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 쿨 하기도 하고. 그는 쿨하다는 것에 성조를 넣는 것처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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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의 타일은 곧 떨어져 나갈 정도로 낡아 있었다. 영등포역 4번 출구에서 먹자골목을 돌아 한 블록을 지나면 성수빌딩이 있다. 개인사업자들의 여러 사무실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정확하게 어떤 업무를 하는지 파악하기 쉽지 않은 업체의 이름이 줄줄이 빌딩 입구에 줄줄이 걸려 있었다. 아래에서 세 번째 거치대에는 ‘hy 탐정사무소’ 라는 작은 판넬이 붙어 있었다. 현민은 3년전 오래된 4층 건물 3층 가장 구석자리에 사무실을 개업했다. 지인들은 다들 정신이 나갔다는 말을 쏟아 냈다. 현민은 괜한 걱정을 안 해도 된다는 말로 사람들을 안심 시켰지만 그들의 말이 옳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낭만적 탐정은 없다. 모텔촌에서 불륜사진을 찍기 위해새벽이슬을 여러번 맞았다. 운전석을 쇼파 겸 침대로 사용해 망원렌즈를 들이대며 몇 시간을 기다리며 문득 현민은 그들이 해준 말의 의미를 확실하게 깨달았다. 개업 1년 만에 한계가 찾아왔다. 육체적이고 재정적 문제가 그를 덮쳤다. 개업 홍보 기간이 끝나자 가끔씩 들어오던 의뢰가 뜸해진 것이다. 홍보비용을 꾸준히 책정해야 하지만 쉽지 않았다. 그의 일상은 늦서리에 맞은 축 쳐진 벼처럼 힘이 빠지고 있었다.
위기는 시작에 불과했다. 아내와 이혼 한 뒤 현민은 염창동 빌라에 전셋집을 얻었다. 머릿속에 복잡해 한국을 떠나 한 달 정도를 쉬면서 태국의 시골과 라오스일대를 돌아다닌 후 귀국했다. 당시 알고 지내던 경찰 선배로터 방송국 외주 시사프로그램 코디네이터 자리를 소개 받았다. 말이 좋아 코디였지 사실은 경력을 활용해 귀찮은 섭외와 사람을 수소문하라는 것이었다. 나이트 크롤러 였다. 힘들었지만 피디가 원하는 일을 해 주자 조금씩 경력이 쌓이고 일거리가 늘었다. 소재가 될 만한 사건을 골라내 취재에 들어갔다. 일은 수사와 크게 다르지 않아 어려움은 없었다. 대중이 원하는 자극적 소재는 개천의 돌무더기에 몸을 숨긴 수석처럼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어쨌거나 존재가 드러난다. 제보가 올 때도 있었다. 사건이 될 만한 것인지 판단 한 후 제작회의 후 취재에 들어갔다.
전 남편과 양부모를 살해하고 동거 남의 안구에 세제를 주입해 실명에 이르게 한 뒤 보험금을 수령한 사이코패스 여인. 재혼한 아내를 유인해 생명보험을 들게 하고 고의로 교통사고를 낸 사건에 대한 조사도 그의 손에서 이뤄졌다. 그러던 중 우연치 않게 사건을 설명하는 내용이 유투브에 소개되고 공중파 프로그램의 패널로 출연할 기회도 얻었다. 상황은 그렇게 계절이 변하는 것처럼 흘러갔다. 그가 탐정 사무소를 연 계기는 단순했다. 방송국에서 시사 프로그램을 개편하며 안면이 있던 피디가 현민과 함께 일을 해보자는 제안을 한 것이다. 사무실을 개업하고 본격적으로 시사 고발 프로그램의 객원 패널로 참여해 보라고 넌지시 제안했다. 그에게 바람을 넣은 것은 한 교양 피디였다. 프로그램 개편이 되면 자신이 시사 고발 프로그램 연출을 할 것이라며 확신에 찬 모습으로 그에게 큰 소리를 쳤다. 로비에서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이키며 그는 현민을 불러 세웠다.
― 아 그러니까. 박 기자가 이번에 입봉을 해야 한다니까.
― 김피디 님, 제가 감독도 아니고 뭔 입봉입니까?
― 어허, 박기자가 뭘 몰라서 하는 소리야. 요새는 패널로 돌아다니기만 해도 먹고 살아. 나도 이번에 시사교양프로그램에서 히트작 하나 내야지. <그것이 알고 싶다>를 넘는 게 내 목표라니까. 나도 이제 뭔가 화제작을 만들 때가 되었거든. 여러 번 말했잖아. 자네도 뭔가 하나 타이틀이 있어야 자리를 더 잘 만들어 놓을 수 있다고. 탐정 박현민 이라고 소개해봐 하면 뭔가 있어 보이잖아. 자네는 거기다 전직 경찰인데 사람들이 믿지 안 믿겠어? 시청자들의 호기심도 끌 수 있고. 탐정 쿨 하기도 하고. 그는 쿨하다는 것에 성조를 넣는 것처럼 소리를 올려 강조점을 찍었다.
― 나도 예전에 하드보일드 계열 소설 많이 좋아했어.
― 아. 그건 피디님의 취향이죠. 현민은 웃음을 지었다. 취향과 현실은 다른데... 그는 말끝을 흐렸다. 당시 피디의 말이 다 틀린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다.권혁수 피디는 좋은 인상이었지만 치밀한 시사프로그램을 맡기에는 뭔가 좀 부족하다고 현민은 종종 생각했다. 권피디는 프로그램이 확정이나 된 것처럼 여러번 그를 설득했다. 그의 생각대로 시사프로그램을 위해서는 여러 사람이 필요했다. 미심적은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현민은 일단 믿어보기로 했다. 몇 번 똥 볼을 차기는 했지만 그의 경력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나 그렇듯 프로그램은 내부 사정으로 개편이 미뤄졌다. 권피디는 헛발질을 한 것이다. 방송사 개편과 동시에 현민의 기대는 송두리째 날아가 버렸다. 경영진이 시청률을 핑계로 시사 프로그램을 꺼린다고 했다. 시사프로그램 대신 데뷔 20년 된 걸 그룹 출신의 연예인이 진행하는 토크쇼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몇 주 후 현민은 피디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책임을 경영진에게 돌렸다.
