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만간 눈은 그 피도 덮어버릴 것이다. 석철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
28
정엽은 오열했다.
자리에 주저앉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멍하니 수조 안을 바라보기만 했다. 모든 사고회로가 멈춰버렸다어머니의 잔상만이 눈 앞에 남아 있었다. 그녀는 젋은 그때 그 모습 그대로였다. 다른 무궁화 부대원들도 넋이 나가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일부 인원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이들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김시후 대위는 부대원들을 시켜 상황을 수습하려 했다. 정엽을 생산 동으로 보내 진정시켰다. 정엽은 소파에 앉아 초점이 없는 눈으로 창문을 바라보았다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북한으로 전향했다고 하는 어머니가 김수필의 공장에 있다니. 김희수 부장한테 들었던 얘기를 떠올렸다. 개성시내로 돌아오는 길에서 내렸던 그 교차로에서 어머니는 실종됐다.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았다. 어머니를 찾기 위해 수없이 노력했고 방북을 시도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이후 지금의 비극적 상황과 마주한 것이다. 시후는 급하게 부대에 지원을 요청했다. 공단관리위원회와 무궁화 부대 관계자들은 회의를 진행했다. 상급부서에 상황을 보고하고 앞으로의 처리방안을 논의했다. 일단 서해산업은 당분간 사건이 마무리 될 때까지 잠정 폐쇄의 절차를 밟는 것으로 결정됐다.
연경의 사체는 남한으로 옮겨질 예정이었다. 정엽은 멍하니 창문을 바라보았다. 시후는 아무 말 없이 차를 몰았다. 시후는 무궁화 부대의 숙소에 정엽을 내려주었다. 정엽은 터벅터벅 걸어 숙소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충격은 가시지 않았다. 손이 덜덜 떨렸다. 어디에서부터 무엇을 해야 할지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옷을 벗고 뜨거운 물을 틀었다. 삼십분 동안 물을 맞았다. 수증기가 욕실에 차올랐다. 온몸에 뜨거운 물이 닿자 조금씩 정신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감정이 정리되기 시작하자 해야 할 일을 생각했다. 우선 김수필을 잡고 모든 과정을 알아내야 한다. 그를 처벌할 것이다. 가장 잔혹한 방법으로. 그와 나누던 대화가 생각났다. 정엽은 분노가 치솟았다. 사건은 이미 상부로 보고가 됐을 것이다. 서해산업과 관련된 인사들과 설립과정에 대한 조사도 필요하다. 정엽은 부장에서 전화를 해 내용을 설명하고 마르크 박사를 만났고 박사가 서해산업에 대한 모든 것을 알려주었다고 보고했다. 공단의 어머니 사체에 대한 얘기도 알려두었다.
정엽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일단 어머니 일부터 유감이다.
네가 보낸 내용을 보고 결정해야 할 부분이 있을 것 같다. 만약 박사가 한 말이 사실이라면 큰 파장이 일어날 거야. 뒷수습이 감당이 안 될 지도 몰라. 관련자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으려 할 거야.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자료도 입수했고요. 서해산업과 관련된 주요 인사에 대한 조사가 필요합니다. 공단에서 약을 제조해서 유통시켰고 상당한 물량이 남쪽으로 넘어갔죠. 북한의 장마당으로도 흘러 들어간 겁니다. 그 수익은 여러 곳으로 갔을 테고. 파일은 일단 보내드리겠습니다. 박사는 붉은 눈에 대해서도 얘기했어요. 실험데이터를 통해서 아마 남쪽에서도 동일한 방식으로 실험이 진행됐을 것이고 희생자가 상당부분 나올 수 있다고 했어요. 실험에서 살아남은 이들로 이들은 뭔가를 준비 중일 겁니다. 어디까지 개입됐는지 그리고 누가 개입됐는지. 알아야죠그들이 가만히 있을까요? 어떻게 해서든 상황을 막으려 할 테고. 수사는 흐지부지 되는 것 아닌가요? 꼬리 자르기로. 실무자 몇 명만 처벌받고. 그래서는 안 됩니다.
일단 돌아와서 얘기하자. 마르크 박사 소환도 요청도 고민해야하고. 오늘 밤에 총통 취임 20주년 행사가 열려 그 행사가 끝나고서야 뭐든 진행해야 할 거야.
아뇨 너무 늦어요. 일단 모든 자료를 파기할 가능성이 크고 이 일이 알려진 이상 선제적으로 움직이려 할 거에요. 바로 작전이 시행돼야 합니다. 듣고 계신건가요?
음...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금물이야. 일단 진정하고 차분하게 사태를 지켜보고 움직여도 늦지 않아. 부장은 뭔가 고심하는 눈치였다.
김수필 행방은 알아냈습니까?
이미 자취를 감췄어. 김수필이 월경해 남으로 내려올 때 이미 알고 움직인 듯하다. 밀항을 하든 어디 숨어있든 현재는 행방을 찾지 못하고 있어.
