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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oofs Nov 02. 2024

[장편소설] 붉은 눈 3부 -12-

당신이 광기에 사로잡힌 권력을 당해낼수 있을까?


27

정엽은 수원과 통화한 뒤 개성으로 향했다. 일주일 만이었다. 오전 8시 정엽의 차는 강변북로를 지나 자유로로 들어섰다. 첫 월경을 할 때와 달라진 것은 없었다. 출입국사무소의 직원이 바뀌었을 뿐이었다.  라디오뉴스 를 틀자  평양과 개성에서 산발적인 교전이 있을 것이라는 전망을 내보냈다. 남한사회는 큰 동요는 없었다월경을  위한 출입국 관리소에 신고를 마치고 북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익숙한 기분이었다.  새벽의 어두웠던 안개가 걷히고 형체가 시야에 드러나는 듯 불확실성은 한층 줄어들었다. 임진강 근처로 시선을 돌렸다사람들은 여전히노숙을 하고 있었지만 그 수가 줄어든 것은 분명했다. 어디로 이동했을까. 겨울동안 묵을 곳을 마련했늘까? 정엽은 서리가 내린 풀밭을 바라보았다. 날은 점점 추워지고 있었다. 조만간 겨울이 닥친다.천막과 판자로 얼기설기 지어진 저곳도 치워질 것이다개성에서의 경험이 자신의 고정관념을 바꿨다. 지위와 서 있는 곳이 달라지면 다른 풍광이 보이듯  전혀 새로운 생각이 초여름을 수풀처럼 그의 머리속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어제 정엽은 부장의 호출을 받았다.

   

내일 월경이냐? 얘기 새나가지 않게 하느라 힘깨나 들였어. 가서 실적을 내봐. 다시 가는 기분이 어때? 수사와 조사 방향은 잘 준비됐어?

김수필이 모든 사건의 중심에 있다는 합리적 의심을지울 수 없습니다. 그와 다른 사람들이 어디까지 엮여 있을지 모르죠. 모든 것이 들어 맞습니다.

누군가 윗선에서 손을 쓸 수도 있어. 너도 김수필을 만났으니 뭔가 얘기가 들어갔겠지.

부장님이 막아 주실 거 아닌가요? 정엽은 채근하듯 물었다.

넌 증거는 있어? 부장은 웃으며 대답했다.

이제 가서 찾아야죠. 가져오기만 하면 되는 건데요.

말은 잘한다. 저들이 그렇게 쉽지 않을 거다.

제가 드린 메모리에서 이병수의 비리혐의를 잡았잖아요. 그걸로 사령관과 딜을 할 겁니다. 조사 병력을 지원해 달라고. 공단 폭발사건도 그 문제와 관련이 있을 겁니다. 물론 마르크 박사도요. 대체 무슨 짓을 벌인 건지 이제 밝혀야죠. 부장님 만약 말입니다. 사건이 크게 확대되면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냥 흐지부지 넘어 가는 거 아니겠죠?

 뭔가 성과도 없는데 미리 잘될것을 걱정하는 모습이란 말야. 시험을 잘 볼 것으로 예상하고 엄마한테  선물을 사달라고 하는 우리 아들놈처럼. 부장은 자신의 테블릿 컴퓨터의 사진을 손으로 탁탁 쳤다.

마르크 박사는 국정원에서도 찾던데 어디서 뭘 하고있는 거야? 그가 물밑으로 드러나면 상황파악이 쉬울 텐데.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았다면 죽었다고 봐야해.

부장님 이 사람은 누구에요? 정엽은 태블릿 컴퓨터에 있는 사진을 바라보았다. 연구 시설에서 세명이 서로 밀착해 어께에 손을 올리고 있는 기념사진으로 보였다.

누구긴 누구야. 저기 가운데 있는 사람이 마르크 박사지.

네?