‘미친놈들이 시청률만 밝히며 자신도 물을 먹은 것’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통에 그는 나중에 통화하자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면 그렇지 저 인간을 믿은 내가 한심한 놈이다’ 현민은 중얼거렸다. 권피디 핑계를 대기는 했지만 사실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 보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 조사업무라는 것은 분명했다. 현민은 시간을 들여 민간 자격증 몇 개를 취득했다. 사무실 계약을 했기에 이제 상황은 되돌릴 수도 없었다. 인생이 계획한대로만 흘러가나. 그는 혼잣말을 했다. 몇 주후 김피디는 미안했는지 능글맞게 웃으며 프로그램의 프로젝트를 몇 개를 소개해 주었다. 사무소를 개업했지만 시사 프로그램 외주 코디 일을 아예 놓은 것은 아니었다. 탐정 일을 하면서 알게 된 정보를 프로그램 취재에 활용하기도 했다. 늘 그렇듯 경찰이나 기자나 탐정이나 하는 일은 비슷했다. 귀신이 씌였는지 이 바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남 뒤나 캐다가 인생마감 하는것인지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모텔촌을 잠복하며 창문을 쳐다보고 있을 때 여러 번 들었던 고민이기도 했다. 현민은 몇 년 동안 숨 돌릴 틈 없이 일에 빠져들었다
회사를 살리기 위해서 최대한 많은 사건을 맡아 일을 처리해 나갔다. 정교하게 짜인 톱니바퀴 속에 끼인 것 같은 일상이 그를 붙잡았다. 그는 경찰을 퇴직하고 한동안 방황하다가 다시 시작된 커리어를 어쨌든 천천히 지속해 나갔다. 나무늘보가 땅에 내렸다가 느릿느릿 나무로 올라가 가지를 잡고 옮겨가는 과정과 유사했다. 의뢰가 조금씩 늘어나자 도움이 절실했다. 여러 개의 사건이 밀려들면 혼자 일을 하기에 힘이 부쳤다. 최민희가 입사한 것은 그 즈음이었다. 그녀는 인터넷 보안 회사에서 일한경력이 있었다고 했다. 보통의 여자들이 선호하지 않는 컴퓨터 보안과 해킹이라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보수집분야에 특기가 있다고 했다. 특기가 해킹이나 정보수집이라고 해서 그 분야에 대해서 물어보았지만 sns와 인스타그램 이야기를 늘어놓고 얼버무리는 듯 해 묻다가 말았다. hj탐정 사무소에서 해킹기술이 필요할까 싶었다. 삶은 영화가 아니다. 그녀를 추천해 준 것은 강력반에 함께 있었던 선배였다.
― 일 잘해. 공무원은 적성에 안 맞고 해서 내가 한번 알아보다가 연락한 거야. 지금 박기자 하는 일에 도움이 될 거야.
경찰 사수였던 김선배가 내뱉듯 말을 꺼냈다. 그녀가 자질구레한 일을 맡아주자 상황은 나아지기 시작했다. 일에도 좀 더 집중할 수 있었다. 현민은 출근해서 외근을 주로 나갔고 간간히 들어오던 방송국 사건 취재와 코디네이션에 더 많은 시간을 집중해 쓸 수 있었다. 선배의 추천이 빈 말은 아니었다. 최민희는 콜센터에서 근무한 경력도 있어서 상담전화를 능수능란하게 받았고 의뢰를 쏠쏠하게 성사시켰다. 현민에게 필요한 정보를 손쉽게 제공했다. 수다가 심하고 시도 때도 없이 자신이 없는 사이에 사적인 전화를 하는 것이 문제였다. 주의를 주었지만 그녀는 이것도 홍보의 한 방법이라고 둘러댔다. 그녀는 의뢰인이 상담전화를 할 때 자주 통화중이 돼야 사람들이 이곳에 뭔가 상담이 자주 걸려 온다며 노이즈 마케팅 이라는 핑계를 댔다.
현민은 어이가 없어 웃음을 지었지만 일처리는 잘 해주고 있어 굳이 얘기를 더 꺼내지는 않았다. 수습기간이 끝나고 정직원으로 전환하자 했더니 급여 부분도 현실화해야 한다는 등의 말도 바로 꺼내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단점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사소한 몇 가지를 제외하면 나무랄 것은 없는 직원임은 분명했다. 이후 그녀는 스스로 최실장이라는 직함을 만들어 현민에게 제안했다. 티격태격하던 둘의 관계도 서서히 거리가 좁혀져 있었다. 현민이 경찰을 그만두게 된 사연과 이혼에 이르게 된 과정을 그녀가 알게 된 후 둘의 관계는 좀 더 긴밀해 졌다.
― 어머머, 사모님 이런 경우에는 반드시 증거를 잡아야 해요. 대표님 이 분야에서는 발군이에요. 얼마 전 비슷한 상황이 있었는데 대표님이 잠복해서 증거 잡아 재판에 유리하게 제출하셨거든요. 그러니까 반드시 한번 방문하셔서 정확하게 말씀해 주시는 거예요. 위자료를 받으셔야죠.
최민희의 과도한 공감능력은 하소연을 하고 싶을 뿐인 이들에게 소송과 증거 수집을 채근했다. 그녀가 의뢰를이끌어 내는 능력은 현민도 인정했다. 최민희가 정직원이 된 이후 사무실 운영은 활기가 돌았다. 최민희와 상담을 한 뒤 도깨비에게 홀린 듯 그들은 현민에게 사건을 의뢰했다. 현민이 의뢰인의 사연을 들을 때 마다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불륜이 존재하고 있었다. 등산모임, 배드민턴 동호회, 동창회에서 만나 밀회를 즐기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만남이었다. 상담을 하다보면 일반적 가정이 정규분포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프랜차이즈 가맹점이 외부의 제품을 들여와 장사를 하는 사건, 고등학생 아이가 가출 한 후 사이비 다단계에 감금돼 불법 프로그램을 만들던 사건도 있었다. 의뢰인의 허락을 받고 사건 중 몇몇은 방송 전파를 타기도 했다. 그즈음 탐정 x라는 유투브 채널을 개설해 의미가 있는 사건은 대담의 형태로 사건의 주요 이면을 소개하기도 했다. 조회수가 쏠쏠했다. 일에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현민은 명절이나 기념일에 최민희에게 상품권이나 호텔 숙박권을 챙겨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 대표님 이게 뭐에요. 혹시 저 챙겨 주시는 거예요? 호호. 특유의 콧소리와 과도하게 흥분한 듯한 하이톤의 목소리가 사무실에 울려 퍼졌다.