조력자가 분명히 있을 겁니다.
일단 정리하고 내려와 이후 상황을 진행시키도록 하자.
알겠습니다.
*
연희는 집요하게 사건을 파고 들었다. 처음 사회부 기자를 시작하며 경찰서를 돌면서 사건을 보고 인과관계를 따지며 사수에게 혼나던 시절을 생각했다. 지금처럼만 했다면 꾸지람을 들을 일도 없을 것이다. 오정훈 차안감 그리고 그의 뒤를 받혀주는 인물들 수원의 아버지 김주영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비밀은 밝혀져야 한다. 연희는 수원의 자료를 토대로 오래전 오정훈과 함께 마약반에서 근무했던 경찰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그 중 수 십 년 전 오정훈과 함께 일하다 불명예 퇴직한 신모경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는 현재 프랜차이즈 빵집을 운영한다고 했다. 그와 약속을 하고 연희는 경기도 일산동구로 향했다. 약속장소에 거의 다 온 순간 전화가 걸려왔다.
오정훈의 비서관이였다. 방송이 언제 나오며 혹시 민감한 대답이 있으면 문제가 되기에 자신들이 한번 영상을 미리 보면 안 되는지 묻고 있었다. 연희는 아직 결정이 되지 않았다고 말하고 바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지하철을 타고 백석역에 내렸다. 가게는 역 근처에서 가까웠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백발을 한 장년의 풍채가 좋은 사내가 카운터를 보고 있었다. 인사를 건네고 연희는 신경사에게 자신이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상황을 설명했다. 오정훈 치안감과 관련된 취재를 비밀리에 진행하고 있고, 경찰 아들의 죽음에 대한 제보, 오정훈이 정보화 장비 담당 경무관이 된 이후에 벌어진 의문의 시설 등에 대해서. 그가 오래전 오정훈과 같이 일한 적이 있고 불명예 퇴직을 당한 후 탄원및 해임 가처분 소송을 한 것도 알고 있다고 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는 정보를 요청했다. 신경사는 오정훈과 관련된 얘기를 듣고 한참 고민하는 것 같았다.
오래전 일이고 이제 더 이상 꺼내고 싶지 않은 얘기들이 많습니다. 제가 그의 말을 듣지 않았기에 벌어진 일이죠. 억울한 부분이 있는데 이제는 시간이 좀 많이 흘러서요. 오정훈은 김전호의 사람입니다. 20년 전 쯤 오정훈과 같이 일을 한 적이 있었죠. 종로서에 있을 때였습니다. 김전호가 지금은 안보실 막후에서 일을 꾸미고 있지만 그 전에는 검사였죠. 김전호는 정치적 반대세력을 무지막지하게 탄압했죠. 부총통 전경호의 눈에 들기 위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그러다 보니 전경호의 눈에 든 것인지. 선후관계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는 권력의 끄나풀이었죠. 그가 검사로 있을 때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인의 싹을 잘라 버려 재기가 불가능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런저런 혐의를 씌워서요. 김전호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부총통 전경호의 일을 도왔어요. 제 상관이었던 오정훈은 그때 충실하게 맡은 역할을 수행했죠. 혹시 김기림 사건 기억하시나요? 그는 커피를 마시고 목을 축였다.
네 알고 있죠. 북한의 지령을 받고 반체제 혁명을 일으키려 했다는 노동운동가였죠. 당시에 따르는 세력도 많았다고 알고 있는데요. 대학생들과도 주기적으로 접촉을 하고 반역혐의로 20년 형을 받았죠. 지금은 잊혀 졌지만.
아직은 살아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세력은 여전합니다. 그 사람의 기록과 내용이 조작된 것 이라면요.
네? 연희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그런 일이 많았습니다. 총통의 집권 초기라 정치적으로 불안정했죠. 권력에 잠재적 위험이 된다고 하면 없는 것을 만들어 제거를 했죠. 여기도 북한과 다르지 않았어요. 알려지지 않았을 뿐입니다. 오정훈은 김전호에게 충실했죠. 저는 그때 그의 사건처리를 보고 증거를 조작한 것이 아니냐고 했습니다오정훈은 저를 회유하더군요. 저는 그럴 수 없다 했습니다. 그러면 안 될 것 같으니까. 이후 저를 비리경찰로 몰고 사건과 관련해 돈을 받았다는 누명을 씌웠습니다. 연희는 김주영 경위 사건을 떠올렸다.
그 당시에 저 말고도 몇 명은 비슷하게 경찰을 그만뒀죠. 자리를 보존하려면 침묵하거나 동조하거나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뭐 하러 이런 위험한 취재를 하러 다니나요? 안 그래도 될 텐데. 김연희 기자 정도라면. 다들 보신하고 자리 지키는 게 지금의 현실 아닙니까? 후후 그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죠. 그냥 진실을 알고 싶은 거예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억울한 사람은 없는지. 굳이 사명까지야 아니더라도 각자 맡은 일을 하는 거 아닐까요. 연희는 김주영이 한 말을 자신도 하고 있는 듯 느껴졌다. 그의 말이 맞았다.
