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들의 힘을 유지하고 자리를 잃지 않으려는 몸짓에 불과한데 말이죠.
29
리무영은 판문점까지 내려온 것이 오랜만이었다. 통일전선부에 있을 때 남측과의 회담에 참여한 적이 있지만자신이 주도적으로 회담에서 성과를 내야한다고 생각하니 긴장감이 소떼처럼 밀려왔다. 그는 통일 전선부에서 근무하기도 했고 개성공단 개발총국에서 대남 정보수집의 역할을 했다. 개발총국에서 일하다 개성공단과 관련된 실무를 담당하던 중 평양에서 일어났던 쿠데타를 보고 김병철과 함께 일하기로 결심했다. 사실 그에게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의 행적으로 볼 때 현재 김정은이 권력을 쥘 가능성이 높고 자신역시 반동분자로 몰려 한직이나 외부로 밀려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김병철이 개성을 점령했을 때 그는 이미 사태가 이렇게 흘러갈 것을 직감했다. 리무영은 자신의 먼 친척이었던 김병철을 어렸을 때부터 잘 따랐다. 김정은이 권력을 잡는다 해도 당분간 쉽게 김병철을 다룰 수 없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어쨌든 숙청을 피해 개성에서 버틸 수는 있다. 그렇게 되면 평양하고는 거리가 멀어질 것이고 다시는 평양으로 갈 수는 없게 된다. 하지만 김병철의 제안을 들었을 때 그는 확신했다. 그의 판단을 믿어 보기로 공화국은 변화를 수용해야 한다. 이대로라면 여기는 곧 한계에 직면할 것이다. 김병철이 화학무기를 빼돌렸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이 사태는 결국 어디로 갈 것인가. 그는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하지만 김병철은 역시 노련했고 나름 대안을 찾아냈다.그를 믿는 수 밖에 없었다. 남측과의 비밀회담에 많은 인원은 필요가 없다. 실무를 책임질 자신과 보조업무를맡은 2명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긴다. 그리고 남측에서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의 요구를 어디까지 수용해줄 것인지. 양보할 부분은 어디까지인지를 확인해야 한다. 사령관과는 협의를 마쳤다. 결정이 곤란하면 한 번 더 접촉을 가진다. 그는 이 부분까지 협상 전략을 세워 놓았다. 선적리 경계지역의 판문각이 눈앞에 보였다. 회담은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양측에 대표단이 자리를 잡았다. 남측은 안보실장 김전호를 중앙에 두고 세 명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먼 길 오느라 수고가 많으시었소. 남측에서 접촉을 원하다니 소식이 빠른 모양이구만 기래. 리무영이 말을 꺼냈다.
공단과 관련된 일도 있고 아무래도 이 상황을 어떻게 봐야 할지 궁금하기도 했죠.
우리가 한 얘기는 당분간 비밀로 해야 할 것이요. 그쪽 총통은 요즘 건강한 게요? 느닷없이 리무영은 총통의 건강을 물었다.
총통께서는 아직도 현역입니다. 많은 국가의 주요사항을 직접 결정해 처리하지요.
그렇소? 그렇게 얘기하는 거 보니 건강이 안 좋은 게로 구만. 평양 꼴 날 수 있으니 암튼 관리를 잘 하시라고 말씀드리시오. 그건 그렇고 이제 본격적으로 얘기를 해 봅시다. 권한이 어디까지인지 모르겠지만김전호 실장에 대해서는 나도 알고 있소. 얘기를 좀 들었지.
제가 그렇게 까지 유명합니까? 김전호가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었다.
김 선생은 여러 재주가 많다고 들었소 이다. 평양에서 지금 왜 개성쪽으로 쉽게 못 넘어오는지 잘 알고 있겠지. 지금 당장은 김병철 사령관을 쉽게 건드리지는 못 할 거요. 물론 교전이 더 벌어질 수도 있소. 김정은이도 쇼를 해야 북한 주민들이 따를 테니까. 평양이 김정은 쪽으로 완전히 정리가 된다면 말이지아마 정리가 되기는 할거요. 그 정도를 못한 놈은 아닌 게지. 공단은 이쪽에 있소. 그쪽은 우리에게 뭘 줄생각인가.
그쪽도 당장 공단을 폐쇄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 혜택을 보고 있으니. 김전호가 안경테를 올리며 리무영을 보았다.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이 좋을 것 같습니다만.
우리로서는 공단이 있으나 마나 한 거지. 뭐 외화벌이가 얼마쯤 되니 나쁘지는 않소. 우리식 자력갱생으로 아직은 살 만하고. 지금처럼 몇 푼 되지 않는 임대료 내고 저렴한 노동력으로 이득을 많이 보지 않았소?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께서 큰 결단을 하셨는데 변화가 필요할 때도 되었지. 당신네 들은 주민들한테 약도 많이 팔아먹고 있지? 리무영은 슬쩍 웃으며 김전호를 살폈다.
우리가 모를 줄 알고 있었나? 이상하게 그 업체만 뭔가 연구동인지 뭐를 만들어서 따로 뭔가 하는 것 같더라고. 우리한테는 비밀에 붙이고. 다 알아 본기라.남조선 인민들에게 그렇게 약을 팔아서 어찌 할거요그 돈을 다 정치에 쓰나? 아니면 일부 사람들이 착복하나?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저희는 국민들을 위한 정책을 수행하는 겁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김 선생은 좀 솔직해 져야겠구만. 거기나 여기나 다를 바가 없어. 하는 거 보면 말이지. 우리한테 인민들억압한다고 뭐라 하지 마시오 이제 우리의 요구조건을 말하겠시오.
첫째 우리는 변화를 추구할 생각이요. 남측도 이에 호응해야겠지. 둘째, 공단을 유지하고 싶으면 임대료를 두 배로 내야 할 거요. 인민들의 임금도 마찬가지고. 우리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가장 수익을 많이 내는 업체가 서해산업인거 같은데 그 비용도 우리한테 일부 들어와야 하오. 남측에서는 이 부분에 도움을 좀 줘야갔소. 어떻소. 무슨 말인지 좀 이해가 되시오? 김전호는 리무영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뭔가 일이 재미있게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김병철 사령관도 동의하고 있는 것입니까?