수고했어. 지금까지 그래도 내가 나돌아 다니는 거 최실장이 상담잘 하고 이런저런 건수 맡아줘서 굴러가는거야. 그건 고마워하고 있어. 더 열심히 해달라고 주는 보너스지. 최민희는 특유의 콧소리를 내며 현민의 어께를 가볍게 쳤다.
아휴, 대표님도 당연히 할 일을 하는 거죠. 연차 지날 때 마다 급여 인상. 약속하셨어요. 제가 상담건수 몇 개 세이브 해 놓은 게 있는데 며칠 안에 다시 전화해서 의뢰 성사시킬게요. 호호. 그녀의 얘기가 더 길어지기 전에 현민은 머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상담실을 나와 대표실로 향했다. 캡슐 커피를 뽑아서 한잔 마시고 사건 파일을 정리하고 있자 그녀가 문을 열고 빼꼼이 현민을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 왜? 무슨 일이야. 귀여워 보이기라도 하려는 거야? 현민이 농담 웃으며 말했다.
― 대표님도 참, 제 나이가 얼만데.. 좋은 시절 다 간 거예요.
― 그 정도면 아직 한창이야. 한마디 던지듯 하고 현민은 의자를 돌려 창밖을 보며 커피를 마셨다.
― 뒤돌아 앉아서 하는 말이란. 그런 얘기는 얼굴 보고 마주서서 하는겁니다.
최민희는 토라진 고양이처럼 쾅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았다. 최민희는 동그란 얼굴형에 큰 눈과 균형 잡힌 콧날을 가지고 있어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가졌지만 또렷한 인상도 주었다. 볼살이 있어 나이보다 어려보이는외모였다. 다이어트를 입버릇처럼 말하면서도 카라멜과 사탕을 입에 달고 다니며 군것질로 끼니를 때울 때가 많았다. 다이어트와 함께 곧 운동을 시작할 것이라는 말을 되풀이 했지만 실천은 하지 않아 몸은 더욱 불어나고 있었다. 현민은 연애를 시작하기 위해서 살을 빼라고 농담 삼아 말을 자주하고는 했지만 그때마다 최민희는 모르는 척 현민의 말을 흘리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누가 보면 선문답하거나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이들만의 대화법은 반복됐다.
― 참, 내일 스케줄 잊지 않으셨죠? 퇴근하기 전 한 번 더 알려드려요.
― 어. 알고 있어. 현민은 평소처럼 툭 던지듯 말했다
― 어렵게 상담해서 잡은 스케줄이니까. 또 다른 얘기해서 의뢰 망치지 마시고요. 최민희의 잔소리가 시작될 것 같자 현민은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리고 손을 들어 흔들었다.
― 저거 봐. 항상 저런다니까.
그녀는 일부러 현민이 듣도록 목소리를 높였다. 현민은 사무실에서 사건 서류를 정리하고 시간을 보낸 후 퇴근할 생각이었다. 새로 의뢰를 맡은 의뢰에 대한 자료를 훑어 보았다. 방송 콘텐츠는 다음 주까지는 없다. 작가에게 이번 콘텐츠는 시간이 걸린다고 말을 해 놓은상태였다. 이제 좀 수월하게 보내나 싶었지만 어김없이 문제가 또 터지고 말았다. 한 달 전 사무실 건물의 주인이 바뀌었다. 건물주는 현민에게 월세를 현실화해야 한다고 넌지시 말했다. 전 주인이 건물이 낡았다며 저렴한 가격으로 임대료를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사실 그동안 현민이 방심한 것도 있었다. 3층 40평의 임대료는 근처 시세의 절반에 불과했다. 임대료가 현실이 되면 현민은 이제 1.5배에 달하는 월세를 내던지 나가야만 했다. 사태를 예상하지 못하고 최민희 실장의 급여 현실화와 여러 정보를 구독하기 시작하자 비용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위기감이 그의 뒷목을 짓누르며 그 무게를 점점 늘려갔다. 새 건물주는 이곳을 리모델링해서 병원으로 임대를 할 생각이라고 했다. 현민은 머리가 아팠다. 은행대출을 받으려 해도 쉽지 않았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최민희가 위기 상황을 파악하자 전격적으로 여러 의뢰를 성사시키고 있었다. 가급적 수월하고 일이 빨리 끝날 수 있는 일을 우선으로 하자고 둘은 합의를 했다. 신효선의 의뢰를 일단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조건은 매력적이었다. 의뢰비는 위기를 넘길 정도는 되는 금액이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사건을 현민은 번번이 거절해 왔다. 받고 싶지 않을 의뢰였다. 성과를 내기도 어려웠고 시간은 오래 걸리는 일. 하지만 이번은 어쩔 수 없었다. 지방 출장이 많고 경비도 많이 든다. 동시에 다른 일을 하기도 어렵다. 최민희는 의뢰인이 대표와 직접 통화를 하고 싶다고 대표님 번호를 알려줬고 곧 연락이 갈 것이라고 했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전화가 걸려올 때 현민은 인천 차이나 타운의 한 중국식당에서 짜장면을 먹고 있던 중이었다. 불륜으로 의심이 가는 상대가 근방에서 식당을 경영한다고 해서 확인 차 들른 것이었다. 이미 조사는 끝난 상태였다. 보고서만 만들어 의뢰인에게 넘기면 이 일에서는 벗어 날 수 있다. 어쨌든 자장면이 먹고 싶었다. 음식을 받아 한 젓가락 먹으려는 순간이었다.
