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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 Feb 14. 2019

이별에 필요한 아량

헤어진 남자와 한 달간 포옹하기 17. 헤어지고 18일차

"지금 잘 건데 오늘 밤 11시 반쯤 출근할 예정이라 그 전이면 와도 괜찮아-"


웬일로 네가 미리 연락을 준다. 무려 오후에 문자를 받았다. 지난 3일간 다치기만 했던 마음이 이 연락 하나에 조금 아물었다. 엊그제는 네가 그토록 고대하던 서비스 출시일에 축하조차 해 줄 수 없어 무력했고, 어제는 앞으로 계속 비번이라 아침에야 퇴근한다는 기약 없는 말에 맥이 풀렸다. 이제 나 만나기 싫어 그러나 보다 했는데, 고맙게도 네가 노력이란 걸 해준다. 진짜 싫으면 연락도 안 했겠지 하며 위안을 삼는 동시에, 관계의 숨통을 제 손으로 두 번 끊어내지 않으려는 거겠지 하며 혹시나 고개 들 기대감을 애써 짓이긴다.




오늘은 내게도 일적으로 중요한 일이 있었다. IR을 연습하는 모임에서 모의 IR을 했고, 투자자를 연결해 줄 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다. 사실 한 달 전쯤 그 모임에 처음 나갔을 때(너와 헤어지기 전이다) 다른 참여자들이 나만큼 진지하지 않은 듯 해 얻을 게 별로 없다고 느꼈다. 그 말을 전해 들은 넌 '오히려 돋보일 수 있는 기회지 않아?'라고 했다. 응원이나 위로의 말이 아니었다. 생각의 방향이 다른 데서 오는 답답함과 짜증스러움을 참고 참아내다 뱉은 일침이었다. 너의 이 반응 하나로 내가 매사에 부정적인 투덜이 스머프에, 한 치 앞만 보는 근시안이 되어 버린 느낌이었다. 화가 나기보다 흠칫했다. 그동안 애써 모른 척 해왔는데 사실은 너도 나도 그 차이를 인지하고 있다는 걸 서로에게 들켜버린 거다.


돌이켜보면 그 날처럼 너와 나의 차이를 맞닥뜨리던 날이 몇 번 더 있었다. 차이점이라면, 서로 분명 차이를 느꼈지만 밖으로 끄집어내 짚어내거나 문제 삼지 않았다.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강요하지 않는 것이 성숙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안타깝게도 차이를 방치한 것이 감정이 식는 데 일조했다. 이럴 거면 좀 덜 성숙하더라도, 진작부터 열심히 선을 넘나들며 서로 맞춰가려는 제스처를 보일 것을. 그랬다면 네가 이 차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는 걸 알아차렸을 텐데.


이 일은 너와 헤어지던 밤에 내 머릿속을 스쳤던 장면 중 하나였다. 일과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 존경심이 사라지는 바람에,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너를 눈물로 얼룩진 눈으로 바라보며 기시감을 느꼈다. 그 장면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너 말대로 이 발표를 보란 듯이 기회로 만들어 버렸다. 발표 자료를 빨리 완성해서 예정된 일정보다 미리 발표를 했고 사회자에게 눈도장을 확실히 찍었다. 막 발표를 마치고 흥분이 가시지 않은 채 네게 달려가 엄마에게 1등 성적표 보여주듯 자랑했다. '네가 지난번에 이게 기회라고 했던 게 맞아. 고마워'라는 말까지 덧붙여서. 너와 헤어진 후로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너와 비슷한 면을 보여주려 부단히 애썼는데, 오늘은 성공적으로 업데이트가 된 날이다. 네가 나를 안고 잘 됐다고 등을 토닥여주며 자기 일처럼 기뻐해 준다. 왠지 짜릿했다.


너의 파리한 얼굴을 보고, 서비스 출시 이후 미쳐 돌아가던 생활을 듣고 나니, 그간 정말 바빴고 정신없었겠다 싶다. 나도 모르게 마음이 풀렸다. 나를 피하려고 하나, 기다리는 사람 생각 못하고 미리 연락도 못해줄 만큼 내가 안중에 없나 등 상상 속에서 너를 나쁜 사람으로 몰아세우며 서운해하고 또 서운해했는데, 오늘 보니 충분히 연락 못했을 법하다.


사실 오늘은 네가 어떻든 간에 이해해줄 요량이었다. 우습게도 오늘 발표가 잘 끝나서 자존감이 조금 올라간 덕에 너를 안쓰럽게 바라볼 여유가 생긴 것이다. 내 존재가 납작해진 상태에서는 누구를 이해하고 말고 할 깜냥이 안 된다. 이 여유가 우리가 마침내 헤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약간이라도 높여 놓았으리라. 내 상황에 긍정적인 진척을 갖는 것이 더욱 중요해졌다. 헤어지려거든 우선 기를 쓰고 내가 잘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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