권력이 견고한 것 같아도 무너지는 것은 한 순간입니다. 어떤 계기가 있죠. 특이점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단번에 시작될 겁니다. 얼마 전 광장에서 큰 시위가 있었다고 하네요. 알고 있죠? 그때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고. 정보야 통제하면 되지만 자유에 대한 사람들의 욕구를 통제하는 것은 한계가 있죠. 그 때가 다가온 것인지도 모릅니다. 한 순간이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처럼. 말은 안 해서 그렇지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겁니다. 행동으로 나서지 않을 뿐인거죠.
혹시 현재 말씀하신 부분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가 있을까요? 오정훈은 디지털 장비정책관으로 보직변경을 했는데 이상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새로 만들어진 연구실험시설에서 뭔가 일이 발생한 것 같아서요. 저에게 제보를 한 어머니는 아들이 특수훈련을 받다가 숨졌다고 하더군요.
음. 오래전일이라 뭔가 자료가 있을는지 모르겠네요디지털장비와 관련된 부서에 지인이 있습니다. 그도오정훈은 이제 경찰을 그만둬야 하고 처벌을 받아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만나보면 뭔가 건질 것이 있을 겁니다. 연희는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신경사와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그는 기사를 통해 꼭 볼 수 있으면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 역시 신경사처럼 오정훈과의 악연이 많았다. 연희는 그에게 파주의 연구시설에 대한 자료를 부탁했고 그는 익명과 취재원 보호를 요청해 자료를 받을 수 있었다. 그는 연희의 딥스로트(주:자신이 일하는 조직의 불법이나비리에 대한 정보를 익명으로 제보하는 사람)가 되어 여러 자료를 넘겨주었다. 연희는 김희수 부장에게 지금까지 취재한 내용을 보고 했다. 정엽과 수원과 함께 얘기했던 그 내용들이 모두 맞아 들어갔다. 부장의 얼굴은 심각해졌다.
야, 이거 정말이야. 이거 너무 큰데. 확실해? 네가 취재한 게. 사실 맞냐고. 너 감당할 수 있겠어? 저들을 건드릴 수 있냐는 말이지. 오정훈이 진행하는 프로젝트는 혼자서는 추진할 수 없어. 이건 뭔가 윗선과 연결이 돼 있을 거야. 사건의 중심에 안보실이 있고..…..부장은 말끝을 흐렸다. 만약 의혹을 제기 한다면 저들은 갖은 방법을 동원해 우리를 괴롭힐 거야.
알고 있어요. 하지만 부장님도 아시잖아요. 우리는 사실을 아니 진실을 알려야 하는 의무가 있는 거잖아요.
당장 확답은 못하겠다. 너도 보강취재 해보고. 이 건은 나 혼자 독단으로 결정하기가 어려워.
누군가 알게 되면요? 그럼 바로 외압이 들어 올 텐데요.
너와 나 만약 지금 이 사건을 기사화 시키고 뭔가 변화가 없다면 바로 옷 벗고 나감과 동시에 소송과 감옥살이의 시작이다. 너 감내할 수 있겠어? 최연경 선배는 독재에 저항하는 아이콘이 됐지만 사찰과 검열 등에서 자유롭지 못했어. 선배의 주변 사람들도 모두 감시의 대상이 됐으니까. 지금은 그때보다 더 할지도 몰라. 체제가 지금 위기에 빠졌으니까. 조금만 기회를 보고 있자. 틈이 보일 때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에너지가 모였을 때 약발이 먹힐 거야. 연희도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 김연희 기자 웬일이야? 바로 방송하고 공개하자고 길길이 날 뛸 줄 알았더니. 아니네. 부장은 너답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부장님 무슨 말씀이세요. 이건 정권을 무너뜨릴 정도의 파급력이 있는 사건이에요 쉽게 볼 것만은 아니죠. 일단 상황을 보고 때를 기다릴 필요가 있는 거죠. 부장님 말씀이 맞아요.
오. 많이 컸네. 그사이에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
정엽이가 그렇게 만든 거야? 부장은 슬쩍 웃으며 말했다.
그 자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그놈도 지금쯤 머리가 터질 것 같을 거예요.
수원은 광수대에 복귀했다. 몸은 회복되었지만 후유증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마약수사와 관련된 업무는 정신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윗선에서 더 많은 실적과 할당량을 요구해 팀원들 모두 공급책 검거에 여념이 없었다. 반장은 수원의 얼굴을 보고 며칠 좀 쉬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했다. 하지만 수원은 거절했고 틈나는 대로 석철 일행이 움직임을 파악하려 했지만 행방은 쉽게 드러나지 않았다. 대체 저들은 뭘 하려고 하는 거지? 수원은 밖으로 나가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때 정엽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몸은 나았어?