― 저, 혹시..
― 네 말씀하시지요. 현민은 씹고 있던 음식을 삼키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 의뢰하고 싶은 게 있으신가요? 천천히 말씀하셔도 됩니다.
늘 그렇듯 의뢰인이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공권력이나 다른 곳에 도움을 요청하기가 어렵거나 껄끄러운 일이 많다. 현민은 수화기 뒤에서 한참을 머뭇거리고 있을 상대방을 떠올랐다.
― 제가 제대로 하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우리 애가 그런 선택을 할 리가 없어요. 그녀는 차마 말을 더 잇지 못하는 듯 했다. 흐느끼는 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감정을 담아 현민의 고막을 두드렸다. 진정이 된 듯 잠시 후 목소리가 들렸다. 뭔가 사고가 있었고 경찰 조사나 법적인 처분이 이뤄졌지만 유가족은 진실이 더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지 모른다. 사건은 끝났지만 이들이게는 아직 끝이 아니다. 이런 사건이 의외로 많다. 억울하고 분통이 터질 것이고 수사기관은 뭔가 제대로 알려주는 것이 없다. 이런 의뢰는 유가족의 감정이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었다. 상황을 봐서 의뢰를 받을지 말지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미팅 날짜를 잡았다. 그녀는 형주시에 살고 있다고 했다.
―형주시?
형주라. 멀리 있는 곳이었다. 행정수도 이전 혁신도시 개발로 공기업의 신청사가 여럿 옮겨간다는 얘기가 있는 서울에서 남서쪽에 있는 해안가 도시다. 오랜만에 듣는 지명과 장소였다. 형주는 근대문화도시로 알려져 있었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던 금강하구에는 적산가옥이 자리잡고 있었고 시내 중심부에는 유스호스텔도 여러 곳 조성됐다. 며칠 후 신효선은 영등포의 현민의 사무소에 나타났다. 그녀는 50대 중반이라고 했지만 그 나이로 보이지 않았다. 신효선은 터틀넥 캐시미어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샤넬잡지 화보에서 나올 것 같은 린넨 스타일의 트위드 자켓과 고급스러운 코트를 걸쳤다. 세련됨이 묻어 났다. 새치가 살짝 보이기는 했지만 관리가 잘 된 듯 보였고 구두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걸치고 있는 것들은 유행과는 거리가 있는 것들이었다. 굵게 컬을 한 단발 머리는 옷과 잘 어울렸다. 그 나이대에 쉽지 않은 헤어스타일이었지만 자신에게 맞는 스타일을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 얼굴에 비해 눈이 커 보였고 자연스러운 콧날과 미간과 얼굴 전체의 비율이 좋았다. 세련된 느낌이다. 얼굴은 수척해 보였다. 상담하려는 내용이 중년의 여성에게 고민거리를 안겨준 모양이었다.
― 이쪽으로 앉으세요
최민희는 그를 대표실로 안내했다. 현민도 출근 한 뒤 외부 일정이 많아 어제는 사무실에 들르지 못했다. 대표실에는 카멜색 가죽소파와 유리로 된 응접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상담실에는 아늑한 느낌을 내기 위해 오렌지색 낮은 조도의 스탠드를 켜 놓았다. 최실장이 녹색 화분을 통해 생동감을 불러일으키도록 인테리어를 손본 모양이었다. 창가 한 구석에 개업선물로 받은 대형 선인장과 커다란 아레캬야자가 어색하게 놓여 있었다. 생동감 없는 사무공간에 그마나 생기를 찔러 넣고 있었다. 스팀팩을 맞은 것처럼. 사무실 공간에 쟈스민 차 비슷한 향기가 났다. 또각하는 소리와 함께 최민희가 고급스런 찻잔 두개를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책상 옆 책꽃이에는 현민이 보던 자료와 몇 권의 책이 있었다. 쟈스민이 아니라면 긴장감을 낮추고 심신안정에 효과가 있다는 차였다. 그녀는 잠시 자리에 앉아 마음을 가다듬는 듯 했다. 이후 말을 꺼냈다.
― 포기하고 있었어요. 이제는 놓아주자는 남편의 말을 듣고 저는 불같이 화를 냈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을 그렇게 생떼같이 보냈는데 그 말이 나오냐고. 한 때 저도 이제 잊어야 할까 생각하기도 했어요. 그녀는 숨을 고르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현민은 미간을 찌푸리며 주의 깊게 그녀의 말을 들었다. 현민이 말을 꺼냈다.
― 자살이 아니다? 현민은 짧게 되물었다.
다른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녀는 말을 마치고 차를 마셨다. 생각을 가다듬고 감정을 누르는 듯 했다.
― 뭐 때문에 그렇게 자신을 내던지겠어요. 당시에 경찰도 여러 방면으로 조사를 했어요. 부검도 해야 했고. 이게 사건기록이에요. 그녀는 가방에서 사건의 일부라며 서류 뭉치를 꺼내 탁자에 꺼내 놓았다. 그 행동은 수사기관에 대한 불신과 무책임한 태도에 대한 원망이 묻어 나오는 듯 보였다. 사건은 결국 자살로 종결되었다. 다만 이유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가족들은 트라우마에 시달릴 것이다. 이런 의뢰는 참 애매하다. 품은 많이 들지만 납득시킬 증거나 결과물이 나오지 않는다면 실망감이 이들을 덮칠 것이다. 물론 새로 중요한 단서가 발견되지 않는다면 사건에 대한 미련을 정리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녀의 말을 들으며 말투와 발성이 상당히 독특했다. 마치 연극무대에서 막걸어 나온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 그런데 왜 이제 다시 그 사건 조사를 의뢰하시는 건가요? 혹시 다른 곳에도 의뢰를 맡긴 적이 있나요?