사령관의 위임을 통해서 말한 것이요. 그쪽은 요구하는 게 뭐요? 일단은 지금 막혀있는 출입국 사무소를 열어주셔야 개성 생산품목이 넘어올 것 아닙니까? 제품과 자제가 막혀 있어서 기업들이 힘듭니다. 지금 공단위원회 인원이니 기업관계자들이 넘어오지 못하고 있으니 그 부분이 해결 돼야겠죠. 임금부분은 천천히 결정을 해야 합니다. 여론이라는 것도 있고 하니.
그렇구만, 내 사령관에게 잘 얘기해 보겠소. 임금부분이 해결되면 나머지도 자연스레 이어지게 될 것이요. 남조선에 특별하게 악감정은 없소. 다들 잘 살아보자고 하는 일인데 좀 솔직해 집시다. 리무영은 그렇게 말하고 화제를 돌렸다.
협상이라는 것은 뭔가 서로 이득이 되어야겠죠. 김전호가 말을 꺼냈다.
말해 보시오.
수익과 관련된 부분은 협상을 통해 진행이 될 것이고 당연히 서로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겁니다. 저희에게 필요한 자원을 제공해 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남쪽은 정보가 개방되어 있습니다. 북한에서만 할 수 있는 실험이 있습니다. 남쪽에서는 시끄러운 일도 여기서는 그렇지 않죠.
말을 돌리지 말고 하고 싶은 얘기를 하시오.
노동교화소나 사형수를 의약품 개발과 관련된 실험대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해 주겠습니까? 북쪽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사형판결을 받게 된 사형수라고 한다면 신약을 개발하는데 필요한 인체실험 대상으로 활용해도 무리는 없을 듯 한데요. 남북한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많은 인원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김전호는 리무영에게 제안을 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따로 말씀을 드리죠. 판문점에서 회담이 마무리 되고 리무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표단이 모두 철수하는 사이에 김전호는 조용히 리무영을 불러 독대를 요구했다. 둘은 회담장에 마련된 공간으로 단둘이 움직였다
아직 저희 쪽의 마지막 협상부분이 남았습니다.
선생은 뭔가 음침한 구석이 있구료. 회담장에서 얘기하지 뭘 또 독대를 한다고 그러오.
원래 협상이라는 것이 마지막까지 모르는 것 아닙니까? 사령관의 의중은 충분히 알겠습니다. 어쨌든 개성도 당분간 버티려면 저희 쪽 의견을 좀 듣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말해 보라우. 리무영은 탐탁지 않은 듯 대답했다. 대표님이 총통님의 건강을 여쭤보는 것이 어째 심상치가 않습니다. 조만간 저희도 권력이 교체될 수 있습니다. 부총통께서 권력을 승계할 것이고 그 작업이 진행 중이죠.
알고 있소. 그 부분은.
이를 위해서 뭔가 작업이 필요합니다. 남한이 지금 좀 시끄러운 국면이라 그것을 좀 진정시켜야 합니다저희가 먼저 나서면 국민들의 반발도 좀 있을 거라는 거죠. 명분이 필요합니다. 어떻습니까? 좀 손을 빌려 주시겠습니까? 이 부분이 확정되면 공단 수수료 부분은 가능할겁니다.
거, 남조선 당국은 항상 뭔가 다급할 때 뭔가를 부탁하는 구만 그래. 우리 없었으면 어쩔 뻔했소? 리무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이 부분은 내가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없는 부분이요. 사령관께 내가 말해보겠소. 아니 근데 손을 빌려달라는 것은 뭘 얘기하는 거요?
이제 곧 총통취임 20주년 기념행사가 열립니다. 기념식이라고 하지만 총통 은퇴행사와 마찬가지입니다. 이후 새 총통이 즉위 할 겁니다. 그 날이 중요합니다.
그때 뭔가 시끄러운 상황을 만들어 달라? 그러면 우리 측의 요구를 들어주겠다 이거요?
맞습니다. 물론 평상시에도 그런 소동은 몇 번 더 있어야 겠죠. 사실은 기념행사 이전에 여러 번 사건을 더 만들어 주시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다만 그 행사가 젤 중요하구만 기래.
김 선생은 참 열심히 사는 사람이오. 그래. 남조선은 든든하겠어. 김 선생 같은 사람이 부총통을 그렇게 챙겨 주니 말이야. 리무영은 껄껄 웃었다. 뭐 우리로서는 그리 어렵지 않은 제안이니. 이것도 사령관에게 말해 두겠소. 다음번 회담에서 마무리를 합시다. 우리 쪽 담당과 연락을 하면 편의를 줄 거요. 둘은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30
총통 취임기념 행사 당일 정엽은 개성에서 월경했다. 그는 곧바로 국수본으로 향했다. 시간은 7시가 넘어 있었다. 시내는 곳곳이 축제 분위기로 들썩였다. 성대한 행사를 계획한 것인지 대형전광판에서는 연일 총통의 얼굴과 그의 업적들이 자막과 영상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하지만 새로울 것은 없는 오래전 영상들이었다. 남북정상이 손을 맞잡고 악수를 하는 모습, 개성공단 착공식에 삽으로 흙을 뜨는 영상을 정엽은 바라보고 있었다. 부장은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았다. 자유로를 내려오는 길에 정엽은 긴급 수사관 파견을 요청해 놓은 상태였다. 모든 상황에 대해 파악을 마쳤기에 사건의 진위를 밝힐 생각이었다. 증거는 이미 확보한 상태였다. 김수필 사망과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된 이들의 만행도 알려져야 한다. 그 이후는 나중에 생각하자. 정엽은 그렇게 생각하며 국수본으로 향했다. 그는 정문을 통과해수사본부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그때 수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어 전화 받네. 돌아왔어?
이제 모든 것을 알것 같아. 서해산업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 최종 기획자가 누구인지 말이야. 너의 아버지의 명예도 이제 회복할 수 있을 것 같다.
개성에서 다 알아온 모양이네. 수원이 흥분한 듯 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 이제 바로 잡아야지. 이런 일을 벌인 것을 모두가 알아야 할 거야. 수원아. 나 이제 사무실 다 왔거든. 내가 정리되면 다시 전화할게.