왜? 너도 보지 않았어? 예전 마르크 박사 말야. 부장은 새삼스레 뭘 그리 놀라냐는 투였다.

정엽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태블릿 컴퓨터에 있는 사진을 여러 번 돌려보았다. 머릿속에서 뭔가 뒤죽박죽 뒤섞이는 느낌이었다. 분명히 이 사람을 기억하고 있었다. 북한에서 봤던 이국적인 느낌의 중년 남자. 그런데 그는 개성사투리를 쓰고 있었다.

아....이 사람이 마르크 박사라니. 정엽은 뒤통수를 맞은 듯 한 충격을 느꼈다.

이제 알겠네요. 메모리가 어디서 나온 것인지. 정엽은 뭔가 답답한 것이 풀렸다는 말투였다.

개성에 갔을 때 개풍군 평화유지군 부대에 폭발물조사 담당을 만나러 간 적이 있었죠. 그때 그 부대에  누더기를 걸치고 달구지를 타고 온 장발의 남자가 불을 지르겠다 소란을 일으켰어요. 부대에서는 그 사람을 유치장에 가뒀고 제가 만났죠. 그 메모리는 박사가 저에게 넣어준 거군요. 힌트를 준거죠. 제가 남쪽에서 왔다는 것을 알았으니. 박사가 어떤 이유로 이미 서해산업하고 일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일 테고.

그럼 그 자료를 통해서 뭔가 너한테 말을 하려 한 것이겠지. 확실해? 다시 자세히봐. 맞아? 부장이 의심스러운 듯 물었다.    

네,  이제 분명해 졌어요.


정엽은 그 사람이 좀 기묘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제대로알아보지 못한 자신을 탓했다. 선입견과 경험이 인식을제한한 것이다. 정보요원으로서 여러 가능성을 열어두지 못한 치명적 실수 였다. 버스로 개성까지 이동하는 도중 박사 사진에 집중하느라 부장에게 물어보지 못한 내용을 잊고 있었다. 경찰 조사실에 있던 자를 누가 그자를 빼돌렸는지 확인하려 했지만  통화가불가능한 지역이었다. 국정원인가 아니면 1과의 함부장? 다른 조직? 그를 다른곳으로 보냈다는 것은 정보를 알고 있는 것이다.


 버스는  공단을 지나 개성초입에 도달하고 있었다. 정엽은 무궁화 부대 사령부를방문해 사령관에게 2차 조사에 대한 간단한 브리핑을 마쳤다. 이병수대령의 사망 때문인지 부대 분위기가 어수선해 보였다.군 검찰도 사건에 대해서 조사하는 모양이었다. 부사령관 저격은 큰 사건이었지만 수사본부가 차려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과실과 관련된 조사는 진행되고 있는 중이었다.  군 검찰이든 어떤 조직이 됐든  도와줄 인원이필요하다. 정엽은 이병수를 대신해 부임한 부사령관 대면을요청했다. 부 사령관실 문 앞에서 노크를 했다.


들어오세요. 새로운 부사령관이 대답했다.    

아니 국수본은 대체 왜 자꾸 군 관할지역에서 조사를 하는 겁니까? 신임 부사령관은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수사관님 개인적인 선호지역인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공문을 보내드렸고 합의가 된것으로 압니다만. 정엽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부사령관님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만 공단 업체에 대한 위법사항에 대해 국수본에서 조사와 조치가 가능하다는 것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번에는 지원 인원을 파견해 주십시오. 주저하는 부사령관에게 정엽은 결정적 한방을 날렸다.

제가 가지고 있는 자료는 군의 명예에 좋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전임 부사령관 이병수가 북쪽 인원과 모종의 거래를 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 부분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거나 밖으로 새어나간다면 총통에게 피해가 될 겁니다. 이후 어떻게 되실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곳도 시끄러울 것이고 신임 부사령관님에게도 불똥이 튑니다. 불명예제대는 군으로서 가장큰 수치죠. 신임 부사령관은 잠시 고민하는 눈치였다.