― 아뇨 다른 곳에 맡긴 적은 없어요. 박현민씨를 찾아온 이유는 일 년 전쯤인가요? <사건25> 시를 봤고 제보를 하려고 전화를 해보니 담당 작가가 박현민 기자 이야기를 하더군요. 관련된 사건을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요. 작가가 박기자님이 맡은 사건들을 얘기해 줬어요. 현민은 생각해 보니 사건과 관련된 귀찮은 일을 피디가 자신에게 떠넘긴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민은 신효선이 말한 사건을 떠올렸다. 집을 나간 단순 가출 청소년으로 실종사건으로 경찰도 크게 비중을 두지 않았다. 경찰입장에서도 흥미를 끄는 사건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이는 할머니와 같이 살고 있었기에 가정환경을 비관해 아이가 집을 나간 것으로 처리된 것이다. 그 사건은 좀 이상했다. 아이는 컴퓨터 능력이 좋았다. 사회성이 떨어지고 경계성 성격장애에 대한 소견이 있지만 문제가 될 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정보보안 분야 진로목표가 있다는 학교 담당 선생님의 말. 그가 읽었던 책들과 만든 프로그램이나 해킹 능력을 보니 수준이 높았다. 사건을 깊이 추적하다보니 아이는 의뢰를 받고 아르바이트로 프로그램과 어플리케이션을 만들었고 그들은 애플리케이션을 불법거래에 활용하며 아이를 협박해 일에 가담시킨 것이다. 방송에서는 이 부분이 집중적으로 다뤄졌다. 경찰이 미처 확인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보도가 나가자 사람들은 앞 다투어 경찰의 초기대응을 비판했다. 탐사보도 프로그램이 경찰보다 낫다는 등의 말들을 쏟아내기도 했다. 유투브에 관련 사건내용을 탐정 x라는 내용으로 업데이트 했다. 물론 그 계정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런저런 사건들의 이면을 그는 촬영하고 편집해 올렸다. 조회수가 늘어날 때 마다 수익은 소소하게 쌓였다.
신효선은 얘기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어지러움을 느꼈는지 그녀는 일어나며 휘청했지만 곧 자세를 바로 잡았다. 그녀가 코트를 입을 때 시선이 갔다. 균형이 잡혀 있었지만 몸은 상당히 말라 보였다. 건강을 챙기기도 못하고 스트레스로 시달린 것이지도 모른다. 신효선이 사무실에서 나간 뒤 잠시 소파에 깊이 몸을 뉘였다. 의뢰 내용은 쉽지 않아 보였다. 오래된 사건이고 결국 관계자 진술이 중요한데 사람들이 쉽게 입을 열지 않을 수도 있다. 새로운 사실은 나올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 이런 조사가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어쨌든 의뢰비 일부는 받았고 그녀는 결과가 어떻게 나와도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딸의 마지막을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은 것을 테다. 미련이 남지 않도록.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스케쥴을 확인했다. 우선 이틀간의 시간은 쓸 수 있었다. 이혼소송과 관련된 자료를 최민희에게 맡겼다.
그 집의 간짜장 맛은 나쁘지 않았다. 불 맛이 살아 있었고 균형도 잘 잡혀 있었다.. 이혼 소송이 진행된다면 남편은 앞으로 더 많은 음식을 바쁘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모텔촌 옆을 지나가며 당분간 모텔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경기가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대학 때 여자친구와 모텔을 들락거렸던 기억이 마치 수세기 전의 일들처럼 까마득했다. 그녀들은 지금 다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현민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동 서울 톨게이트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형주시로 가는 길에 휴게소에 들러 군것질 거리를 사 차에서 끼니를 해결했다평일 오후라 고속도로는 한산했다. 몇 달전 같은 곳을 달렸을 때 먼 산에 군데군데 보이던 눈도 어느새 다 녹아 있었다. 형주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국도변으로 들어섰다. 창문을 조금 열자 희미하게 풀내음이 느껴졌다. 형주시 중심부까지 15분 정도 남았을 때 최민희로부터 전화가 왔다. 바람소리를 뚫고 높은 하이톤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대표님, 형주 도착하셨어요?
―아니, 아직 가는 중이야. 지금 거의 다 왔는데 확인해 보라고 한 것은 다 알아봤어?
―네, 뭐 그럭저럭 파악했어요. 그래 그럼 모아 놓은 자료 일단 파일로 해서 보내줘. 혹시 시간이 더 걸려 이틀을 있을 수도 있거든.
―일단 자료부터 보낼게요. 필요한 것 있으면 말씀하세요. 운전조심시하고 잘 다녀 오시구요. 그녀는 기분이 좋은 일이 있었는지 목소리 톤이 좀 높아져 있었다.
형주시는 서울에서 고속도로로 3시간이 넘게 걸린다. ktx로 근처 도시까지는 두 시간 반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역에서 차를 렌트해 형주까지 들어가면 얼추 비슷한 시간이기는 하다. 기차를 탈까 하다가 차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형주시는 신도시 개발붐이 한창 불었다. 불꽃은 사그라들었지만 불씨는 남아 있었다. 1차 이전은 완료된 상태였고 새로운 지역기반시설이 들어섰다. 공공기관이 더 입주한다는 계획은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었다. 지역은 2차 개발에 대한 기대감으로 들썩이고 있었다. 형주와 몇몇 지역이 공공혁신도시 선정을 두고 마지막까지 각축을 벌였다. 지역 균형개발을 두고 형주가 선정된 것이다. 몇 년 전 개발과 투기붐이 지역을 휩쓸었고 혁신도시가 계획되고 관공서가 입주했다. 부동산 광풍은 잠잠해 졌다. 하지만 2차 개발계획을 둘러싸고 시끄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톨게이트를 통과해 시청쪽으로 방향을 돌리자 게시판에 혁신도시 개발과 관련된 논란을 두고 플래카드가 곳곳에 어지럽게 걸려 있었다.