형 오랜만이네. 나 파견 끝나고 복귀했어. 사무실이야. 개성에는 벌써 다녀 온 거야? 어떻게 됐어.
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김수필이 사체로 발견됐어. 궁평항 근처에서.
뭐? 김수필이라고 하면 그 공단의 대표 아냐? 그 사람이 왜? 거기서 발견돼? 그도 죽었어?
이제 모든 게 밝혀지겠지. 어디까지 갈지는 모르겠지만. 궁평항에 간 이유는 밀항을 위해서일 가능성이 커. 연결고리를 찾기 전에 누군가 김수필을 제거해 손을 쓴 것 같다. 뭔가 곧 큰일이 생길 것 같은 느낌이야. 넌 너무 무리하지 말고. 단독 수사한다고 지난번처럼 사고 나면 내가 너희아버지에게 뭐라고 하냐. 일단 몸부터 챙겨. 정엽은 조심하라는 투로 말했다.
반장이 내가 자꾸 외부로 돌면서 단독수사를 하고 있는 것을 아는 것 같은데 시간이 별로 없어. 되도 않는 시시한 사건 몇 개하고 조무래기 마약 공급자 검거를 닦달하는데 지금 그런 거 할 때가 아니거든. 김포 농가에 있던 차량하고 그 유령 같은 놈들은 내가 계속 좇고 있으니까.
김수필의 사체가 궁평항 근처에서 떠오른 것은 그가 숨진 뒤 이틀 뒤었다. 사체가 가라앉은 후 부패로 인해 부력에 의해 떠오르기까지의 시간이다. 관할 경찰이 출동해 조사가 진행됐다. 사체를 옮기고 신원파악이 이뤄졌다. 국수본에는 실시간으로 사망사건이나 사건 사고에 대한 정보가 올라오고 있었다. 정엽은 자신이 찾던 사람임을 알게 된 후 허탈감이 몰려왔다. 분노의 대상이 간단하게 사라져 버린 것이다. 허탈감과 상실감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대로 끝낼 수는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그 기원을 찾아야 한다이들이 계약한 APA라는 인력파견업체 즉, 페이퍼 컴퍼니에 대한 조사도 진행되고 있었다. 정엽은 수사관 몇 명을 궁평항 관할 경찰서로 보내 CCTV를 확보하고 수사를 진행시켰다.
김수필의 죽음에 대한 조사도 함께 진행되고 있었다. 석철 일행은 며칠째 인천외각의 한 모텔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연구소에 있는 물량이 없어 이들 두 명만으로도 마지막 물량을 배송하기에는 충분했다. 이들은 김포의 농가에서 나온 이후 경찰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동식은 고통이 찾아오고 있었는지 하루 종일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역시 발작의 빈도와 시간이 늘어나는 모양이었다. 석철은 그의 몸을 알코올로 닦아 주었다. 석철은 다른 인원에게 남한의 사회 안정성 요원들이 아직 우리를 쫓고 있을 수 있기에 당분간 움직이지 말고 기다리라 했다. 동식은 몇 시간 동안 고통에 몸부림치다 잠이 들었다. 그는 잠시 후 깨어나 물을 마셨다.
괜찮아졌나? 석철이 근심스러운 듯 물었다.
일없소. 이제 곧 나아질 테니 잠시 기다리시오. 동식은 몸을 일으켰다. 석철은 뉴스채널을 틀어놓고 포탈사이트를 연이어 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김수필의 사망에 대해 나온 것은 없었다.
남조선에서 정보를 통제하고 있을 수도 있소. 보통 이틀이 지나면 사체는 떠오르는 법이니 누군가는 발견했을 거요. 동식이 말했다.
김수필은 끝까지 비굴하게 보이더구나. 그 모습 그대로 그는 저승으로 갔다.
잘했소. 청화수에게서 연락은?
이틀 후다. 마지막 그 일을 처리하면 될 것이다. 그럼 일은 끝난다. 이후 바로 개성으로 돌아간다.
김전호는 김수필의 사망소식을 듣고 안심했다. 일이 제대로 처리된 것이다. 다만 그는 김수필을 처리한 게 강석철이라는 것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용산의 안보실로 향했다. 부총통 전경호와 약속이 되어 있었다. 전경호는 평상시처럼 의자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총통의 방은 그새 가구와 바뀌었고 인테리어에 신경을 쓴 듯했다. 전경호가 이렇게 뭔가를 바꿨을 때는 심경의 변화가 있었을 때다. 수 십년간 그를 봐왔던 김전호가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내가 총통이 된다고 하면 뭘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뜬금없이 전경호는 그 말부터 꺼냈다.