아. 나 지금 광장으로 가는 길이야.
거기는 왜? 아무래도 개성의 붉은 눈이 그쪽으로 가서 뭔가 일을 꾸밀지도 모르지. 가서 확인해 보려고.
너 혼자? 반장한테 얘기했어? 지원은 나와? 파트너라도 있을 거 아냐?
이 얘기를 믿겠어. 형이라면. 일단 가서 보고. 내가 잡을 수 있으면 잡으려고. 인상착의는 대충 아니까. 정엽은 조심하라는 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
경비는 한층 강화 돼 오늘이 총통을 위한 성대한 기념행사라는 것을 정엽에게 상기시켜 주었다. 국수본에는 축하행사에 파견을 간 것인지 근무인원이 많지 않아보였다. 정엽은 8층 2과로 들어섰다. 부장을 만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부장은 자리에 보이지 않았고 전화도 받지 않았다. 정엽이 요청한 수사관들은 대기 중이었다.
오늘 총통의 20주년 기념행사라서 일부는 그곳으로움직였고 나머지 인원들입니다. 수사관님 급한 일이라고 하셔서 일단 어떤 업무입니까? 한 고참 수사관이 물었다.
이제부터 중요한 일을 저와 함께 하셔야 할 겁니다. 정엽은 조사해둔 자료를 넘겨주고 사건에 대한 주의를 당부했다. 극비리에 수사진행이 돼야 한다는 언급도 잊지 않았다. 잠시 후 부장이 사무실안으로 들어와 정엽을 불렀다.
부장님 왜 그렇게 연락이 안 됩니까? 지금 막 돌아왔는데 일단 원칙대로 수사 진행하겠습니다. 김수필과관련 있는 모든 사람들이 조사 대상입니다. 압수수색을 진행하고 소환조사를 할 생각입니다. 가장 마지막에는 이 모든 일에 책임이 있는 자가 남을 것이고요. 알고 계시겠지만요.
정엽아, 일단 오늘은 잠깐 나하고 얘기를 좀 해야 할 것 같다. 부장은 정엽을 불러냈다.
본격적인 조사와 수사는 내일부터 진행하면 될 거라고 생각하면 되겠지? 그전에 해야 할 일이 있어. 그때 누군가 소리쳤다.
광장에 비상상황이 발생한 모양입니다. 상황실로 좀오시죠. 사건이 터진 모양이었다.
잠깐 확인하고 얘기를 마저 끝내자.
부장은 말을 끝내고 복도로 서둘러 나갔다. 둘은 상황실로 향했다. 여러 대의 모니터가 광장의 상황을 비추고 있었다. 광장은 지옥도 같은 모습이었다.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이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시위대로 보이는 무리들이 경찰과 대치하고있었다. 광장 한 복판에 행사에서 사용하던 여러 물건들이 나뒹굴었다. 진압경찰의 수가 점점 늘어나는듯 했고 외부에서 또 다른 사람들의 무리가 몰려오고 있었다상황실에 있는 인원들은 다들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와, 이 축제 같은 상황에서 이게 뭔 일이래. 누군가가어이가 없다는 듯 말을 내뱉었다. 저기 일부 인원들이 나가 있을 텐데 정신 없겠구만. 상황실의 한 직원이 화면을 보고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정엽은 급하게 상황실을 나왔다.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지금 네가 가봐야 할 게 없어. 저 사태가 좀 정리된 다음에 움직여라. 부장은 걱정되는 투로 말을 꺼냈다.
아뇨. 가봐야 합니다. 상황을 알고 있는 경찰이 현장에 있어요. 저도 확인할 부분이 있고 일단 가보겠습니다. 관계자 조사와 수사 관련된 내용은 내일 부장님께 의논 드리죠. 정엽은 서둘러 국수본에서 나와 택시를 탔다. 차량은 남영동에서 청파로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행사 때문인지 곳곳에서 차량을 통제하고 있었고 거리는 추운 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멀리서 불꽃놀이를 하는지 폭죽이 밤하늘을 밝혔다. 택시의 창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가 폐부로 깊숙이 밀려들어왔다불꽃놀이를 본 사람들의 환호소리가 정엽의 귓가에 생생하게 들렸다. 10여분이 지났는데도 차는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눈까지 내리자 시내 교통은 엉망이었다. 정엽은 택시에서 내려 뛰어서 광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정엽은 수원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파악하려 했지만 수원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런 제길. 또 뭔 일이 생겼나.
인파를 피해 인도를 뛰어가자 조금씩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정엽은 쉴새 없이 달렸다. 가면서 계속 수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가 혼자서 붉은 눈을 체포하려 하다가 문제가 생길지가 걱정이었다. 서울역을 지나갈 무렵 중 멀리서 함성이 들렸다. 공포탄 소리인지. 실탄 사격소리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았다. 타닥 하는 소리가 불꽃놀이 소리와 겹쳐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사태가 정리된 것인지. 파악이 어려웠다. 정엽은 목적지에 거의 도착하자 손으로 무릎을 짚고 숨을 돌렸다. 저 멀리 사람들의 움직임이 보였다. 광화문방향으로 수많은 인파가 몰려드는 것이 보였다. 광장이나 도로에 사람들이 더 모이면 상황을 통제하고 있는 인원으로는 대응이쉽지 않아 보였다. 광장에 도착하자 미쳐 그곳을 빠져나가지 못한 사람들과 밀려드는 사람들 그리고 청계천 쪽에서 이동하는 사람들로 거리는 터져나가는 듯 했다. 사람들의 수는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정엽은 30년 전 오래 된 기록 영상을 보는듯한 느낌이들었다. 수십년 된 1987년의 영상에서 당시 거리를 점령한 사람들처럼 이들은 구호를 외치며 거리를 이동하고 있었다. 해방감을 느끼는지도 몰랐다. 오래전 그들은 영상에서 ‘민주주의와 독재타도’를 외쳤다. 총통의 집권이 이뤄지지 않았다면 과연 이 나라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정엽은 그 생각을 해 보았다. 대중의 모임은 에너지를 만들고 분출한다. 기세는 쉽게 꺾이지 않는다이들이 여기로 모인 이유는 무엇일까. 시위에 참여하기위해서일 수도 있을 테고 그냥 단순히 이들 무리에 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인파는 ‘유선형의 거대한 파도를 그리며 흐름을 만들고 있었다. 그 사이 눈발은 조금씩 거세졌다. 도로 한 복판의 차량이 경적소리를 냈지만 사람들은 아랑곳없이 차도를 건너고 있었고 누군가 ’총통은 퇴진하라‘는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이후 몇몇이 따라 외쳤다. 변화가 일어날것임은 분명했다
환호성, 해방감과 축제분위가 뒤섞여 거리를 온통 뒤덮었다. 총통 취임 20주년 기념식은 퇴임을 촉구하는 사람들로 넘치도록 만드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차량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이미 움직이기를 포기한 듯했다. 버스에 타고 있는 사람들도 구호에 호응했고 손을 흔들었다. 광화문 방향의 도로 역시 사람들로 채워지고 있는 중이었다. 수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트래픽이 많은지 통화가 울리다 끊어졌고 웅웅거리는 소리가 났다. 수원은 자신이 시청근처의 광장에 있다고했고 붉은 눈을 봤다는 말을 하는 듯 했다. 아수라장이 된 시청광장 주변을 정엽은 둘러보고 있었다. 눈발이 굵어지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조금씩 빠르게 이동했다. 통화가 끝난 이후 수원은 정엽을 보고 을지로 부근 차도에서 뛰어오고 있었다. 수원은 다급하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까 광장에서 붉은 눈을 봤어. 저 인파속으로 들어갔고 그들이 맞아. 내가 부르니 쳐다보더라고.