음... 알겠소. 부사령관은 마지못해 승인하는 불편한말투였다. 최대한 거리를 두려했지만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이 못마땅한 모양이다.

사령관 실을 나오자 군 검사나 수사관으로 보이는 한동혁이 마땅찮은 표정으로 그를 마주 대했다.  그는 대뜸 정엽에 대해 도발적인 말부터 꺼냈다. 부사령관이 지시를 내린 모양이다.    


이수사관님은 지난번에 방문했다고 들었는데 또 오셨군요. 뭐 상부의 지시라 협조할 부분은 협조하겠지만 굳이 이곳까지 오시다니 국수본은 국내문제에 신경을 쓰지 않기로 한 것입니까? 산적한 문제가 많을 텐데요. 정엽은 크게 상관없다는 듯 담백하게 말했다.

군 검찰은 그쪽 일을 조사하시면 되고 저는 다른 할 일이 있습니다. 어쨌든 저에 대해 너무 신경 쓰지 말기 바랍니다. 저의 목표는 이병수 사령관의 죽음이 아니라 서해산업에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군에서 공단까지 수사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하지요. 한동혁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지난번처럼 김시후 대위가 도와줄 겁니다.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같이 협조를 하는 방향으로 진행하시지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김시후 대위가 운전을 하고 몇 명의 파견 인원이 뒤따라 군용 지프를 타고 출발했다.

이수사관님 이병수 사령관 사망사건 때문에 오시지는 않았을 테고 다른 이유가 있으신 거죠?

네 맞습니다. 혐의가 입증돼서 그것을 확인하고 체포 할수도 있죠.

뭔가 흥미진진한 일이 펼쳐 질 것 같은데요. 여기서 겪어보지 못한. 맨날 뻔 한 곳만 돌아다니고 수색만 했지. 아드레날린이 나오는 듯 합니다. 뭔지 모르지만 영화의 한 장면 같네요. 범죄자를 좇는 형사역할?뭐 그런 건가요? 그는 슬쩍 웃으며 차를 몰았다. 김시후의 조각 같은 각진 얼굴에서 웃음기가 보이자 과묵한 모습과 다르게 이질적이라는 느낌이었다.

 저 장소는 이수사관님이 평생 잊을 수 없는 곳이 되겠네요. 그는 정엽이 총을 맞고 차량이 전복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죽다가 살아난 곳을 어찌 잊겠습니다. 어머니를 잊을 수 없는 것처럼. 어머니도 개성에서 실종되셨죠 아직 생사를 모릅니다. 저는 살아계실 것으로 믿고 있고요.

네? 아니 어떤 일로? 개성이 수사관님과 악연이 많군요.

얘기하자면 깁니다. 어머니가 기자였는데 공단이 설립되고 취재차 왔다가 실종됐죠. 벌써 10년도 넘은 일입니다. 차는 미끄러지듯 시내를 빠져나가 휑한 도로로 들어섰다.

 공단으로 가기 전 먼저 개풍군 부대로 가시죠. 찾을게 있습니다. 그게 먼저입니다.    

알겠습니다.  시후는 과묵한표정으로 운전을 하기 시작했다.


군용 지프 차량은 속도를 냈다. 북쪽 지역의 공기는 한층 더 차가왔다. 도로변 갈대는 어느새 누런색을 띄고 있었고 잡초들도 이미 생기를 잃었다. 간간히 보이는 푸른 잎이 도드라져 보였다. 차는 곧 개풍군 평화유지군 부대에 도착했다. 정엽은 내려서 부대를 확인했다. 지난주에 방문 했을 때에 비해 부대 천막의 숫자가 늘어났고 보안이 강화되었다. 도착해 행정 분소를 찾았다. 여전히 진료가 이어지고 있었고 차례를 기다리는 대기인원은 줄어들지 않는듯 했다. 일부는 축처진 몸을 간신히 지탱하는듯 위태해 보였다. 한 여성이 아이를 업고 대 여섯 살쯤 돼 보이는 깡마른 남자아이의 손을 잡고 안절부절하는 중이었다. 그녀는 아이를 달래느라 정신이 없었다. 정엽은 행정부서로 가서 상황을 설명했다. 지난주 소달구지를 타고와 부대에 불을 놓으려 해 유치장에 갇혔던 사람을 찾는다고 했다. 개풍군의 평화유지군 부대에서는 김석만이라는 사람을 확인해 주었고 정엽일행은 연안군으로 이동했다.