꼭 무엇을 해야 한다 보다 사람들에게 변화와 희망을 주는 게 정치의 역할이 아니겠습니까? 새로운 총통과 새 시대가 왔다고 환호하겠죠. 사람들은 포장만 바뀌어도 그렇게 생각하니까. 김전호는 소파에 앉았다.
음... 요즘은 말야. 이 나라를 통째로 새롭게 다 바꿔야 할 것 같은 생각이 계속 든단 말이지. 귀찮게 구는 일부 세력들을 좀 더 쓸어 버리고 깔끔하게 새로 시작하면 개운한 느낌이 들것 같아. 지금의 안보법 처벌이 좀 너무 무기력한듯해. 형량을 좀 늘려서 아예 모이지 못하도록 더 엄격한 집행이 필요할 듯싶기도하고. 너무 물러 터졌어 법이. 그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중국처럼 좀 엄격해야 보기가 좋아. 지금은 총통이 늙었는지 너무 눈치를 봐. 가끔씩 겁도 주고 좀 저들을 눌러야 엉뚱한 생각을 못하는데.
취임하시기 전에 저도 그 부분을 손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상황부터 보고 드리겠습니다. 파주에서 이동해야 할 인원이 지금 파주연구센터에 묶여 있습니다. 공단으로 올라간 세 명 중에 2명이 부작용으로 숨지고 한명만이 실험에서 살아남았습니다. 또 다른 파주 인원 10명은 현재 대기 중입니다이들의 능력을 테스트할 좋은 기회이기도 합니다.
계획대로 차질 없이 진행되는 것은 맞는가? 폭발이 생겼다면서 그것은 어떻게 하려고?
별거 아닙니다.
지난번 프로젝트에서 외부에서 사람을 써서 여러 가지 위험부담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확실하게 우리 쪽 내부 사람을 쓰려고 합니다. 그게 장기적으로 나을 겁니다.
보고가 들어왔는데 알고 있겠지? 그 업체 대표라고 하는 놈이 싸이코 짓을 벌였다지? 뭔 기자 한명을 납치했다고 하던데. 그것은 외부로 나가지 말아야 해. 오래전 북한으로 전향했다는 여기자라면서 그때 지지층을 모아 우리에게 유리하게 정국을 만들었던 것 같은 기억이 있는데. 이제 입은 어떻게 막을 건가?
공단관리위원회에는 이미 조치를 취해놨고 군 쪽은 좀 더 수월할겁니다. 군에서 그 일이 새어나가기는 어렵습니다. 이미 만나서 손을 좀 써뒀습니다. 얘기가 돌지 않게 검열을 더 강화할 생각입니다.
총통 취임 20주년 기념행사를 잘 치러야해. 늙어빠진 총통은 그 행사를 마지막으로 이제 퇴장할 때가 됐지. 20주년 취임행사가 신호가 되는 거야. 이번에고삐를 단단히 쥐려면 자네가 얘기했던 그들을 앞으로 얼마나 써먹을 수 있을지를 봐야겠어. 실험이 잘 된 건지. 앞으로 그걸 잘 활용해야해. 부총통 전경호는 걱정된다는 투로 말했다.
이미 준비는 다 마쳐놓았습니다. 너무 염려 안하셔도 됩니다.
그래야지. 이번에 실수가 나오면 자네도 다음은 없을 거야. 전경호는 냉정한 표정으로 김전호를 처다 보았다.
기념식 일주일 전부터 총통실과 정부부처 그리고 안보실은 긴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거리 곳곳에는 총통의 20주년을 기념한다는 플래카드가 걸렸다. 방송과 미디어는 중간광고와 여러 특집프로그램으로 행사 진행의 군불을 때기에 바빴다. 한겨울로 접어들었지만 열기만큼은 한여름 못지 않았다. 연말분위기도 한 몫 했다. 총통을 지지하는 세력들은 연일 총통으로 인해 자유대한민국을 지킬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북한의 내전상황을 반면교사로 내세워 총통을 지키자는 정치이념을 만들고 여론전을 벌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만 정권은 행사에 관제적 성격이 과도하게 드러내지 않게 위해 노력했다. 연예인과 유명인사와 가수 등을 초청해 한바탕 축제로 만들 생각이었다. 거대한 전광판이 세워지고 축하 행사를 하루 앞두고 경비인원도 늘어났다.
행사는 대규모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가수들의 축하행사와 국내외 유명인의 축하인사도 생방송으로 방송될 예정이다. 행사는 무리 없이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다행사 당일 오후부터 한창 리허설이 펼쳐지고 있었다. 공영방송의 유명 아나운서 남녀 두 명이 사회를 보았다. 이들은 오차 없이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사전에 진행해야 하는 말투와 농담도 사전에 맞추는 것을 잊지 않았다. 가수의 축하공연도 차례대로 이어졌다. 리허설을 준비하는 인원과 행사에 동원된 수 백명의 인원 그리고 일부 지지층과 관객은 행사 단계 단계가 끝날 때마다 웃음과 환호 소리를 내며 축하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8시에 개막식과 환영무대가 펼쳐지기에 다들 리허설에 집중하고 있었다.
