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월 Nov 17. 2019

헤어지기 좋은 날

헤어진 남자와 한 달간 포옹하기 19. 헤어지고 20일차

헤어지고 20일 차.


하루 종일 내 사람들과 영감 넘치는 전시를 보고, 맛난 것 먹으며, 속 깊은 이야기를 진탕 해댔다. 나 헤어졌다는 얘기도 잠깐 나왔지만 나도, 사람들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간만에 너 생각하지 않고 내내 빈틈없이 즐거웠다. 그렇게 즐거이 낮 시간을 보내고 밤이 되어 너를 만나러 가는 길에, 그 10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불현듯 이제 너와 헤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오늘 하루 이렇게 행복했던 걸 보면 이대로 너 없이 쭉 잘 살 수 있을 것만 같다. 나도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이라 이 예감이 단순히 술기운인지, 헤어져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해서 당장 오늘 말하는 게 맞을지, 말한다면 뭐라고 말해야 할지 정리하지 못한 채로 너의 집에 도착했다.


이상하다. 너를 이틀 만에 보는데 그렇게 애틋하지도, 슬프지도, 절절하지도, 불안하지도 않다. 여느 때처럼 서로의 근황을 이어갔다. 그런데 갑자기 물속에 들어온 듯 소리가 먹먹하고 멀게 느껴졌다. 네가 하는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고, 내 맞장구 소리도 부유한다.


연인도, 친구도 아닌 사이. 그 애매한 거리감이 느껴지던 그 순간 깨달았다. 복잡할 것 없이, 그냥 네 마음이 식은 거라는 걸. 연인 사이에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너 잘못도 아니고, 내 잘못도 아니다. 평생 나만큼 좋아했던 사람이 없다던 네가 1년 만에 감정이 식은 것에 대한 납득할 만한 이유를 너 역시 찾았어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존경심이 사라졌다고 그 이유를 정해버린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의 손을 떠난 일이다.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다. 평소보다 조금 이르게 안아 달라고 했다. 가만히 안고 있다가 말했다.


"... 나 이제 너네 집 더 안 와도 될 것 같아."


사실 이 말의 무게를 충분히 실감하며 뱉은 말은 아니었다. 앞으로 너를 영영 보지 않겠다, 볼 수 없다는 선언인데 말이다. 아까부터 소리도 먹먹하게 들리고, 왠지 땅에 발이 닿지 않은 것만 같은 기분이다. 잠깐 현실감이 떨어진 때를 놓치지 않고 말해야 너와 헤어질 수 있을 것 같아 냉큼 영글지 않은 말을 꺼내버렸다.


"이제 괜찮아? 원래 두 달간 온다고 했잖아."


기억하고 있구나. 헤어지던 날, 길바닥에서 울며 떼쓰기로 정한 이별 유예 기간은 두 달이었다. 기간을 정해야 네가 이 제안을 받아들일지 말지를 결정할 수 있고, 그 정도면 내가 추스를 수 있을 것(추슬러야 할 것) 같았다. 지나고 보니 두 달은 긴 시간이었다. 한 달도 채우지 못했다. 관계를 원상 복구하려 했다면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을 테지만, 이별 유예 기간이라면 빠를수록 좋다. 이 관계를 네가 놓아버리기 전에 얼른 내 손으로 끊어내야 했다. 진정하고, 이해하고, 털어내고, 정리하기까지 서둘렀던 이유다. 연인도 친구도 아닌 이 관계에서 누구 하나 먼저 진이 빠지면 끝이다.


"응. 헤어질 수 있을 때 헤어져야지."


담백하게 말하는 내가 낯설다. 오늘이 바로 헤어지는 날이구나. 오랫동안 꼭 안고 고마웠다고, 사랑했다고, 미안했다고 말했다. 좋았던 시절이 스치며 괜히 울음이 터질 것 같아서 급히 네 집을 나왔다. 헤어지는 지금만 생각하면 그닥 슬프지 않은데, 좋았던 옛날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난다. 인이 박히게 걸었던, 아마 다시 걸을 일 없을 듯한 너와 내 집 사이를, 잘근 잘근 걸었다. 평소 보폭의 반의 반으로 줄여서 천천히. 그 새벽에 춥지도 않았던 걸 보면 헤어지기 좋은 날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