그리 멀지 않네요. 길이 좋지 않지만 한 시간 이내로 도착할 듯 한데요.

이수사관님 그런데 부대의 폭발 관련된 보고서는 요청하지 않으시나요? 지난번에 보고서 최종본이 나왔다고 하던데요.

지금은 그 보고서가 필요 없습니다. 왜 폭발이 일어났는지 이유를 다 알고 있으니까요.

네? 아니 어떻게......

일단 김석만이라는 사람을 만나서 얘기를 들어보죠. 그 사람을 만나는 것이 먼저입니다. 차량은 곧 연안군 일대에 도착했다. 군 경계 표시가 보였고 3km가 남았다는 이정표가 눈에 들어왔다. 이정표는 낡아 제대로 글자가 보이지 않았다.


 안내해준 주소로 차량은 천천히 이동했다. 멀리 시멘트로 지어진 슬레이트 지붕의 단층집이 군대 군대 눈에 들어왔다. 차량은 대로에서 농수로가 흐르는 흙길로 들어섰다. 한 대가 들어가기에도 좁은 길이었다. 조심스레 차량은 앞으로 나아갔다. 산 바로 앞에 소나무가 한 그루 있고 우측에 우사가 보였다. 차량은 집 앞 공터에 도착했다. 주소로 보면 이 집이 맞는 것 같은데. 정엽과 수혁은 차에서 내려 마당으로 들어갔다. 마당은 정돈이 잘 되어 있었다. 우사에서 소한마리가 소리를 내며 낮선 사람이 온 것을 알리는 듯 했다. 툇마루에 머리가 긴 한 사람이 뒤돌아 앉아 있었다.  


여기 세대주가 김석만이 맞습니까? 시후가 침묵을 깨뜨리며 말을 꺼냈다.

뉘신가? 긴 머리를 한 인민복을 입은 사람이 대답했다. 정엽은 그를 처다 보았다. 얼마 전 개풍군의 부대에서 만났던 그 사람이었다. 이국적 외모와 긴 머리 어딘지 모르게 약간 어색한 개성 말투. 마르크 박사였다. 정엽은 툇마루로 마르크 박사 가까이 다가갔다.

박사님, 저를 알아보시겠습니까?  방화범으로 몰리지는 않고 잘 나오셨나 봅니다. 마르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 알고 있습니다. 그날 제게 메모리를 남긴 것도 그리고 당신이 마르크 박사라고 하는 것도. 마르크는 정엽을 흘낏 쳐다보았다.

알면서 뭘 묻는 거요. 왜 날 찾아왔어?

박사님이 주신 메모리에 흥미로운 내용이 많더군요.저는 박사님이 왜 더 이상 서해산업에서 일을 하지 않으시는지 궁금합니다. 대충은 짐작하지만 직접 듣는 것이 더 나을 듯 해서요.

그 이유를 알고 싶소? 내가 준 메모리 내용으로 충분히 확인하지 않았나?