모두들 준비는 됐나? 석철은 동식과 다른 대원들에게 상황을 물었다. 석철이 청화수한테 연락을 받은 것은 세 시간 전이였다. 총통 축하 집회에 참여하라는 것이었다. 장소와 위치 그리고 맡은 역할을 알려주었다.
문제없소. 동식이 대답했다. 다른 인원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리허설이 끝나고 날이 저물고 있었다. 어둠은 여섯시 쯤 찾아왔다. 일곱시 쯤 행사의 시작을 알리는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모두가 소리를 지르며 숫자를 따라 외쳤다. 하나 제로. 불꽃이 터지며 축제의 막이 올랐다. 행사는 리허설대로 순조롭게 진행됐다. 광장에 모인 일부 사람들은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총통이 걸어온 길이라는 짧은 다큐멘터리가 상영되기도 했다. 일부는 그 모습을 보며 울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절반정도의 행사가 지나갈 무렵이었다. 시간은 8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멀리서 고함소리가 들렸다. 행사장 주변을 둘러싼 경찰과 사람들이 충돌했고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석철과 동식일행이 움직이기로 예정된 시간은 9시였다. 행사의 절정이 바로 그 시간이었다.
뭔가 이상한데. 시간이 이르잖소. 저들이 저렇게 많았소? 굳이 우리가 나설 필요가 없을 듯한데. 우리가 움직이지 않아도 여기는 시끄러울 것 같은데. 동식이 말했다.
상황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수 십명의 사람들이 갑작스레 소리를 지르며 광장으로 몰려들었다. 갑작스레 몇 명이 단상에 난입했다. 누군가 독재자 총통은 물러가라는 소리를 질렀다. 그 말은 곧 구호가 되었고 곧 함성이 되었다. 사람들이 구호를 외치며 광장을 뒤덮었다. 의자와 단상에 앉은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함성이 뒤섞이고 있었다. 그날은 김기림의 출소 날이었다. 그는 반정부 선동과 보안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20년형을 선고 받고 안양 교도소에 갇혀 있었다. 김기림은 총통 정권에 눈엣가시였다. 그를 따르는 세력들이 정치세력화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오랫동안 가석방 없이 그는 수형생활을 지속하고 있었다.
이들은 김기림의 출소에 맞춰 그를 마중 나온 뒤 광장으로 향했다. 정권의 입장에서는 화해 무드와 축제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의도였는데 이 선택이 오히려 악수가 된 것이다.
돌발 상황에 아나운서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 소란은 예정에 없던 것이었다. 그 모습이 고스란히 방송을 탔다. 상황을 파악한 경비대는 급하게 진압 인원을 늘렸다. 경찰의 무전소리가 들렸고 대로변에 경찰차량에서 진압대가 뛰어 나왔다.
행사를 치러야 하니 과격한 폭력진압은 자제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곧이어 집회에 몰려든 사람들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광장을 빠져 나가려는 사람들과 몰려드는사람들이 뒤엉켜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석철과 동식일행은 상가 근처에 있었고 집회에 몰려든 사람들에 뒤섞였다. 이들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원은 신분을 밝히고 용의자를 찾고 있다고 하며 상황실에서 CCTV로 안면검색을 하고 있었다. 안면검색 프로그램이 강석철과 동식의 얼굴을 지목했다. 이후 수원은 바로 뛰어나갔다. 수원은 총을 빼 들었다.
붉은 눈. 맞나?