지금 어디에 있어? 이들을 검거 하는 게 우선이야. 둘은 인파를 뚫고 광장 안으로 들어갔다. 광장은 사람들이 좀 적어 이제 정리가 되고 있었다.
그들은 벌써 여기서 다른 곳으로 이미 이동하지 않았을까? 이 인파속에서 어떻게 그를 찾아 포기해.
아냐 형. 얼굴을 기억하고 있어 입은 것도. 키와 체형도 기억이나. 일단 상황이 서서히 정리되는 것 같은데 그래도 한번 찾아보고 안 되면 그만둬야지.
형은 여기 어쩐 일이야. 개성에서 돌아왔으면 뭔가 가지고 왔겠지. 바로 수사 시작되는거야?
너 때문에 왔어. 혼자서 그들 상대하려고 하다가 또 뭔 일 나는 거 아닌가 해서. 너 잘못되면 내가 주영선배를 어떻게 보냐.
어... 이거 감동인데. 형이 그런 면이 있다고는 생각 못했는데 말야. 수원은 뭔가 뿌듯하다는 듯 웃으며 정엽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 시끄럽네. 이 자식은 뭔 말을 못해. 그자가 여기에 왔다면 아마 강석철 일거야. 혼자는 아니겠지. 강석철이 김병철 특작부대의 대장격이라 하더라. 마르크 박사한테서 들었어. 탈북자 한테서도 확인했고. 개성에서 박사로부터 자료를 받았어. 이제 모든 것을 밝힐 수 있을 거야.
정엽은 그렇게 말하며 수원과 함께 남아있는 인파를 해치고 광장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수원과 정엽은 붉은눈과 시민들의 충돌이 있었고 총격전이 벌어진 광장 근처를 수색했다. 수원은 경비 무전기를 통해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부상을 입어 걷기가 어려워 보이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소방과 경찰 사이렌 소리가 여러곳에서 들리고 있었고 경찰 사이드카와 버스가 시청 외각을 둘러싸고 있었다. 경찰들의 수가 늘어났다. 둘은 신분증을 꺼내 보이며 검문을 통과했다. 정엽이 사방을둘러보는 사이에 수원이 말을 꺼냈다.
총격이 있었어. 사람들이 몇 명 맞은 것 같았고 다친 사람들도 있었지. 사람들이 많아서 정확하게 보지는못했지만. 눈발이 거세졌다. 광장 잔디밭과 인도에 눈이 조금씩 쌓이기 시작했고 핏자국이 조금씩 덮이고 있었다. 누군가 심한 출혈이 있었는지 서울 도서관 앞의 바닥에 피가 흥건한 모습이 눈에 띄었다. 피가 흐르는 방향 좌측 허름한 상가 계단 입구에 한사내가 건물 벽에 몸을 기대고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를 보자마자 수원이 소리쳤다.
붉은 눈? 강석철?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가 흐릿한 의식을 억지로 붙잡고 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남조선 사회 안전성에 왔나? 용케도 나를 알아보고 찾았구만 기래. 정엽과 수원이 그를 부축해 일으키려 했지만 그는 손을 내저었다.
이미 틀렸어. 저리 가라. 난 곧 숨을 거둔다. 그가 나지막이 소리를 냈다. 눈은 붉어 있었고 좌측 복부에 피딱지가 엉겨 붙어 있었다. 뒤에서 흐른 피가 흘러 허벅지까지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총알이 동맥을 관통한 모양이었다.
돌아가서 공화국이 강성해지는 것을 봐야 하는 데 그렇게 하지는 못할 것 같구만. 김수필은 내가 없앴다. 우리를 이 꼴로 만들었고 사람취급을 하지 않았지. 구제 받아서는 안 될 인간이야. 그래도 그 연구동에서 몇 명은 살아남았어.
개성에 다녀왔어. 알고 있다. 정엽이 무릎을 굽피고 그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네가 그 남조선에 온 수사관인가 뭔가 하는 놈이지. 우린 구면인 게지. 네놈은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공단 연구소를 날려 버린 것도 나라는 것을 알겠지. 개풍군으로 가는 길에 네놈한테 총을 쏜 것도. 마르크 박사도 만났을 테고. 김수필이 남한과 동유럽에. 쿨럭. 그가 기침을 하자 복부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약을 만들어 판 것은 김수필이야. 그걸 남쪽으로 비밀리에 운반한 것은 내다. 알겠나? 그는 희미한 웃음을 짓는 것처럼 보였다. 그건 알아두라. 남조선에 악한 감정은 없어. 다만 공화국과 개성을 살리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을 뿐이지. 이제 더 이상 비밀리에 약이 넘어올 일은 없을게야. 조심한다고 했는데 궁평항에서 김수필을 죽일 때 영상에 내 모습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지. 찾아보라. 김판수는 남한 사회 안정성에 줄을 대고 있었고 정기적으로 윗선에 상납을했으니 캐보면 나오겠지.