메모리의 내용은 상황을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오. 마르크는 안 채의 방문을 열었다. 앳된 여자 아이가 힘겹게 몸의 중심을 잡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몸을 잘 가누지 못하고 있으며 눈은 풀려 있었다. 전형적인 마약 중독 증세였다. 가끔씩 몸을 떨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치료를 시작한지 며칠 됐는데 이제 시작이요. 연구동에서 치료제를 좀 가져 왔소. 어린애를 데려다 강제로 마약을 먹이고 매춘을 시켰소. 김수필은 남한으로만 약을 보낸 것이 아니요. 연구동에서 만든 물건들은 비밀리에 남으로 내려 보냈고 일부는 여기 개성에 풀었지. 몰래 동유럽으로도 내 보냈을 거요.

그는 그렇게 수익을 챙겼소. 김수필 뿐만이 아니지. 그래 공단을 여기에 만들어 놓은 이유가 뭔지 아시오? 저들은 자금이 필요하지. 그게 통치든 뭐든 간에나는 대한민국이 왜 저렇게 되어 버렸는지. 왜 많은 중독자를 양산하는지. 그나마 내가 대학에다녔던 시절이 지금보다 상황이 나았소. 지금처럼 무분별하게 진통제 성분이 남용되거나 처방이 쉽게 이뤄지지는 않았을 테니까. 저들은 대체 왜 미국의 그 전철을 따라가려 하는지 아시오? 그들은 수익이 필요한 것이요. 사람들을 옥죄고 통제하며 자기들의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자금. 수많은 사람들을 중독자로 만들어가며 돈을 긁어모으고 있지. 저들는 국가를 파멸로 몰아가도 상관없을 거야. 자신의 권력만 유지하면 그만이니. 정엽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기억을 잃어 이 집에서  몇 년간 있었소. 김석만과 그의 어머니와 선화가 잘 알지 못하는 나를 받아주었고 인간으로 대접해 주었지. 여기서 지내며 기억을 되찾게 되었고 이후 난 오랫동안 북조선을 떠돌아 다녔소. 곳곳에서 그들이 사는 모습을 보았지. 여기서는 사람이 사람으로 대접을 받을 수 없는 곳이 많소. 그동안 내가 얼마나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 깨닫게 되었지. 내가 생각한 기존의 가치관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고 할까. 김석만은 다쳐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있고 그의 어머니는 알츠하이머 증세를 보이고 있소. 난 이들에게 빚을 갚아야 하오. 그게 사람의 도리지. 하늘에서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기 작했다. 겨울을 알리는 차가운 비였다. 마르크는 말을 계속했다.


실험인원의 절반은 죽어 나갔지. 그들이 고통으로 숨을 거둘 때마다 난 인간성을 점점 잃어가는 느낌이었소. 나도 그들과 계약을 했지만 점점 생각한 것과는 달랐소. 그게 그들의 전략인지도 모르겠어. 내 잘못도 있지. 좀 더 세밀하게 봐야했는데 그렇지 못했으니. 나도 실험을 성공시켜야 한다는 성공과 명성에 대한 욕구가 더 컸고. 그제야 김경섭 교수가 어떤 상황에 처한 것인지를 짐작했소. 김경섭 박사가 누군지는 알 테고. 당신들이 좇고 있는 집회에서 인간의 능력을 넘는 것 같은 능력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내가 실험한 결과물이지. 붉은 눈이라고 불리는. 이제 실험데이터를 통해 그들은 아마 똑같은 인간들을 복제할 것이요. 그들 중 많은 수가 죽게 되겠지.