10분쯤 더 달리자 고속도로 오른편에 빌라들이 밀집해 있는 곳이 보였다. 고속도로는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이곳을 순환해 시내 쪽으로 이어진다. 반석동 중심에는 폐역이 자리하고 있었다. 전형적인 구도심의 모습이다. 시내 중심부로 방향을 돌리자 시청을 둘러싼 로터리 방식의 교차로가 눈에 들어왔다. 신효선이 의뢰한 사건은 부모입장에서는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흥미로운 사건임에는 분명했다. 사건에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면 15년 만에 진실이라는 타이틀이 괜찮을 듯 했다. 진부하지만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시사탐사 프로그램으로 좋은 아이템이다. 현민은 담당 작가에게 상황을 설명해 놓았다. 한 달 정도 취재해 보겠다고 아이템으로 괜찮을지 아직은 확신하지 못한다고 했다.
―어머, 박기자님 피디님이 기대하고 있어요.
한 건 하실 때가 됐다고 하시던데요. 피디님 특유의 쪼는 말투 있잖아요. 저 요새 그거 때문에 죽을 거 같아요. 신규 아이템도 없고 제보도 마땅찮아요. 암튼 진행상황 보고 알려주세요. 기대하고 있을게요. 그와 몇 년간 일한 담당 작가가 너스레를 떨었다.
―아직 몰라. 일단 사건부터 살펴볼게.
전화를 끊고 차를 시장 주차장에 세웠다. 주변을 살폈다. 형주 모래내 전통시장이라는 큰 간판이 보였다. 간판과 기둥이 뭔가 주변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당자의 디자인 감각이 문제인가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시장 앞에 놓인 조형물은 전통시장과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몇 군데 도시 중심부에서 유사한 조형물을 본 적이 있었다. 요새 유행인가. 마치 토리이처럼 느껴졌다. 위치 앱을 확인해 약속한 커피숍으로 향했다. 시간은 오후 5시로 접어들고 있었다. 건물과 간판이 좀 바뀌었을 뿐 시내의 큰 변화는 없었다. 프랜차이즈 상가 몇 업체가 상가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고 상가 뒤 공터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실개천이 보였다. 개천에는 물이 말라 있었다. 시멘트로 사방공사와 방제를 해 놓은 개천은 짓다만 듯 건물을 방치한 듯 삭막함을 주었다. 조금 더 신경 써 공사를 해도 될 성 싶었다. 공사를 담당한 시의 담당공무원의 문제인지 그의 오래된 미적 감각에 대해서 책임을 추궁하고 싶은 생각이 벌떼처럼 몰려왔다. 버드나무와 낡은 나무벤치가 있는 듯 공터는 다진 시멘트로 덮은 주차장이 돼 있었다. 시내 중심가로 들어가 프랜차이즈 커피숍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최영은을 만나 물어볼 내용을 정리해 보았다. 경찰 사건 기록에 한정혜와 마지막으로 통화를 한 것은 최영은이라고 했다. 조서에도 나와 있는 내용이다.
4학년 2학기 마지막 학기. 졸업을 앞둔 이들은 모임을가졌다. 몇몇은 취업을 앞두고 있었고 각자 자신의 삶의 방향을 대충 정해 놓은 상태였다. 남자들은 복학을 했으니 졸업과는 상관이 없을 터였다. 한정혜가 이들과 모임을 가진 하루 뒤 건물에서 떨어진 것이었다. 모임이 끝난 후 한정혜는 심야 고속버스를 타고 형주로 향했다고 했다. 경찰의 사건조사 오전 일찍 그녀는 형주 터미널에 내려서 무녀도로 가는 버스를 탔다. 오전부터 비가 내렸고 한동안 바닷가에 있다가 시내로 간 뒤 한 밤중에 고등학교로 돌아와서 새벽에 학교 운동장에서 사체로 발견돼 신고된 것이다. 오후와 저녁시간 위치추적이 애매하기는 하지만 확실히 시내에 있었고 밤늦게 학교로 돌아가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형주의 축제가 있던 날이었다. 오후에 시내에서 cctv에 그녀의 행적이 찍혀 있기는 했다. 그녀는 풍어제 굿을 하는 형주항 근처에서 모습을 보였다. 용의자는 특정되지 않았다. 한정혜의 사망요인으로 우울증도 언급됐다. 우울증 치료제인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를 복용하고 있었고 수면제와 다발성 기질 치료제도 먹고 있다고 했다. 뇌전증과 결신 발작증상으로 인한 우울증에 대한 소견도 사건의 빠른 종결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나 막막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경찰의 사건자료를 다시 훑었다. 사건을 조사한 담당경찰관은 지성우 경위와 김선호 경장이었다. 신효선의 말로는 오래전 지성우 형사와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고 했다. 현민은 자료에서 눈을 들고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퇴근시간이 다가오자 시내에 사람들과 차량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때 긴 펌을 한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삼십대 초반 쯤으로 보이는 여성이 카페 문을 열고 실내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두리번거리며 자리를 찾고 있는 듯 했다. 약속한 시간과 그 나이대의 여성이 맞을 것 같아 현민은 시선을 보냈다. 잠시 후 그녀가 현민을 보고 눈짓을 했다. 자신이 약속 대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듯 보였다. 현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최영은씨?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 아 네. 이쪽으로 앉으세요. 전화 드렸던 박현민입니다. 현민은 정중하면서도 딱딱한 느낌을 주려 노력헀다. 그 것이 그가 생각한 취재의 기본자세 였다. 최영은은 큰 키에 균형 잡힌 몸매의 소유자였다. 볼륨감이 있는 긴 헤어가 인상적이었다. 큰 눈과 뚜렷한 이목구비가 도드라져 시원시원해 보이는 인상이다.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 끌기에 충분한 외모였다. 누가 보더라도 한 번 더 돌아볼 만한 미인이었다. 인공미가 조금 느껴지는게 흠이었다. 그녀는 몸매에 잘 어울리는 버건디 블라우스와 맥코트를 입고 있었다. 최영은은 지역의 건설회사에 다닌다고 했다. 현민도 이름을 들어본 지역에서 나름 큰 규모의 중견업체였다. 최영은의 모습이 자신의 예상과 달라 현민은 당황스러웠다. 그녀는 화려한 스타일이었다. 건설회사에 다닌다고 해 설계나 사무직복장과 외양을 생각했던 자신의 빈약한 상상력을 탓하고 있었다. 사건해결에 가장 좋지 않은 것은 편견과 고정관념이다.