수원은 큰 소리로 이들을 불렀다. 과연 이쪽으로 왔구나. 수원은 정엽과 함께 보았던 영상을 떠올렸다. 경찰의 포위망을 뚫어내던 이들. 광장에서 개최되는 총통 취임 기념행사에 이들이 나타날 것으로 생각했다. 석철 일행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수원은 그를 겨누고 있었다. 석철은 수원을 보고 슬쩍 웃으며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수백 명의 관객들과 시위대와 사람들은 우왕좌왕하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연단 아래에 설치된 귀빈석과 테이블 그리고 천막 등이 사람들로 인해 쓰러졌다. 기습시위를 하는 사람들은 구호를 외치고 행사장 앞으로 나아가려 하고 있었다.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은 멀리서 이 광경을 구경하고 휴대폰 카메라로 찍고 있었다. 경찰들이 전열을 가다듬어 사람들을 에워쌌고 진압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석철과 동식은 서로 눈짓을 보내며 경찰의 전열을 흩어 놓았고 사람들의 움직임을 틔워 주었다. 진압봉을 빼앗아 방패로 방어하던 진압경찰을 밀어내고 틈을 만들었다. 공간이 생기면 시위대는 앞으로 나아가기를 반복했다. 사람들이 몰리자 연단위에 추위를 막으려 설치했던 가스버너가 넘어졌고 천막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상황은 통제가 어려운 순간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경찰 지위관이 무전을 시작했다. 10여명의 진압 경찰이 천천히 현장에 투입되었다. 이들은 움직임이 달랐다이들의 표정에는 어떤 망설임이나 감정도 없어 보였다. 시위대가 진입한 순간부터 방송은 이미 송출이 중단되고 특집편성이 시작되었다. 10여명의 건장한 특수경찰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광장 한 복판으로 뛰어들어 상황을 정리하고 반항하는 사람들을 진입해 나갔다. 누구든 상관하지 않았다. 제복을 입지 않았으며 반항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진압 대상이었다. 사방에서 비명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들은 여성과 어린이등도 가리지 않았다. 순식간에 수십 명을 제압해 바닥에 눕혔다. 절반은 진압 봉을 들고 거침없이 사람들을 내리치기 시작했고 머리와 어께, 팔과 다리 등을 맞은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다른 경찰들은 의식을 잃은 자들을 끌어냈다. 무대가 놓여 있는 장소는 아직도 시위대와 관객들이 충돌하는 상황이었다.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누군가 소화기 분말을 뿌려댔다. 분무가스와 소화액이 무대위에 흩뿌려져 눈처럼 보였다.
동식아, 저들은 좀 이상하지 않나? 석철이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은 제복을 입은 이들을 가리켰다. 마르크 박사가 말한 그들인가? 남조선에서 실험이 진행될 수 있다고 했지?
그런 것 같소. 그들이 만들어 놓은 붉은 눈 같은데. 조심하시오. 우리와 차이가 없지 않을까.
우리는 이제 곧 다시 움직여야하오. 청화수와의 약속은 지켰으니. 석철은 인파를 뚫고 뒤로 나아갔다. 남조선에서 만들어진 너희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한번 봐야겠다. 그는 진압봉을 들고 반대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만 두시오. 우리는 빨리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니까. 동식이 말했다. 잘못하다가는 여기에 갇혀 잡힐 거란 말이요.
잠깐만 기다려봐.
석철은 동식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조심스레 후방으로 이동해 빠르게 붉은 눈에게 달려들어 그들의 다리를 내리쳤다. 하지만 이들은 감정이나 고통 통증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듯 했다. 곧이어 다른 붉은 눈 여러 명이 석철을 둘러쌌다. 그 중 한명이 진압봉으로 석철의 등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석철은 통증을 느끼며 묵직한 물체가 등을 내리 누르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들에 대항하기 위해 사방으로 진압봉을 휘둘렀지만 이들은 석철의 움직임을 모두 피했다. 석철은 자신의 능력과 비슷한 여럿을 모두 상대할 수 없었다. 이들은 모든 외부자극에 둔감해지고 자신에게 주어진 목표와 임무를 수행하려는 듯 의식이 통제돼 보였다. 마르크 박사는 두 번 정도 이와 같은 실험을 한 적이 있었다. 석철과 동식 그리고 다른 인원들을 모두 한곳에 몰아넣었다. 이후 자신 이외의 모든 존재를 위협적 존재로 여기도록 했다.
마르크는 대상자 모두에게 상대를 제압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상황이라는 의식을 주입한 적이 있었다. 의식이 해제 될 때까지 석철과 동식 다른 동료들은 모든 체력을 다 소진할때까지 서로를 적으로 인식해제압하려 했다. 일부는 부상을 입었다. 팔과 다리가 부러지기도 했다. 이들은 상대에게 적개심을 가진 이유가 무엇인지 의식을 되찾아도 설명하지 못했다.마르크 박사는 이 과정은 실험의 일부분이라고 했다석철은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남한의 붉은 눈도 같은 의식 통제 과정에 있는 것이다. 하루가 지난 후 의식은 돌아왔다. 지금은 저들에게서 멀리 떨어지는 것이 최선이다. 석철은 가까스로 붉은 눈의 포위를 빠져나왔다. 그때 경찰의 방송이 들렸다.
순순히 검거에 협조하기 바랍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총소리가 들렸다. 순간적으로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자세를 낮췄다. 누군가 정적을 깨고 구호를 외쳤다. 우리는 무기가 없다. ‘총통은 퇴진하라’고 외쳤다. 또 다른 사람이 일어났다. 십 여명의 사람들이 일렬로 일어나 구호를 외치자 다른 무리의 사람들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총소리가 다시 울렸다. 공포탄일까? 석철은 그렇게 생각했다. 처음 총소리가 들린 후 누군가 피를 흘리고 쓰려져 있자 비명소리가 광장에 퍼져나갔다. 총소리가 한 번 더 들렸다. 근처에서 또 다른 사람이 털썩 쓰러졌다. 그는 쿨럭이며 피를 토했다. 사람들의 울 부 짓는 소리와 비명소리가 들렸고 이번에는 두 세 명이 연달아 쓰러졌다. 붉은 눈은 시위대에 조준 사격을 한 것이다. 이들은 단순히 주입된 의지를 실행할 뿐이었다. 걷잡을 수 없는 파국이 시작되고 있었다. 분노한 사람들은 순식간에 진압 경찰에게 몰려들기시작했다.