국가를 위하고 자유대한을 지켜야 한다는 명분으로 이들을 실험에 참여시켜 당신이 봤던 그들의 능력을

갖춘 부대를 만들어 낼 테고. 그들의 의식을 통제하거나 지배 하려 할 것이요. 그들은 세뇌되겠지. 마르크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당신도 알겠지만 그들이 자본을 대주고 이 실험을 지원한 이유가 뭐겠소.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요. 그들은 의식을 통제하고 주입하는데 관심이 있었지. 많은 사람들을 반감을 눌러야 하는 게 권력을 가진 자로서 당연한 욕심 아니겠소. 내 실험이 의도치 않은 형태의 결과를 만들어 내자 이들은 욕심을 더 부렸지. 물론 그 탐욕은 결국 화를 부를 거요. 내가 그들에게 준 데이터에는 최종 실험결과가 빠져있어. 데이터를 바탕으로 실험을 하면 그럭저럭 강화인간을 만들어 낼 수는 있소. 그들은 이 계획을 ‘키메라 프로젝트’라고 부르고 있지. 정엽은 국가기밀 프로젝트를 본 기억을 떠올렸다. 자신의 패스코드로는 접근이 제한돼 있었다. 마르크는툇마루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그는 말을 계속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이들은 급속한 부작용에 시달리게 될 거고. 계속 더 많은 약을 투여해야 의식을 유지할수 있소. 안구의 혈관이 터져 눈이 붉어지는 빈도는 늘어날 것이고 갑작스레 의식이 한 시간 동안 돌아오지 않기도 하겠지. 필연적인 부작용이요. 그 빈도를 늦추는 방법은 있지만 결과적으로 세포의 과도한 에너지 사용과  비정상적인 활동으로 인해 근육은 녹아내릴 수 밖에 없소.

증세를 늦추는 방법은 있지, 하지만 되돌리지는 못하오. 엔트로피를 역전시킬수 없지. 내가 그들에게 보낸 자료에는 그 부분이 빠져 있소. 마르크는 정엽에게 메모리스틱 하나를 던졌다. 내가 얘기한 모든 것이 이 안에 있소. 얼마 전 연구동을 날려버리기 전에 가져온 것이요. 이 내용은 따로 암호도 걸어 놓지 않았고. 마르크는 잠시 말을 멈추고 정엽을 쳐다보았다.

 당신이 이것을 활용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소. 그 광기에 사로잡힌 권력을 당해 낼 수 있을까? 연구소를 없애려 그곳에 갔을 때 지하 마지막 방에 사체를 보존해 놓았더군. 그건 내가 한 일이 아니요. 그들은 그런 일까지 진행하고 있소. 난 긍정적으로 보지는 않지만 그래도 당신이 뭔가 의지가 있기에 여기에 다시 왔겠지. 한번 지켜 보겠소. 얼마 전 김병철 사령관을 만났지. 그와 이런저런 얘기를 했고. 조만간 공단 폭발사건과 관련해 남조선의 조사관이 올 거라 하더군. 폭발과 관련된 사건은 개풍군 부대가 맡아서 진행할 테니 당신이 그 부대로 올 거라 생각했소. 당신을 보고 내가 소란을 좀 일으켰고. 유치장에서 당신을 만날 수 있었지. 기회가 찾아왔어. 난 그때 가지고 있던 메모리를 당신에게 넣었고. 안 채에서 김석만의 신음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약을 먹일 시간이요. 욕창을 관리해야 하고 어머니도 돌봐야 하오. 다 됐으면 어서 가시오. 마르크는 방안으로 들어갔다. 정엽과 시후 그리고 다른 일행들은 곧바로 차를 돌려 공단으로 향했다. 둘은 공단 근처에 도달할 때 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정엽이 말을 꺼냈다.


대위님과 일부 인원은 연구동을 살펴 주십시오. 박사의 말에 따르면 지하 2층까지 있다고 하니까. 지난번에 지하 일층 입구를 확인했을 뿐입니다. 증거를 확보해야 합니다. 저는 나머지 인원과 함께 김수필의 사무실과 생산동에 있는 자료를 압수하고 김수필을 검거 할 것입니다. 개성에 거의 도달하지 휴대폰 신호가 잡혔다. 정엽은 통화를 시도했지만 이뤄지지 않았다. 대위의 전화를 빌려 출입국 관련시설로 전화를 걸어 김수필의 월경을 막으라는 요청했다. 차는 속도를 높여 공단으로 진입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정엽은 다른 2명과 함께 사장실로 급하게 움직였다. 직원들은 갑작스런 상황에 어리둥절했다. 부사장 성문도 마찬가지였다.