그만해. 그러다 정말 죽는다. 아직 포기할 때는 아냐수원이 소리쳤다. 그는 강석철을 부축했다. 옷을 벗어 복부의 출혈을 누르고 있었다. 석철은 어이없다는듯 웃었다.
쓸데 없는 짓마라.
석철은 그렇게 말했지만 마지막으로 그의 손길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석철은 점점 가쁜 숨을 몰아쉬며 벽에 고개를 기댔다. 잠시 후 그의 고개가 힘없이 앞으로 꺾였다. 눈발은 점점 굵어지고 구급차와 경찰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귓가에서 여러 방향으로 진폭을 만들었다. 정엽은 뒤돌아서 광장을 쳐다보았다. 떨어지는 눈꽃들과 그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이 기묘하게 보였다. 시공간이 멈춰있는 것 같은 기분이 었다. 눈이 광장에 흐른 피를 덮어버렸다. 총통의 취임 20주는 행사는 수많은 사상자를 남기고 마무리 되었다. 다만 사태는 진정되지 않았다. 포탈과 영상사이트에는 시위와 집회사진이 올라오고 사람들은 각종 커뮤니티에 사진과 영상을 올렸고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안보국의 검열은 한계에 도달했다.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들불처럼 번져나가는 중이었다비상안보회의가 부총통 전경호를 중심으로 진행 중이었다. 안보실은 정보국에 요청해 검열을 강화하고 아침방송에서도 시위와 집회에 대한 전달을 최소화 하라고 지시를 내린 상태였다. 부총통 전경호와 국정원장과 총통비서실장과 몇몇의 핵심 인원들은 경찰특공대를 투입해 사태를 진압하고 시위대를 해산 시킨 뒤 한숨을 돌렸다. 아침 방송에서 총통 취임행사에서 소란이 있었다는 앵커의 간단한 브리핑을 보고 이들은 회의를 다시 진행했다.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안보실장? 아니면 국정원장이든 비서실장이든 누가 말을 해봐. 대체 이게 뭐야. 차분했던 전경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앞으로이 사태에 제대로 대처할 수 있겠나? 총통 기념행사가 우리의 목을 졸랐어. 작은 물리적 충돌을 일으킬 것이라 했지. 그것을 핑계로 공안 통치를 강화해 국민들을 누르겠다고 하지 않았어? 이건 작은 소동이 아니야. 지난번에는 틀어막아서 어떻게든 넘어갔는데 이번에는 달라. 많은 사람들이 지켜봤어. 이걸 어떻게 수습할거야. 전경호는 책상을 손으로 내리쳤다
시위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수는 점차 늘어날 겁니다정보를 차단할 수가 없습니다. 국정원장 최진후가 말했다.
그걸 누가 모르나? 전경호가 답답한 듯 말을 잘랐다.
군을 부르십시오. 총통께 허락을 구하십시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최후의 수단은 계엄을 선포하는 겁니다. 이 사태를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준비해두었던 비상계엄을 실행시키십시오. 다들묵묵부답이었다.
또 한 번 물리적 충돌을 일으킨단 말인가? 그때처럼 그렇게 되면 국가 부도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어. 전 세계가 우리를 뭐로 보겠나. 이제는 그게 통하지 않아.
회의는 그렇게 끝났다. 이들은 당장 사태에 대한 해결책을 생각하지 못했다. 경찰을 동원해 질서를 유지하고당분간은 사태가 잠잠해지는 것을 기다리는 것을 택한 것이다. 다만 비상계엄도 선택지 중에 하나인 것은 분명했다. 총통의 치매 증상은 더욱 악화되고 있었다. 회의가 끝난 후 전경호는 곧바로 총통관저를 찾았다. 총통을 전면에 내세워 사태를 해결해 볼 생각이었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총통은 제대로 걸음을 옮기지 못할 정도로 상태가 악화된 상태였다. 지팡이에 의지해 간신히 몸을 일으킬 정도의 기력만이 그에게는 남아있었다.
총통각하? 전경호가 총통을 불렀다.
오, 누군가? 손자 영철이구나. 총통은 전경호를 보자마자 그의 얼굴을 손으로 문질렀다. 그는 가끔 섬망 증세를 보이기도 했지만 이제 부총통 전경호를 알아보지 못했다. 총통은 혼자서 한참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전경호를 보고 누구냐고 묻기도 했다. 당황한 전경호는 대화를 마무리 하고 형식적으로 인사를 한뒤에 총통 관저를 나왔다. 전경호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선택의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하루뒤 소요가 진정되기 시작하자 정엽은 수사를 시작했다. 김수필과 관련된 업체에 대한 압수수색 그를 공단업체의 사장으로 스카웃 한 과정에 대한 조사가 진행중이었다. 정엽은 수사진과 회의를 마치고 관계자들을 연행한 뒤 조사실로 불러들였다. 이 과정에서 APA인력 파견업체가 이병수의 파견과정에도 개입했고 마르크 박사와도 관련이 있음을 확인했다. 증거를 들이밀고 강도 높은 조사를 통해 사실을 밝히지 않을 경우 무거운 형량이 구형된다는 부분을 강조하자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사실을 인정했다. 정엽은 이들 업체와 안보실 과의 유착을 살피는 중이었다. 권력을 이용해 이들은 무슨 일을 벌여 놓은 것인가. 조사를 하면서 정엽은 이 모든 사건들이 결국 하나로 모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총통취임 행사 수습과정으로 안보실은 정엽의 수사에 대한 정보입수와 대응이 늦어지고 있는 것은분명했다. 시내의 경비는 한 층 강화되고 있었지만 시민들의 불만은 점점 높아져만 갔다. 마치 누군가 작은 불씨만 일으키면 터질 것 같은 팽팽한 긴장감이 희뿌연 안개처럼 눌러 붙어 있었다. 바닥에 자욱한 가스는 작은 불꽃만 튀면 폭발할 것이다. 그날은 유난히 추운 날씨였다. 부장은 정엽을 불렀다. 정엽은 조사과정과 내용을 아직 부장에게 보고 하지는 않았다. 구체적 윤곽이 그려지면 그 내용을 알릴 생각이었다. 안보실의 연락을 받은 것은 행사 이틀 뒤였다.