현민은 한정혜의 모친으로부터 의뢰를 받았고 당시 상황에 대한 경찰보고서와 자료를 보았다고 했다. 최영은은 머뭇거리는 듯 했지만 현민이 꼭 만나서 할 얘기가 있다고 하자 마지못해 약속을 잡는 눈치였다. 방송국 르포 기자라로 자신을 소개했다. 최영은은 정혜가 마지막으로 통화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당시 경찰에서 충분히 사건과 관련해 조사를 받았을 터다. 사건 기록을 봐도 그녀에 대한 특별한 점은 없었다. 신효선이 전해준 서류내용도 오래됐고 시간을 들여 기록을 꼼꼼하게 훑어 봤지만 특별한 것은 없었다. 현민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잔 더 주문하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은도 같은 것을 부탁했다. 잠시 후 그녀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잠시 생각을 가다듬는 듯 보였다. 무슨말을 꺼내야 하는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현민을 만난 계기를 마중물삼아 기억을 우물에서 펌프로 퍼올리는 듯 천장의 상들리에를 응시한 뒤 말을 꺼냈다.
― 잊혀 질 만도 한데. 부모한테는 그게 아닌가 봐요. 약간 허스키한 음색이다. 예상과 다른 목소리였다.
― 서울에 있다가 이년 전 쯤 돌아왔죠. 다시 서울로 가고 싶은 생각도 있어요. 오래전 사건이 있을 때 경찰조사를 받았어요. 정혜의 사망은 자살로 결론이 났고요자신은 그 사건과 관련이 없다고 강조하는 듯 했다.
― 정혜가 살아 있으면 제 나이가 되었을 텐데. 이쁘고 똑똑한 아이였죠. 인기도 많았고.
― 구체적 상황을 좀 설명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한정혜씨와는 친한 사이었나요? 경찰조사에서는 기억이 안 나서 얘기를 못했다던가 하는 부분이 있다던가 하는.
― 경찰에 얘기하지 못한 부분이라면.... 그녀는 잠시 뭔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 정혜와 1년간 같은 반이였죠. 3학년 때는 반이 달랐고요. 학교에서 3학년 때 논술수업을 했거든요. 그때도 같이 수업을 들었 고요. 이 얘기는 그때 경찰조사에서 안했어요. 굳이 사건과 관련이 없을 것 같아서요. 서울에서 마지막으로 모임을 한 그 장소에서 그때 논술반에 있었던 아이들과 같이 모인것이죠. 그 모임이었어요.
― 논술이요?
― 네, 당시에는 대학입시로 논술이 중요했어요. 수시로 많은 인원을 뽑았거든요. 학교 선생님들이 논술 때문에 힘들어했죠. 답안 쓰는 것 알려주느라. 당시 대학에서는 채점기준도 답안도 공개하지 않고. 그런데 그 쌤은 쉽고 정확하게 의도를 설명해 주더라고요 그 샘이 누군지 아세요? 들으면 놀랄걸요? 그녀의 입가엔 딸기쨈과 같은 달달한 웃음이 묻어 있었다.
― 황정우에요. 아시죠?
― 네? 누구요? 황정우? 현민은 놀라서 되물었다. 황정우라면 한창 미디어에 오르내리는 야당 유력 정치인 아닌가.
― 하하. 네 맞아요. 그 선생님이 학교를 그만두고 회사를 차렸죠. 방과 후 수업으로 지역의 많은 학생들을 위한 수업을 할 것이라고 하면서 기회가 되면 여러 곳에서 교육에서 소외된 지역 아이를 위한 목적이라고 했어요. 서민체험 한다고 여기저기 다니고. 정치권에 들어가기 전 일거에요. 알고 보니 지역 유지였던 거죠. 뭐, 아버지 황의원이 시켜서 사회경험을 좀 키려 한 것일 수도 있고 내세울만한 경력을 만들려고 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고. 서민 코스프레? 그렇게 말하고 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말이 재미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 그렇군요……현민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녀는 당시를 회상하는 듯 했다.
― 솔직히 글을 잘 못쓴다고 알고 있었는데 어찌하다보니 그 반에 들어갔고요. 기억나는 것은 답안쓰기 참 어렵다. 그런데 정혜가 칭찬을 많이 들었죠. 정혜가 책을 많이 읽었겠죠? 그래서 출제자의 의도를 이해해서 그 부분을 잘 적어 냈어요. 수업을 하기는 했지만 어려워서 따라가기가 힘들었고. 논술반에서 정혜하고 승민이였나? 그 둘이 열심히 했고 시험에 합격을 했어요.
나머지는 그냥 흐지 부지였고. 최영은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현민을 쳐다보았다.
― 아 참. 이게 중요한 게 아니죠. 정혜 사건이 중요한 거죠.
현민은 그녀의 말을 유심히 들었다. 어쨌든 말을 들어야 하고 중요 정보를 알아야 하는 것은 자신이므로. 그녀는 천천히 말을 꺼냈다.
― 기억나는 것으로는 정혜와 황정우 샘과 뭔가 있다. 이런 소문은 좀 있었죠.
― 네? 현민이 놀라서 되물었다. 으흠.. 그건 경찰에서 얘기했나요?
― 확실하지 않은 거예요. 그냥 형주시내 번화가하고 유원지에서 둘을 봤다. 그런 얘기를 학교에서 누군가 했나 봐요. 정확하지 않은 소문인데 생각해보니 소문이고. 뭐 이미 다 지난얘기죠.
― 아. 그래요? 유력 정치인 황정우라. 현민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 정혜 사진 보셨죠? 이쁘 잖아요. 그래서 유난히 그런 소문이 있었는지도 모르죠. 정혜에게 왜 그런 일이 발생했을까요? 모를 일이에요. 안타깝고.
― 경찰 수사 보고서는 자살로 추정된다고 하는데 한정혜 씨한테 고민거리라든가. 말 못한 어려움이나 그런 게 있지 않았을까요? 여자들끼리는 어쨌든 그런 부분을 얘기할 수도 있으니까.