김수필 사장님 계십니까? 국수본의 이정엽입니다. 김수필 사장님을 불법 마약 제조와 판매 그리고 살인방조 및 불법인체 실험과 관련된 혐의로 체포하겠습니다. 모든 증거를 확보했습니다. 어디계십니까?

사장님은 남한 업체와 계약 문제로 월경을 하셨는데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의 말을 듣자마자 큰 체격의 무궁화 부대원들은 생산 동을 뒤지기 시작했다정엽은 이전에 그를 만났던 2층 사장실로 올라갔다.그는 책상과 서랍 등에 있는 각종 서류와 내용들을 압수하기 시작했고 그의 노트북 컴퓨터를 박스에 담았다. 성문은 정엽의 행동을 보고 얼어붙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엽은 그의 책상 뒤편에 있는 <쾌락의 정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림을 이리저리 흔들어 보고 떼어내자 안에 미닫이 형태의 서랍이 보였다.  서랍을 밀어 열려 했지만 잠겨 있었다.


열어주시죠. 그는 성문에게 말했다. 협조 안하시면 부사장님도 사체 은닉 및 동조죄 불법약물제조 혐의로 처벌을 받게 될 겁니다. 김수필과 입을 맞췄는지 성문은 자신도 모르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정엽은 헌병에게 도구를 부탁해 서랍을 뜯었다. 안에는 노란색 표지로 돼 있는 파일 홀더가 있었다. 김수필의 계약서였다. 계약주체는 김수필과 APA라는 인력 파견업체였다. 정엽은 파일도 압수품 상자에 담았다. 그때 김시후 대위와 함께 움직였던 병사가 뛰어와 정엽을 찾았다.

대위님께서 급하게 오시라고 합니다. 그의 말을 듣고 정엽은 실험동 쪽으로 움직였다. 지하1층을 내려가자 안쪽에서 여러 명의 손전등 불빛이 보였다. 정엽도 손전등을 들고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안쪽에는 아직도 수분을 머금은 듯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지하 2층까지 내려가자 마르크 박사가 말한 공간이 나타났다. 중앙계단의 철골구조는 일부 눌려있었지만 고개를 숙이면 충분히 움직일 만 했다.

대위님, 정엽이 큰 소리로 김시후를 불렀다. 입구 끝 맨 오른쪽 구석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엽은 허리를 숙이고 나아갔다. 실험도구가 폭발했는지 탄 냄새와 화학 약품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정엽은 호실을 확인했다. 207, 208을 지나쳐 오른쪽 끝 210호실 근처에 도달했다. 마지막 호실 안쪽에 김시후 대위가 있는 듯했다. 군복을 입은 이들의 뒷모습이 보였고 푸른빛이 그들을 둘러싸고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이곳은 비상발전이 이뤄지는 곳인가 봅니다. 정엽은 그렇게 말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뭐가 있나요? 그들은 아무런 말도 않고 앞에 있는 거대한 수조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정엽은 무너져 내린 벽면과 상부의 배관을 피해 조심스레 허리를 들었다. 수조가 점점 시야에 들어왔고 망막이 빛과 형체를 구분하고 시작했다. 머리가 풀려 있는 여인이 수조에 떠 있는 것이 보였다.    

오셨군요. 이게 대체 뭔지. 부대원들은  멍하니 푸른빛의 수조에 정신을 뺏긴듯했다.

정엽도 자세히 수조에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는 뭔가 두려움과 익숙함이 동시에 온몸에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순간적으로 정엽은 정신을 잃을 뻔했다. 시야가 별안간 흐려졌다.  

아.., 정엽은 비명을 내지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긴 머리와 익숙한 얼굴과 외모 그녀는 나이를 먹지 않고 박제된 자신의 어머니 최연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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