이정엽 수사관인가?
그렇습니다만.
나 안보실의 김전호라고 하네. 오늘 좀 만날 수 있을까? 안보실장이 직접 전화를 한 것은 의외였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쉽게 움직이는 사람이 아닐 텐데. 이제 거의 종착점에 온 것인가. 정엽은 그렇게 생각했다.
어떤 일로 만자자고 하시는지.
자네가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그렇지 않은가? 후후. 김전호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김전호는 당연히 수사 진행 상황에 대한 내용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앞으로의 정국을 어떻게 해결해 나갈까? 정엽은 그의 대응이 궁금했다.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시죠. 시간은 9시가 넘어 있었다.
오늘 만나서 얘기를 하는 게 서로에게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네만.
정엽은 전화를 끊고 한동안 책상에 앉아 고민하고 있었다. 두 시간 뒤었다. 김전호가 급하기는 급한 모양이었다. 이 시간에 그가 만나고자 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정엽은 김포 톨게이트 근처의 백마섬으로 차를 몰았다. 도중 검문은 몇 번이고 진행됐다. 밤 11시 강변북로는 통행이 수월했다. 30분 이내로 도착할 것이다. 정엽은 방화대교를 건너 전곡 톨게이트에서 굴포천을 따라 올라갔다. 목적지 까지는 5km정도가 남아있었다. 동부 간선수로는 얼어붙어 있었다. 백마도로 들어가는 길은 철문이 열려 있었다. 백마도 입구에 오른쪽에 거대한 이층 철골구조물이 눈에 띄었다. 건물을 짓다가 만 듯했다. 곳곳에는 폐차 직전의 차량들이 도로 한 구석을 채우고 있었고 야간에 트럭들이 길가에 주차를 해 놓아 도로 시야가 막혀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1Km 남짓의 다리를 건너 섬으로 들어갔다.
멀리 차 한 대가 눈에 띄었다. 라이트를 켜고 있었고붉은 미등이 보였다. 정엽은 그 옆 근처에 차량을 대고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누군가가 차에서 내려 물가가 내려다보이는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간만에 날씨가 풀렸는지 차가운 밤공기가 오히려 시원하게 느껴졌다. 히터를 틀어 놓은 차에서 내리자 상쾌한 공기가 폐부로들어왔다. 머리가 맑아지는 듯 했다. 정엽은 검은색 세단차량의 앞까지 걸어갔다. 170정도 되는 키의 중간정도의 체구를 가진 한 중년의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금속 테 안경을 끼고 있었고 밤이라 눈빛이나 표정은 잘 드러나지 않았다. 몇 년전 본 기억이 있다. 김전호실장이었다.
안보실장 김전호라고 하네.
네. 국수본 수사관 이정엽입니다.
몇 년차인가 이제?
8년 됐습니다. 그전에는 경찰에 있었고요. 알고계시겠지만요.
그렇군. 그는 가볍게 미소를 짓는 듯 했다. 국수본은 내가 만들었지. 안보실 산하로 자네는 내 직속 부하직원이나 마찬가지야. 개성에 다녀온 것 부터해서 최근에 여러 가지 활동을 잘 보고 있었네.
실장님께서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엽은 먼저 패를 꺼내지 않았다. 자신을 만나자고 한 이유가 궁금했다.
정치를 하려면 여러 가지를 생각해야 하네. 나는 자네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있지. 주고 받는 것 그게 정치라는 거야. 자네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말해보게. 자네의 직속상관이 김상효지? 그자는 내가 잘 알고 있지. 이 조직에서 자네가 원하는 위치를 줄 수도 있어. 김상효에게 상황을 보고 했나?
네 그렇습니다. 부장은 대부분의 내용을 알고 계시죠. 말씀하신 것은 야합이고 거래죠. 제 생각에 거래와 정치는 다른 것 같습니다. 정엽은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저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죠. 저에게 얘기를 하지 않고 돌아가셨으니 그때 저는 너무도 어렸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죠. 저를 회유하러 오셨다고 한다면 잘못판단하신 것입니다. 어머니는 그곳 수조에 방부제상태로 실험체로 누워계셨습니다. 서해산업, APA 인력파견업체를 누가 움직였는지.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 그 위에 누가 있는지. 이유는 무엇인지. 서해산업은 무엇 때문에 비밀리에 약을 만들어 팔고 있는지도 다 밝혀야 합니다.
국가를 위해 일하다 보면 가끔은 무리수를 둬야 할 때가 있어. 하지만 국가를 위한 내 충심은 진심이라고 생각하면 돼.
사람들을 힘으로 억누르는 이들이 자주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애국심이라는 정체불명의이데올로기입니다. 나라를 위한다는 말로 자신의 모든 행위를 정당화 합니다. 자신들의 힘을 유지하고 그 자리를 잃지 않으려는 권력욕에 불과한데 말이죠그럼 묻겠습니다. 국수본은 실장님의 말처럼 만들어진 조직입니다. 하지만 이제 수명이 다했죠. 바뀌지 않으면 저항이 더 커질 것입니다. 억눌린 것은 결국 더 큰 반발을 불러 오게 됩니다. 이번 고비를 넘긴다고 해도 얼마나 갈 수 있을까요? 세수부족을 메우기 위해 국민들에게 마약성 진통제를 팔고 이를 제도화하는 권력이 과연 유지될 수 있을지. 모든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까요? 저는 의문이 듭니다. 이미 임계점을 넘었죠. 머지않아 권력은 정당성도 힘도 잃을 겁니다. 이제는 그만 내려놓으실 때가 됐다는 겁니다. 총통도 부총통도 그리고 김전호 실장님 당신도.
으흠. 김전호는 무표정했다. 건방진 말이군. 그리고 다시 정엽을 처다 보았다.