― 개인적인 얘기를 털어 놓을 정도로 친한 것은 아니였죠. 정혜는 승민이하고 친하게 지냈을 거예요. 아 참. 오래전 장례식장에서 승민이를 만난 적은 있었죠. 잠깐 얘기하다가 걔 연락처를 받은 기억은 있는데 통화를 해본적은 없네요. 뭐 다 그렇지 않아요. 사는 게 다르니. 그런 자리 아니면 딱히 만나거나 하지는 않고. 현민은 그녀의 말을 듣고 수첩에 이름과 번호를 적어 두었다.
― 뭐라고 했더라. 어디 무슨 연구소에서 근무한다나 벤처기업을 차렸다던가 했거든요. 로봇 어쩌구 했던 것 같고요. 번호는 있는데 건 적이 없어서 바뀌었는지는 몰라요. 관심이 별로 없어서.
― 한정혜씨와 마지막 통화는 어땠나요? 그 부분이 중요한데요.. 만약 자신이 스스로 삶을 마무리하려 했다면 보통 마지막에 중요한 얘기를 할 수도 있으니까요최영은씨 말대로 친한 편은 아니었는데 왜 마지막 통화를 했을까요?
― 별로 기억이 없어요. 특별한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르죠. 단순한 안부나 뭐 물어보기 위해 했을 수도 있고요. 기억에 남는 이야기를 한 것 같지는 않아요. 대학 마지막 학기였고 사실 졸업이나 마찬가지죠. 저는 그때 친구 한명과 낮에 한강에서 간단하게 맥주 마시며 얘기를 하고 있었죠. 헤어지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고등학교 얘기가 나왔죠. 문득 고등학교 생각을 하고 있었죠. 때마침 고등학교 시절 친했던 친구가 서울에 온다고 해서 만났죠. 같이 수다를 떨다가 갑자기 논술반 아이들이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모이게 된 거죠. 그때 서울에 있는 애들 중심으로 해서. 그때가 황정우쌤이 미디어에 출연하기 시작할 때였어요.
― 그렇군요. 그래서 잘 기억이 나는가 봅니다. 혹시 마지막 모임에서 싸움이 있거나 했습니까?
― 아뇨.
그녀는 갑작스레 정색을 하며 현민을 보았다. 반응이 너무 빨라 오히려 이상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목소리도 조금 떨리는 듯 했다. 평소와 약간 다른 톤이 느껴지는 것을 현민은 놓치지 않았다. 분위기는 좋았어요. 방학이니 곧 집에 내려간다는 얘기도 했던 것 같고. 남자친구 얘기 그런 것들이죠. 당시 나이에 맞는. 솔직히 기억이 많이 안나요. 한창 자리가 무르익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승민이가 화를 내고 갔던 것은 기억해요. 술이 취해서 그런 것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원래 승민이는 활달하거나 말을 잘하는 아이는 아니었어요. 이후로 분위기가 좀 안 좋아 졌고. 정혜도 일이 있다고 자리에서 일어섰고요. 그때 상황이 그랬죠.
― 음...... 그렇군요.
― 오래전 일이라. 제 말이 뭔가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하죠? 최영은은 샐쭉하니 웃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알려줄게 별로 없다는 표정처럼 보이기도 했다. 잔뜩 기대했지만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눈동자를 굴리며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최영은의 눈은 뭔지 모르게 반투명한 보석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 눈은 현민의 말에 맞춰 부지런히 정보를 습득하는 동물적 느낌이었지만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있었다. 공감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자신의 말에 기계적으로 반응한다는 인상이었다. 형사의 직감 같은 것이었지만 현민은 지금 그런 판단을 내리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생각했다.
― 아 그럼 그때 모임에서 같이 만났던 친구들은 아직 연락을 하나요? 지금도 만나고 있고요? ― 아뇨. 그때 이후로 좀 소원해졌다 할까. 연락은 잘 안 해요. 다들 일도 바쁘고. 결혼한 애들도 있고. 다른 아이들은 서로 자주 연락하고 지내는지는 모르겠어요. 좀 오래돼서
― 동창회 같은 것도 할 것 아닙니까?
― 저는 굳이 참여하고 싶지 않아서 연락이 오긴 해도 잘 나가지 않았죠. 사실 자기 자랑하러 가는데 별로 끼고 싶지가 않고.. 그런데 혹시 이거 방송프로에 나오는 거예요? <그것이 알고 싶다> 뭐 그런 것처럼. 영은은 흥미 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이 모든 것이 연기라면 인정할만한 정도의 대응이었다.
― 아뇨, 그것은 아니고. 기사도 방송도 뭔가 의미가 있어야죠. 정혜가 극단적 선택을 한 사연이 있다면,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야 하고 가치가 있다고 하면 기사가 될 수도 있는데. 그렇지 않다면야 하루에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에 수 천 명입니다.
― 하긴 그렇기는 하죠. 그게 다에요. 최영은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만남을 마무리하려는 눈치였다.
― 뭐 이번에 만나서 저도 정리를 좀 하고 싶었어요. 정혜와 관련된 것은 이게 마지막일 것이다. 이런 생각이었죠. 경찰에도 그렇게 얘기 했으니까. 더 알고 싶으시면 경찰 찾아가세요. 이제 가볼게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걸음을 옮길 때 마다 또각또각 소리가 났다. 카페 문 쪽을 열자 챙그랑 하는 종 소리가 카페에 퍼졌다. 귀찮게 하지 말아달라는 무형의 암묵지 같은 느낌을 만들었다. 자신을 만난 것도 그런 이유일 듯 싶었다. 현민은 유리창으로 최영은의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시내 쪽으로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마치 옷에 붙은 지저분한 것들을 모두 털어버리려는 몸짓처럼 느껴졌다. 투피스 치마 밑으로 단단해 보이는 종아리 근육이 보였다. 협조적이라는 느낌도 그렇다고 무관심해 보이지 않을 적당한 거리감을 갖도록 만드는 답변이었다. 다만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느낌을떨쳐낼 수는 없었다.