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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 Nov 17. 2019

맷집은 이별 후에 세진다

헤어진 남자와 한 달간 포옹하기 18. 헤어지고 19일차

헤어지고 19일차. 저녁 7시가 넘어 너가 집에 간다고 연락이 왔다. 늘 그랬듯 12시 다 돼서야 만나겠지 싶어 멀리 나와있던 나는 화들짝 놀랐다.


나 : "집에 가면 바로 자려나? 오늘도 지난번 같은 스케줄일 줄 알았어- 홍대 쪽에 일이 있어서 끝나고 가면 10시 반-11시 정도 될 것 같아. 괜찮을까?"

너 : "아 이미 집에 가고 있어ㅠ"


본가에 간다는 얘기였다. 너는 본가를 '집', 자취방을 '방'이라고 저 나름의 체계로 부르곤 했다. 본가 방문이 갑자기 정해진 걸 수도 있지만 또 미리 이야기를 안해준 거다. 연락 기다리는 사람 생각 안 하는 무신경함에 이제 화가 나기보다 힘이 빠진다. 자초지종을 묻지 않고 그냥 알겠다고 했다. 늘 너의 퇴근을 십분 대기조로 기다리고 있던지라 모처럼 확보한 밤 시간이다. 덕분에 간만에 들른 홍대를 마음 놓고 쏘다녔다.


헤어지고 19일쯤 되니 많은 일들에 꽤나 덤덤해졌다. 헤어진 첫날에 오늘 같은 일이 있었다면 별의별 잡생각으로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무방비 상태로 급소를 맞는 것과 어디를 어느 정도 세기로 맞을지 대비하고 있는 것의 차이다. 아름아름 키워 온 맷집을 예상치 못한 기회에 확인한다.




원래 나는 상대가 묻지 않는 이상 연애를 대화 소재로 올리지 않는 편이다. 특히 오프라인 만남에서는 더더욱. 깊고 세세하게 들여다보자면 저마다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겠지만 적정 수준으로 노출하는 선에서 연애란 참으로 보편적이다. 사람 사는 게 다 비슷하다. 대부분 1년에 한두 번 볼까 말까 한 소중한 관계인데, 연애보다는 상대와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로 대화를 이어가고 싶었다. 여기에 더해 SNS에서도 온통 일 얘기 뿐이다. 내게서 연애, 남자친구를 묻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요새는 내게 근황을 물으면 대번에 남자 친구와 헤어졌다고 내가 나서서 답한다. 새로운 사람 소개라도 해주십사 하는 요량이다. 헤어진 남자를 매일 만나러 가는 이 지리멸렬한 루틴을 외부의 계기로 하루빨리 끊어내고 싶었다. 그런데 일만 하는 줄 알았던 사람이 (비록 헤어졌을지언정) 연애도 할 줄 아는 사람으로 다시 보이자 재밌는 일들이 생겼다. 실연당한 나를 긍휼히 여겨 소개팅이 여럿 잡힌 것은 물론이요, 내 근황을 업데이트받은 당사자가 호감을 전하는 일도 있었다. 10년 넘게 알고 지낸 후배부터 랜덤한 모임에서 만나 딱히 감정적인 교류가 없던 사람까지.


들입다 맞기만 한다고 맷집이 세지는 건 아니다. 맞을 것 같은 데에 합판이라도 대 놓고, 빨간 약이라도 사놓고, 따로 운동해서 근육도 키우고, 여차하면 도망갈 생각으로 달리기 연습이라도 해놔야 맷집이 세진다. 결정적 한 방은 아니더라도 믿을 구석을 여럿 만들어두는 것이 필요하다. 헤어지고 19일 동안 내가 했던 게 믿을 구석 만드는 일 아니었을까. 오늘에라도 당장 네가 이제 그만 오라고 할 수 있으니 너에 대한 기대가 고개를 들 때마다 애써 짓이기고, 좀 더 떳떳한 모습으로 내 상태를 업데이트하고, 사람들 속에서의 나를 확인하며 자존감을 높인다. 오늘도 뭐 하냐는 카톡을 보내온 후배와 딱히 관계를 진전시킬 생각은 없지만, 너와 헤어져도 이제 살아갈 길이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에 왠지 안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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