자네가 생각하는 대로 일이 진행될 것 같아 수사도 그렇고? 국수본에 있어서 알 텐데. 난 정보국과 함께얼마든지 여론을 만들어 낼 수가 있지. 그러면 자네는 끝이라는 거야. 자네 따위가 나를 어떻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쉽지 않을 겁니다.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저 말고도 많이 있으니까요. 말씀드렸다시피 권력이 임계점에 도달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면 행동으로 나서게 되죠. 그게 인간의 본성 같은 것이니까요. 이미 증거자료도 모두 확보된 상태입니다.
그러면 얘기는 여기까지 하는 것으로 하지. 김전호는 몸을 돌려 차량으로 향했다. 잠시 후 그는 차를 몰고 왔던 길을 돌아 나갔다. 정엽도 차에 오르려는 순간 멀리서 승용차 한 대가 들어오는 것이 눈에 보였다. 이 밤에 이곳으로 올 차는 많지 않다. 백마도는 얼마 전 까지 출입이 통제되었던 곳이다. 검은색 세단차량은 미끄러지듯이 정엽의 차가 세워져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익숙한 사람이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정엽아.
부장이었다. 정엽은 깜짝 놀라 부장을 바라보았다.
아니 부장님이 여긴 웬일이세요. 제가 여기 온다는 것은 어떻게 아시고. 바쁜 것 같아 연락을 못 드렸는데요. 부장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날씨가 풀렸다고 하지만 겨울 초입의 한강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더군다나 이곳은 인적이 드문 곳이고 출입이 통제된 곳이었다.
미안하다 정엽아. 부장은 뭔가 표정이 어두워보였다
조금 전 김전호 실장을 만났어? 뭐라고 했냐?
김전호 실장이 저를 회유하는 것 같더군요. 다른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거든요. 그래? 부장은 안도하는 것 같았다.
아니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저 걱정돼서 뭔가 주시하고 계셨나요? 직접 오실 것까지야.
그런 것은 아니고. 부장은 그때 갑작스레 품에서 K5 권총을 꺼냈다.
원래 의도와 사태가 너무 많이 변했다. 어쩔 수 없어. 이런 것을 바란 것은 아니었는데 말이지.
부장님, 정엽은 깜짝 놀라 온몸이 얼어붙는 듯 했다. 그의 표정은 어두워 보였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있어요? 아무리 김전호가 상관이고 실장이라고 하더라도. 수원조폭 수사로 온몸에 칼을 맞아 병원에 누워있을 때 부장님이 경찰에서 저를 스카웃하셨죠. 경찰에서 그 수사를 막으려 누군가 정보를 흘려서 조폭한테 당했고요. 이후 저는 모든 것을 걸고 이 조직에서 일할 생각이었어요. 국수본은 다를 테니까. 이곳은 저의 모든 것이었고 부장님은 아버지나 마찬가지였죠. 어머니 사건도이곳에서 다시 알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요. 김전호가 차기 국수본장을 약속하던가요? 심경이 바뀐 게 이런 이유였군요. 부장님? 대답을 하세요정엽이 크게 소리쳤다. 정엽에게 총을 겨눈 그의 손과 눈이 미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원래 너를 개성에 보낸 게 김전호를 제거하기 위한 약점을 잡기 위해서였다. 김전호가 개성에서 뭔가 일을 벌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너는 어머니 일도 있고 하니 더 열심히 정보를 캐내려 할 것이라 생각했고. 뭐, 대단한 것을 건질 것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단순히 정치자금 수수정도? 그의 약점을 좀 가지고 있으려 했지. 상황은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까. 총통이 갑자기 죽게 되면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갈 수 있으니. 근데 너의 보고서를 보니 생각보다 사건이 커지더구나. 이제는 이 사건이 정권을 뒤흔들 만한 것이 됐어. 이렇게 되면 단순히 김전호를 몰아내는 것에서 끝나지 않을 거야. 부장의 눈은 흔들렸다. 심경이 복잡해 보였다.
김전호는 나와 비슷한 연배지. 나도 검찰에 있었다. 김전호는 전경호의 눈에 들어 김기림 국가전복 사건부터 시작해서 주요 사건에 그놈의 손이 닿았고. 나도 뒤처지지 않기 위해 1과에서 더러운 짓을 마다하지 않았어. 그래도 쉽지 않더구나.
저는 부장님을 믿었고 2과는 다르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부장님이....... 정엽은 말을 잇지 못했다.
내가 원래 1과에 있을 때 주로 했던 일이 김전호를 돕는 공작이었다. 김기림 사건은 내가 처음 이곳에서 일할 때 있었던 일이야. 김전호의 지시로 일을 처리했지. 오정훈과 같이 말이야. 넌 이제 곧 죽게 될 테니 그래도 궁금한 것은 풀고 가라고 하는 거야. 괜히 원혼이나 이런 것으로 나타날 필요는 없어. 더 이상 그 짓을 못할 것 같아 2과로 옮긴 것이고. 넌 그때들어온 거다.
가진 것을 그렇게 놓기 싫은가요? 김경섭 박사건도 다 마찬가지군요. 의식제어 프로그램이 제대로 되지 않자 마르크박사를 불러온 것이고요. 그 실험을 성공시키려. 정엽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건 내가 아니라 김전호가 주도 한 거야. 정엽아, 지금 여기서 무너지면 난 모든 것을 잃게 돼. 그건 다 마찬가지지. 김부장은 뭔가 회상에 빠진 듯 했다. 그는 자괴감을 느꼈는지 헛웃음을 지었다.
부장님 ‘붉은 눈 강석철’이 어떻게 죽었는지 아세요?저들이 만든 남한의 ‘붉은 눈’으로부터 아이를 구하려다 총에 맞았더군요. 강석철 조차 그랬어요. 그런데 당신들은 대체 뭐죠? 제가 목숨까지 걸면서 충성하려 했던 이 조직이 어떻게 이럴 수 있죠? 부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부장은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넌 참 열심히 했어. 내 예상과 기대를 벗어나지 않더구나. 너를 데려온 이유도 네가 가진 그 집착을 써 먹을 데가 많을 것이라 생각했지. 넌 어머니 사건이 트라우마니까. 그 부분만 잘 활용하면 되니 그래 네 말도 맞아. 넌 여기를 집처럼 생각했고 나를 따랐지. 너의 최대치를 사용한건 나야. 그동안에 네가 한 조사와 수사는 모두 괜찮은 셈이었지.