남한의 붉은 눈과 근처의 제복을 입은 경찰이 대상이었다. 시위대와 시민들은 점점 이성을 잃었다. 경찰이 거꾸로 시위대와 사람들에게 포위되었다. 분노한 시민들은 수적 우위를 앞세워 경찰을 에워쌓았다. 하지만 여러 명이 자신들에게 달려들자 남한의 붉은눈은 이들을 적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타탕.
이들은 시민들에게 권총을 연달아 발포했다. 총소리에 사람들이 비명을 질러도 남한의 붉은 눈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곧바로 경찰병력이 추가로 투입됐다. 석철은 시위 장소에서 벗어나지 못한10살 무렵의 남자아이가 붉은 눈의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을 보고 있었다. 이들의 조준 사격은 아이에게도 예외가 되지 않았다. 인민들과 어린아이에게 이렇게 총격을 가해서는 안된다. 진압병력의 수가 늘고 사태가 심각해지면 이제 위험해진다. 석철은 위기의식을 느꼈다.
네 말대로 여기 갇혀 있다가는 빠져나가지 못할 수 있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 내가 시선을 끌 테니 일단 빨리 빠져나가. 약속장소에서 보자.
안되오 형님. 같이 가야지. 무슨 소리요.
아냐. 우리는 개성에서 만나면 된다. 어서 움직여. 늦기 전에 이대로 있다가 더 많은 인원이 몰려들면 꼼짝없이 갇히게 돼. 퇴로를 만들기 위해 석철은 붉은 눈에게서 빼앗은 권총을 하늘을 향해 발사했다. 순식간에 또다시 사람들이 엎드리기 시작했고 남한의 붉은 눈의 시선은 석철에게 쏠렸다.
썅, 빨리 돌아와야 하오.
동식은 사람들을 헤치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석철은 우선 붉은 눈 한명의 다리를 겨눠 총을 발사했다. 그는 풀썩 하고 통나무처럼 쓰러졌다. 쓰러진 남한의 붉은 눈은 그 순간 석철을 향해 총을 겨눴다. 그 앞으로 10살 정도의 아이가 울면서 뛰어가고 있었다. 아이가 뛰는 방향은 넘어진 남한 붉은 눈의 총구방향이었다. 석철은 아이를 보았다. 순식간에 남한의 붉은 눈과 눈이 마주쳤다. ‘에이 씨발’ 욕설을 하며 그는 망설임 없이 아이를 구하러 뛰었다. 동시에 총격 소리가 들렸다. 그는 아이의 어께를 잡고 대리석 바닥을 굴렀다. 아이는 무사했다. 바닥이 등에 닿는 순간 왼쪽 갈비뼈 근처가 화끈 거렸다. 뜨거운 불에 데 인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숨이 막히기 시작했다. 아이는 울고 있었다. 무사한것 같았다. 석철은 아이를 놓아 주었다. 그는 울면서 손을 들고 있는 엄마를 찾아 가는 듯 보였다. 석철은 그 순간 어릴적 고향의 풍광이 떠올랐다.
늦가을의 따뜻한 햇살과 함께 감을 따러 여동생과 뒷산에 올랐다. 손이 닿지 않는곳에 있는 감을 잡다가 그녀는 발을 헛딛었고 소리를 내며 그의 어께위로 떨어졌다. 묵직한 느낌이 생생했다. 석철은 그녀를 꾸짖었다. 그 때 올려다본 나무에 잘 익은 감이 달려 있었다. 손에잡힐 듯 그 감은 생생했다. 점점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머릿속이 하얘지는 듯 했다. 잠에 빠져들 것 같은 기분이었다. 모든 것이 편안했다. 아드레날린이 분비된 것인지 더 이상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머니와 동생을 다시 만나지는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동식과 일행은 이곳을 빠져나갔을 것이다. 아니 빠져나가야 한다. 사람들의 울부짖음과 흐느낌이 점점 작게 들렸다. 진공 속에 들어온 듯 한 기분이다. 고개를 돌리니 바닥에 핏물이 보였다. 누군가의 피가 그의 눈으로 흘러들어왔다. 모든 것이 붉게 보였다. 하얀 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눈은 피에 녹아 형체를 감췄다. 진눈깨비는 곧 함박눈으로 바뀌어 광장을 뒤덮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피까지 덮어버리지는 못했다. 누워서 광장 바닥을 살폈다. 하얀 눈은 내리자마자 붉은 피에 녹아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조만간 눈은 그 피도 덮어버릴 것이다. 석철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