 오늘 같이 좋은 날 그 기분을 함께 하고 싶었다. 그다지 어렵지 않은 기대라고 생각했는데 그걸 못하게 되니 맥이 탁 풀려버린 것이다. 그렇게 하염없이 울다보니 내가 오늘 하루를 너로 인해 버티고 있었던 걸 깨달았다. 꼭 오늘 뿐이랴. 헤어지고 나서는 너에게 좋은 모습만 보여주기 위해서 감정을 컨트롤했다. 헤어지기 전에는 너가 토닥거려준 덕에 하루하루 잘 이겨낼 수 있었다. 이제나 저제나 나는 너에게 의지하고 있던 것이다. 너를 못 만나게 되어버리니 이 부정적인 감정들에 지지않고 버티고 있지도 못하고, 부정적인 감정을 해소하지도 못한 채 무너져버렸다.
오늘을 내심 많이 기다렸나보다. 너가 좀 덜 바빠지길 바랐다. 그래야 너가 여유를 가지고 우리의 관계를 다시 돌아볼 수 있지 않을까, 바쁠 때 헤어지면 미련이 남아도 바쁜 나날에 흘려 보내지 않을까 싶었다. 하루만에 갑자기 여유로워지는 것도 언감생심이지만, 얼마간 기대치가 있었서 그런지 오늘같이 갑작스러운 통보에 크게 실망했다. 물론 정말 비번이 갑자기 정해졌을 수도 있고, 회사 앞으로 가면 진짜 좀 곤란한 상황이었을 수 있다. 그렇지만 그저 나를 배려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0.1%의 가능성에 화가 났다. 지금 너한테 중요한 건 네 일 밖에 없지, 나는 안중에도 없지.
이러고 있기에는 내 삶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헤어지고 처음으로 강렬하게 들기 시작했다.
그래, 너에게 의지했던 걸로 하자. 너를 엄청 사랑했다기보다 그저 너가 쓸모가 있었던 거라고 생각하기로 하자. 그런 점에서 오늘은 네 쓸모가 없었다.
침대 맡에 꽃다발과 쪽지를 남겼다. 전하지 않은 말들이 훨씬 많다. 삼키고 걸러 예쁜 말만 한다. 늘 이렇게 화병나게 살아왔어서, 이별도 화병나게 한다. 화병 나기 전에 어서 헤어져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