그래서 김전호 실장과 거래를 하신건가요? 차기 국수본장으로? 제가 부장님을 잘못 봤네요. 전 부장님을 위한 제물이 되는 거군요. 정엽은 허무함이 밀려왔다. 다리에 힘이 풀려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었다.
그래 어쩔 수 없지. 나도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허나 어떡하겠냐. 다 그런 거 아니겠냐? 사실 너도 조직에서 누린 게 많을 텐데. 안 그래? 네놈도 나처럼 변하는 것은 시간 문제일테지.
아뇨. 저는 부장님처럼 될 생각이 없습니다. 정엽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 그렇게 되진 말아야지. 다만 기회가 없으니 문제야. 걱정하지는 마. 순직으로 잘 처리해 줄 테니까국가를 위해서 헌신한 너의 노력이 묻히지는 않게 해 주마. 나도 이 정권이 딱히 마음에 들지는 않아. 총통은 진작 물러났어야 하고. 이제 내가 차기 국수본장이 돼서 좀 바꿔 보려한다.
다들 그렇게 얘기하죠. 하지만 그 자리를 위해 그런 짓을 벌여서는 안 되는 겁니다. 결국 그 권력에 스스로 중독되는 거죠. 당신들이 지금 이곳을 어떻게 만들어 놨는지를 보세요. 국가를 위한다는 이름으로 권력을 유지하고 많은 사람들을 고통에 빠뜨렸고 시스템을 망가뜨리고 있죠.
미안하다. 너에게 특별한 악감정은 없어. 너는 말 그대로 성실하게 너의 일을 다 한 거지. 내가 인정에 휩쓸리지 말라고 했는데 그 말을 실천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자 이제 그럼 마지막 인사를 하자. 부장은 정엽의 가슴을 향해 총을 겨눴다. 정엽은 눈을 감았다. 그때 타당 하는 또 다른 총 소리가 들렸다. 부장의 시선이 소리가 난 쪽으로 옮겨간 사이 정엽은 재빨리 차량 뒤로 몸을 피했다. 곧바로 장애물을 찾아 정엽은 둔치로 내려갔다. 장소를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후 또 한 번의 총소리가 들였다. 부장의 욕설이 들렸다.
어떤 새끼야. 이정엽 나와. 너는 오늘 여기서 마무리 돼야해. 부장은 소리를 질렀다. 정엽은 강가의 둔치 시멘트 구조물로 뛰어 내려갔다. 앞이 보이지 않아 여러 번 둔치에서 구르기를 반복했다. 몇 발의 권총 소리가 다시 들렸다.
누구지? 정엽은 구조물에 숨어 둔치 위쪽을 주시했다. 부장이 총을 가지고 있어 쉽게 접근이 어려웠다. 정엽은 왜 이 순간에 자신이 총을 가져오지 않았는지를 탓하고 있었다. 둘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지는 듯 했다. 탄알이 차량에 맞아 튕겨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부장이 k5권총과 소리가 달랐다. 다른 격발음은 리볼버 소리 같았다. 경찰용인 모양이었다. 그때 수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정엽은 받지 않았다수원은 문자를 보냈다. 자신이 지금 부장을 잡고 있으니까 멀리 돌아서 나가라는 것이었다. 수원이가 왜 여기에 왔지. 정엽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부장님 다 끝났습니다. 이제 포기하세요. 정엽은 소리쳤다. 타당. 하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비명소리가울려퍼졌다. 수원일까. 아니면 부장이었을까.
정엽이형, 큰 소리로 수원이 자신을 부르는 것 같았다.
이제 나와. 다 끝났어. 수원이 큰 소리로 정엽을 불렀다.
김부장 총에 맞았어. 상황 정리됐고. 정엽은 둔치 위로 올라갔다. 김부장이 허벅지 부근에 총을 맞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가장 고통이 심한 부위였다. 수원은 그의 손을 뒤로 묶어 수갑을 채워 놓았다. 저 멀리서 119 사이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네가 여기 어떻게 알고 왔어. 정엽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정엽은 땀을 닦고 있는 수원을 쳐다보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어린 수원이 아니었다. 여러 사건을 함께 했던 광수대 주영선배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갑자기 왠지 모를 웃음이 피식 터졌다.
왜 웃어? 수원이 이상한 듯 물었다.
아냐. 그냥. 네가 다른 사람으로 보여. 항상 어린애 같다고 생각했는데 말야.
원, 별 얘기를 다하네.
그건 그렇고 어떻게 알고 왔어?
강석철이 사망하고 그의 휴대폰을 조사했어. 급한 일이라고 바로 포렌식을 떴어. 중요한것이라고 다그쳤지. 통화목록에서 여러 가지가 나왔어. 한 놈을 잡아서 조사했고. 그놈들이 붉은 눈의 연락책이었어. 그 연락책 폰에서 형 사진하고 여러 정보가 나오더라고. 강석철에게 언제 집회가 열린다는 것을알려준놈 같아. 형도 타겟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지. 형의휴대폰 위치 추적을 해 놓았어. 바쁜 것 같아서 미처 얘기를 못했지. 갑자기 이 밤중에 여길 온다는 게 이상해서 와 본거야.
미친놈 너 일 제대로 하는구나.
형까지 잃을 수는 없어. 그럼 내가 죄책감과 상실감으로 못 견딜 것 같았거든. 내가 119 불렀어. 김부장은 출혈이 심할 거야. 빨리 저기 태워. 둘은 김부장 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김 부장이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부장님. 정엽이 그를 불렀지만 그는 다친 다리를 끌며 둔치의 수로용 시멘트 터널로 몸을 던졌다. 퍼석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머리가 깨지는 소리였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저 멀리 붉은 빛이 사이렌소리와 함께 다리를 건너 백마산 언덕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시멘트 수로의 가장자리에 아직 녹지 않은 눈은 검붉은 피로 서서히 물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